Round 84. 1958년
쾅-!
신문을 본 주영 일본 대사 니시 하루히코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신문에는 맨체스터 더비전 때 있었던 ‘일본인들의 난동’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젠장, 얻어터진 건 우리나라 학생들인데, 왜 가해자처럼 꾸며 놓은 거지?”
분통을 터트리는 하루히코에게 비서가 대답했다.
“황군의 군기를 든 게 영국군 참전자들에게 불쾌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거야 원! 전쟁 끝난 지 10년이 넘었어! 자기들이 이겼으니까 그만 잊어 줘도 되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최근에 불길을 지핀 영화가 있어서 말이지요.”
“콰이강의 다리 말이로군.”
영화는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부려 다리를 만들고, 이를 연합군 측에서 막아 내는 내용인데, 여러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영국군 참전자들은 일본군이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루히코가 봤을 때는 포로수용소 소장이 너무 변변찮고 나약하게 나와 불만이었지만.
아무튼 이번에 맨체스터에서 벌어진 사건은 현재 일본 정부 입장에선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 영국과의 친교 회복 및 국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물론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이렇더라도,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니시 하루히코만 해도 그랬다.
“그놈은? 리준욘 그놈은 이 사건에 대해서 별다른 말이 없던가?”
“경기 끝난 후 인터뷰에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흥, 그 건방진 조센징 놈!”
지난번에 리준욘과 접선한 이들이 알린 이야기에 하루히코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귀축영미와 싸운 일본을 나치 따위와 비교한단 말인가.
물론 전략적인 측면에서 나치 독일과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긴 했다.
머저리 같은 군바리들과 선전포고 하나 사전에 전달하지 못한 외무성의 머저리들이 저지른 만행과 잘못이 큰 건 사실이고.
그렇다고 함부로 아시아 해방의 대의를 모욕할 수 있는가.
일본으로부터 근대화의 단물은 다 받아먹은 주제에 말이다.
제 놈이 그만한 축구 실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도 중국의 속국 노릇을 하며 공자왈 맹자왈 타령이나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 건방진 놈 콧대를 확 눌러 버려야 할 텐데. 이대로 승승장구하게 내버려 둬서 좋을 게 없어.”
리준욘의 명성은 계속 커지는 중이다.
미국인 레슬러를 쓰러트린 리키도잔(力道山)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이었다.
리키도잔은 초청 선수를 쓰러트렸을 뿐이지만, 리준욘은 영국 현지에서 영국의 유명 선수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더구나 영국은 독일과 함께 일본 근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나라다.
비록 전쟁 때는 귀축영미라 폄하했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에게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 대한 로망은 적지 않았다.
미국과 달리 자국과 비슷한 섬나라에 왕정 국가이기도 하고.
그런 영국에서 일본인도 아니고 하등한 조센징 따위가 설치고 있다?
비록 패전했다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있다 자처하는 일본 입장에선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쿠류카이(黒龍会) 쪽 인사가 쓸 만한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했습니다.”
“믿을 만한가? 괜히 망신살만 뻗치면 안 하느니만 못한데?”
“다이쇼 연간에 후테이센징(不逞鮮人)도 전향시킨 전적이 있는 인물이라 합니다.”
비서의 장담에도 하루히코는 못 미더웠다.
후테이센징이야 폭도들이니 채찍과 당근으로 다루면 간단했다.
하지만 상대는 법적으로 홍콩 시민권자다.
지난번 체코슬로바키아 빨갱이들처럼 멍청하게 달려들다간 오히려 망신만 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설프게 달려들어선 안 된다. 물고 늘어질 약점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놈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리준욘과 관련해 모조리 조사해 봐. 고쿠류카이에게도 흠집이 될 만한 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조사하라고 이르고.”
“알겠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조선 속담이 있다.
니시 하루히코는 찌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먹지 못하면 완전히 밟아 뭉개 버릴 생각이었다.
***
어두운 새벽.
준영과 리즈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하… 생각보다 높네, 이거.”
“당연하죠. 해발 1,100피트(335미터)가 넘는걸요.”
모즐리 동쪽에 있는 윔베리산.
눈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능선이 완만해서 오르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더구나 꼭대기 가까이 다다르자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해는 아직 뜨지 않은 건가?”
동쪽부터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지만,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회색 구름 사이로 빨간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밝은 여명 아래 웅장한 풍경이 펼쳐졌다.
“와, 대단하군!”
“정말 아름다워요!”
준영은 물론 리즈도 감탄을 아끼지 못했다.
윔베리산은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따라서도 이미 여러 번 와 봤다.
하지만 여명 아래 이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새벽부터 부산을 떤 보람이 있네요.”
“새해 첫 일출은 각별하니까 말이지.”
오늘은 1958년 1월 1일.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있었던 1957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은 준영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한 달하고 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가장 어두운 날.
그날 벌어질 끔찍한 사고를 피하기 위해 준영은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있지만, 일단 일정 변경은 수포로 돌아갔다.
윈스턴 처칠이라는 막강한 카드를 썼음에도 협회는 요지부동이었던 것.
결국 2월 5일 츠르베나 즈베즈다 원정 경기를 마친 후, 귀국해서 2월 8일에 리그 경기를 치러야 했다.
그것도 현재 1위 다툼을 하고 있는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
‘뭐,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뮌헨을 경유하지 않든가, 아니면 유고슬라비아까지 직항으로 왕복할 수 있는 다른 교통편을 알아보든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어요?”
“모두를 구할 방법에 대해서.”
“그 뮌헨에서 벌어진다는 비행기 사고 말이군요.”
리즈도 준영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일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녀 역시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사고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던컨을 비롯한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곧잘 준영을 찾아온 덕분에 그녀도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어제도 저택에 찾아와 연말 파티를 함께 즐겼다.
그런데 그들이 얼마 후에 죽거나 크게 다친다니!
“반드시 사고를 막았으면 좋겠어요.”
“그리해야지. 반드시 그래야 하고말고.”
태양은 어느새 다시 구름 속으로 파묻혔다.
사방이 어두침침해졌지만, 구름 사이로 뻗어 나온 햇살은 준영이 가는 길을 비춰 주었다.
***
준영과 리즈는 아침 식사 시간에 늦지 않고 돌아왔다.
새해 아침 식사는 채소로 만든 샐러드였다.
예전부터 프레드로 집안에선 이렇게 새해 첫날은 푸른 채소를 먹는 가풍이 있다고.
“신선한 채소를 먹어야 한 해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다고 하더군. 한국에서도 새해에 특별히 먹는 음식이 있나?”
알버트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떡국이라고, 쌀을 찧어서 굵게 뽑은 케이크, 아니 과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걸 또 얇게 썰어서 육수에 무랑 같이 넣고 끓여 먹죠.”
“음, 이탈리아 파스타와 비슷해 보이는군.”
준영 덕분에 프레드로 저택 사람들도 종종 한식을 먹곤 했다.
물론 허들이 높은 김치 같은 게 아니라 두부나 불고기, 갈비찜, 양념 치킨 같은 거였다.
어제 연말 파티에도 경기장 스낵용으로 판매할 씨앗 호떡과 회오리 감자를 내놓았는데,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근데 새해 음식을 오늘 먹진 않아요.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달력이 다르거든요.”
“유럽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이 아니라 인도의 힌두력 같은 건가 보군.”
“예, 양력이랑 보통 한 달가량 차이가 나죠.”
준영이 억관에게 듣기로 1958년 음력설은 2월 19일이었다.
양력설과 50일 정도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건 그렇고, 공부는 좀 어떤가? 할 만한가?”
“공을 다루는 것만큼 만만하지 않더라고요.”
과거로 오면서 준영의 학력은 백지가 되었다.
축구를 하는 데는 딱히 문제가 안 되지만, 준영의 최종 목표는 석유 재벌 구단주.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학력은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 잣대 중의 하나였다.
사업을 하거나 중요한 인간관계를 쌓는 데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 인종적인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학력은 필요했다.
그래서 최근에 고교 학력 인증 시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게 끝나면 다음은 대학 입시. 다만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며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가능하지 않을까? 군 복무를 하면서도 프로 선수로 활동하기도 하는데 말이야.’
바비 찰튼이 그랬고, 던컨 역시 프로 선수 생활을 겸하면서 군 복무를 했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시간에 여유만 있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열심히 하게. 일단 머릿속에 든 건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자산이 되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알버트의 덕담이 아니라도 준영은 진지하게 해 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뜻을 이루는 건 물론, 리즈와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해내야 마땅하니까.
***
오전 10시.
준영은 프레드로 일가와 함께 모즐리의 성요셉 성당을 찾았다.
준영은 이미 여름부터 이 성당을 꾸준히 찾아오고 있었다.
단지 알버트의 가족이 신자여서, 그리고 본인이 보육원 시절부터 성당을 들락거렸기 때문은 아니다.
이 시대에 오고 나서 마음이 더 간절해진 탓이다.
‘부디 굽어살펴 주소서!’
21세기로 돌려보내 주시든, 아니면 이 시대에서 무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시든.
처음엔 그리 빌었지만, 요즘은 달랐다.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비행기 사고가 나지 않기를, 던컨을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In nómine Patris, et Fílii, et Spíritus Sancti.”
“Amen.”
라틴어로 진행되는 이 시대의 미사는 이제 적응이 되었다.
여름의 첫 방문 때만 해도 서먹하게 대하던 신자들과도 이제는 제법 가까워졌다.
알버트가 이 마을의 유지이기도 하지만, 신자들 중에 축구 팬들도 제법 많았기 때문.
특히 아이들에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인 준영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존, 드리블하는 거 가르쳐 줘요!”
“나도 나중에 올드 트래퍼드에서 뛰고 싶어!”
이런 미래의 꿈나무들을 상대하면서 알게 된 게 있었다.
바로 이곳 모즐리에선 유망주 지도와 육성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는 것.
21세기 관점이 아니라 현재 관점으로 봐도 그랬다.
‘모즐리 AFC 같은 아마추어 클럽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프로팀과 비교할 수 없으니까.’
자본이 적으면 투자가 적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인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좋은 코치나 감독은 더 부유한 팀에서 채 가기 마련이니까.
그렇다 보니 이 지역 축구인들이나 교육자들은 이 마을의 유일한 프로, 그것도 유명 선수로 자리매김한 준영에게 꽤 기대를 품고 있었다.
***
우리나라 유소년 축구 육성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교훈 삼아 시작되었죠.
그렇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친 사례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라서, 프랑스도 60~70년대 암흑기를 겪고 클레르퐁텐 축구 연구소를 통해 유망주 육성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쇄신에 나서는 건 독일도, 잉글랜드도, 벨기에도 마찬가지였지요.
뿌리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