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83화 (83/400)

Round 83. 구사일생

“어떻게 된 거지?”

버스비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후반 30분은 마(魔)의 시간대.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져 그만큼 활동도 줄어들 때였다.

더구나 최근처럼 일정이 빡빡한 상황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라인업에 변화를 주었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출전한 맨시티 선수들은 크리스마스와 박싱데이에 벌어졌던 번리와의 2연전에도 출전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다 할 체력 저하를 보이지 않고 있는 걸까?

“무슨 마법을 쓴 건가, 레스?”

“마법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특별한 조치를 했을 뿐이죠.”

특별한 조치라니?

그때 버스비가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던지 언성을 높였다.

“설마 메스암페타민을 썼나?”

육상이나 사이클 등, 각성 효과가 강한 약물을 선수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스포츠 연맹이나 협회에서는 도핑 금지를 장려하지만, 딱히 처벌이나 규제는 없었다.

그건 FIFA나 FA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어떤 건지 알기나 하나? 사람의 정신과 생명을 갉아먹는 거라고!”

“오해하지 마세요, 맷. 그런 것에 손댈 정도로 저는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맥도웰 감독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우승이 탐이 나고 승점이 필요했지만, 절대 선을 넘는 짓을 해선 안 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 지금 저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루코제이드입니다. 회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 의사가 추천해 주더군요.”

루코제이드는 1927년 뉴캐슬의 약사 윌리엄 W. 헌터가 개발한 음료다.

보통 독감 환자들의 회복에 사용되는데, 주성분은 과일에서 추출한 포도당과 설탕이었다.

“여기에 버트의 인맥을 통해서 독일에서 칼로리 보충용 식품을 들여왔죠.”

“칼로리 보충 식품? 그런 것도 있었나?”

“쇼카콜라라는 초콜릿인데, 베를린 올림픽 때 출전 선수들에게도 지급한 거라더군요.”

버트의 말에 따르면 지난 전쟁 때 독일군도 이것을 먹고 밤낮 없이 행군하며 싸웠다고 한다.

다만 카페인이 많은 게 흠이라, 일부 선수들은 불면증이나 속 쓰림을 호소하기도 했다.

‘과일과 고열량 음식이라. 존이 알려 준 것과 비슷하구만.’

지난번 샴록 로버스와의 유러피언 컵 예선에서 준영은 피로 회복에 좋은 방법들을 알려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추천한 음식과 레스가 말한 것이 비슷했다.

아마 레스도 힘든 일정을 타개하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조치했으리라.

“미안하네, 레스. 자네 선수들 움직임이 예상외라 그만…….”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억측은 자제해 주세요.”

맥도웰 감독은 필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힘겨운 일정의 마지막을 소화하고 있는 그들은 이를 악물고 발을 내딛고 있었다.

‘다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게!’

남은 시간은 약 15분 정도.

예상과 다른 상황에 유나이티드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빈틈을 파고들어 일격을 날리면 상대는 주저앉고 말리라.

이에 맥도웰은 연방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계속 독려했다.

***

“제길… 망했네, 이거.”

가쁘게 숨을 내쉬는 준영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맨체스터 시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바비 찰튼의 교란과 양 측면에서 파고드는 스캔론과 케니의 역습과 속공도 잘 막아 냈다.

침투 패스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철벽 수문장 버트 트라우트만이 선방하며 맨시티 선수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렇게 연이은 공격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오히려 발이 무거워진 건 유나이티드 쪽이었다.

여기저기 허리가 기역 자로 꺾인 선수들이 나오고 있었다.

팀 내에서 체력왕으로 꼽히는 준영과 던컨, 바비도 눈에 띄게 숨을 헐떡일 정도.

연말 강행군의 후폭풍이 점차 나타나고 있었다.

“힘을 내, 유나이티드!”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돼!”

맨유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과 호소가 그나마 선수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다들 정신 차려! 역전패를 당하고 한 해를 끝내서는 안 돼!”

주장인 로저 바인이 연방 선수들을 독려했다.

체력이 떨어져 기동력을 잃는 것보다 더 심한 문제는 바로 집중력 저하.

안 그래도 중원에서 패스 미스로 상대에게 기회를 넘겨주고 있는데, 자칫하면 수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나올 수도 있었다.

“반즈가 들어온다!”

“붙어서 막아!”

후방에서 패스를 받은 반즈가 유나이티드 측면을 내달렸다.

그 역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집중력을 발휘해서 마크 존스를 제쳐 냈다.

그리고 페널티 박스 앞에서 망설임 없이 슛-!

“놔둘 것 같으냐!”

황급히 달려온 준영이 투혼을 발휘하며 몸을 날렸다.

그의 머리에 맞은 공은 유나이티드 골대 상단 구석에 그대로 꽂혔다.

“자, 자책골……!”

“아니, 뭐야, 이게!”

“리틀 존 저 자식, 골대를 착각했나?”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맨유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맨시티 팬들은 그야말로 풍악을 울리고 있었다.

“캬캬캬!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진짜 제대로 떨어졌네.”

“엄청난 다이빙 헤딩 골이었어. 올해 베스트 골로 꼽힐 정도로.”

수만 명의 비웃음과 야유가 필드로 쏟아져 내렸다.

이제까지 겪지 못한 중압감이 준영의 몸을 내리눌렀다.

역전 골을 내주다니. 그것도 자책골로 주다니.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누군가 그의 등을 철썩 후려쳤다.

“던?”

“우두커니 있지 마. 아직 시간 남았다고.”

던컨의 말대로 정규 시간은 약 2∼3분 정도 남았다. 거기다 심판 재량껏 시간을 더 줄 수도 있다.

“주장이 말했잖아. 역전패로 한 해를 끝내면 안 된다고.”

“그래, 그렇지.”

“거기다 지고 가면 리즈 양에게 키스가 아니라 따귀를 맞을걸?”

“이 자식이…….”

리즈가 그 정도로 매정할까.

아무튼 던컨의 말을 들으니 이대로 망신당한 채 경기를 끝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힘내라, 이준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스스로를 독려한 준영은 킥오프가 되자 곧바로 맨시티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모두 올라가! 올라가서 골을 만들어!”

버스비 감독의 지시가 아니라도 모든 선수들이 맨시티 진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모 아니면 도.

어차피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2-1이나, 3-1이나 패하는 건 마찬가지.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시간에 도박을 해 보는 게 낫다.

성공하면 승점 1점이라도 챙길 수 있으니까.

“와, 유나이티드 녀석들, 작정하고 덤비는데?”

“얼마든지 덤비라고 해! 추가 골을 넣어서 바보로 만들어 주자!”

바비 존스턴을 비롯한 맨시티의 공격수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인터셉트를 노렸다.

그런데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체력이 바닥난 상황이었지만 최후의 일격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의욕은 강했고, 집중력 또한 방금 전과 비교되지 않았다.

그렇게 저돌적으로 몰아붙이자, 당황하는 건 오히려 맨시티.

그들의 라인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쐐기 골도 좋지만, 지금은 점수를 지키는 게 중요할 터.

그래서 그들은 공이 오면 멀리 걷어 내거나 라인 밖으로 내보내곤 했다.

섣불리 패스한다고 공을 잡고 있다간 맨유 선수들에게 인터셉트당할 수 있으니까.

“침착하게 해! 공을 함부로 날리지 말고 뒤로 돌려!”

맥도웰 감독은 지금 상황이 불안했다.

작정하고 밀어붙이는 유나이티드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불안은 딱 적중했다.

수비수가 황급히 걷어 내려던 공이 중간에 로저 바인의 발에 끊겨 버렸던 것.

공을 잡은 로저는 주저 없이 슛을 날렸다.

“오- 아아아아…….”

“휴, 큰일 날 뻔했네.”

빨랫줄처럼 뻗어 간 로저의 슈팅은 버트 트라우트만의 선방을 맞고 골대 위로 넘어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맨시티 팬들은 아직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코너킥으로 유나이티드의 공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아마 이게 오늘 경기 마지막 기회일 거다.’

여기서 득점을 하지 못하면 끝.

페널티 박스 안에 들어온 준영은 상대 골키퍼와 수비수들의 위치를 재빠르게 살펴보았다.

공이 어디로 오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계산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쏟아지는 야유와 비웃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거 어째 불안하구만.’

버트는 준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더스필드 타운과의 연습 경기 때 녀석이 보인 플레이와 골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기 때문.

지금 이 상황에서도 녀석은 어떻게든 골을 넣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파앙-

알버트 스캔론이 올린 코너킥이 맨시티 페널티 박스 위로 날아왔다.

던컨과 데니스 바이올렛이 황급히 움직이며 수비수의 눈길을 끄는 가운데, 준영이 떨어지는 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이런, 겁먹지 마!’

커다란 체격을 가진 장신 선수의 저돌적인 움직임에 버트는 순간 몸이 굳고 말았다.

1956년 FA컵 결승전에서 충돌하면서 입은 부상이 떠올랐던 것.

황급히 그 악몽을 떨쳐 냈던 그는 곧장 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발 늦은 대응이었지만, 준영의 헤딩슛을 중간에 끊어 내는 데는 성공했다.

“나이스 펀칭… 앗!”

데니스 바이올렛의 마크를 거들던 케네스 반즈는 볼이 떨어지는 위치에 있는 선수를 보고 낯빛이 변했다.

하늘색이 아니라 붉은색.

상대적으로 경계를 덜 받았던 바비 찰튼이 떨어지는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대 그대로 골대에 밀어 넣었다.

“맙소사, 들어갔어!”

“세상에! 경기가 또 이렇게 될 줄은…….”

골대 뒤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여기서 또 동점을 만들어 버리다니!

하지만 그들보다 다 잡은 경기를 놓쳐 버린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이나 팬들의 충격이 더했다.

유나이티드 쪽에서 길길이 날뛰는 동안,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머리를 움켜쥐고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휴, 죽다 살았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준영은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냈다.

루턴 타운전에서 입은 상처가 다시 터진 모양이지만, 아파할 겨를은 없었다.

정말 얼마 안 남은 시간, 경기를 안정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

노르웨이 오슬로 북서쪽 홀멘콜렌.

그곳의 호텔 주방에서 20세의 동양인 청년이 감자를 깎고 있었다.

“Arthur! 이봐, 아서!”

“예, 무슨 일입니까, 지배인님?”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호텔 지배인은 봉투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영국에서 누가 자네한테 편지를 보냈어.”

“영국에서요? 누가요?”

“John Young Lee라고 하는데, 너도 Lee씨지? 혹시 네 친척 아니냐?”

“영국엔 친척이 없는데요.”

아서는 의아해하며 봉투를 뜯었다.

거기에는 거금의 우편환과 함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철호 씨.

나는 현재 영국에서 축구 선수로 활동 중인 이준영이라 합니다.

난민으로 노르웨이에 갔다고 들었고 힘들게 공부하고 있단 이야기를…….>

깔끔하게 적힌 한글 편지를 본 아서, 아니 이철호의 마음이 울컥했다.

영국에 있다는 한국인 선수.

어떻게 자신에 대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연락을 하고 도움을 주다니!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 아직 다 읽지 못한 편지지에 떨어졌다.

<…낯선 외국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난을 알기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만나도록 하죠.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편지를 다 읽은 이철호는 다짐했다.

열심히 공부하자, 그리고 나중에 영국으로 가자.

그래서 이준영 선수를 만나자!

언젠가 다가올 날을 기약하며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루코제이드는 현재도 생산 판매되고 있습니다. 에너지 드링크로 팔리는데, EPL 선수들이 곧잘 애용한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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