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81. 맨체스터 더비
21세기만큼은 아니지만, 맨체스터에는 아시아인들이 많이 있었다.
2차 대전 때 노동자로 온 인도인들,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중국인들, 그들에 비해 소수지만 사업가나 유학생으로 구성된 일본인들 등등.
문화가 다르다 보니, 그리고 영국 선수들만 나오다 보니 축구 리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갑자기 엄청난 실력의 동양인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존 Y. 리.
맨체스터의 아시아인들은 그의 활약에 열광했다.
월등한 체격과 빼어난 실력을 가진 동양의 선수가 내로라하는 영국 선수들을 물리치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뿌듯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 통쾌함은 목마른 자에게 뿌려진 단비와 같았다.
자부심과 자신감.
오랫동안 서양 열강에 시달렸던 아시아인들은 이를 내세우기 힘들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존 Y. 리의 활약은 거의 잃고 있었던 포부를 다시 느끼게 해 주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이름도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저런 선수가 나왔는지?”
“당연히 중화의 혈통이니까 그런 게지.”
“본인은 한국인이라는데 그 무슨 개소리야.”
“아무튼 우리라고 앞으로 못할 거 없잖아. 저 작고 힘없는 나라에서도 저런 인재가 나오는데, 우리나라라고 안 그러겠어?”
“맞아, 맞고말고!”
언젠가 우리도 해낼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을 가진 아시아인들은 존 Y. 리를 응원하러 가고, 거기서 자국의 국기를 휘날리기도 했다.
같은 아시아인들의 단합을 과시할 겸, 자국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었다.
물론 어떻게든 자신들의 나라, 자신들의 민족과 연관시키고 싶어 안달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한 존 Y. 리의 말은 애써 부정하거나 무시하면서 망상을 펼쳤다.
자기들 민족 혈통이라고, 우월한 자기 나라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그렇게 망상 어린 자만에 고취된 자들은 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진 영광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영국 한복판, 맨체스터의 메인 로드에서 욱일기가 휘날리게 된 것이다.
***
“맨체스터 시티에 일본 선수라도 들어왔어?”
“아니, 없는데.”
경기 시작 직전, 준영이 물어본 말에 바비 존스턴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왜 저 뻘건 걸레짝이 휘날리고 있단 말인가.
‘내가 한국인이라고 엿 먹일 의도인가? 아냐. 어쩌면 나한테 숟가락 얹어 보려는 수작일지도?’
일전에 찾아왔던 일본인들이 떠오른 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번 양보해서 일장기는 그렇다 쳐도 욱일기라니.
저런 건 그냥 놔두면 안 된다.
저 깃발을 앞세운 군국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짓밟고 죽였던가.
당장 경기장 용역이나 경찰에게 치우라고 해야지!
이에 준영은 곧바로 필드 가까이 있던 경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요?”
“저기 저거 말인데…….”
준영이 지적하려던 순간, 욱일기가 걸린 관중석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야 이 쪽바리(Jap) 새끼들아! 진짜 뒤지고 싶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 엿 같은 쪽바리 군대 깃발을 내거는 거야!”
우르르 몰려들어 드잡이와 주먹질을 해 댄 건 동양인들이 아니었다.
관중석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30∼40대의 영국 아저씨들.
그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안 그래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참교육을 하러 가던 중국인들이 주춤했다.
“네놈들도 쪽바리냐?”
“아니요. 우린 중국인이오!”
“우리도 저놈들을 손봐 주려던 참이었다고!”
관중석에서 일어난 일대 소란은 경찰과 용역들이 나서면서 수습되었다.
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관중들을 만류하고, 욱일기를 휘둘렀던 일본인들을 경기장 밖으로 끌어냈다.
‘와, 나설 필요도 없구만.’
21세기에는 개념 없는 구단이나 선수들이 욱일기로 물의를 일으키곤 했는데.
여기서는 곧바로 제압당했다.
‘하긴 그럴 만하겠군. 2차 대전 참전자들이 팔팔하게 살아 있잖아.’
아무튼 그 바람에 경기 시작이 조금 늦춰졌다.
심판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그러다 소란이 수습되자, 곧바로 휘슬을 불었다.
삐익-
“와아아아아!”
시작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메인 로드를 뒤흔들었다.
하늘색의 맨체스터 시티, 이와 대조되는 붉은 저지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 두 팀을 응원하기 위해 무려 70,483명의 관중들이 메인 로드를 찾았다.
“이겨라, 스카이블루스!”
“지난번 대패를 똑같이 갚아 주라고!”
맨시티 팬들은 2라운드 올드 트래퍼드에서 4-1로 패배한 아픔을 잊지 않았다.
더구나 존 Y. 리가 원래 맨시티의 영입 대상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맨유에 대한 원한이 더욱 높아졌다.
“우- 우우-”
미드필드에서 준영이 공을 잡기 무섭게 거센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준영은 별다른 동요 없이 툭툭 공을 치고 들어갔다.
「유나이티드 5 번 존 Y. 리, 시티 진영으로 돌파해 들어갑니다. 이때 시티의 앨런 커크만이 태클……! 존 Y. 리, 가볍게 뛰어넘으며 피해 버리지만, 재차 마크가 들어옵니다.」
쉴 새 없이 마이크 앞에서 입을 놀리는 라디오 중계 캐스터의 눈에 준영이 3명의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광경이 들어왔다.
근처에 있던 맨시티의 하프백과 공격수들이 저지에 나섰던 것.
이에 준영은 측면 빈 공간에 있는 케니 모건스에게 패스를 보냈다.
만 18세의 라이트 윙 케니 모건스는 잽싸게 맨시티 오른쪽 측면을 달려 나갔다.
하지만 도중에 상대 수비수에게 저지를 당했고, 곧 주변에서 2명이 더 달려들면서 금방 포위를 당했다.
당황한 케니는 황급히 가까이 있던 바비 찰튼에게 공을 보냈다.
그러나 바비 찰튼 역시 금방 3명에게 포위당했다.
‘어라, 저건 분명…….’
트라이앵글 디펜스.
허더스필드에 있을 때 빌 섕클리에게 알려 준 수비 전술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맨시티의 포메이션도 4백을 쓴 4-1-2-3.
아무래도 지난번에 허더스필드의 플랜B에 호되게 당해 보고 도입한 것 같았다.
***
맨체스터 시티의 전술이 달라진 것을 준영만 알아본 건 아니었다.
필드 밖에 있던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도 맨시티 선수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곧잘 쓰던 MM 전술이 아니구만. 저건 어디서 배웠는가, 레스?”
버스비의 물음에 맨시티 감독 레스 맥도웰은 웃음을 지었다.
“멀지 않은 동향 사람의 팀에게 배웠지요.”
“빌 섕클리의 허더스필드 타운 말이로군.”
선수 관리라면 모를까, 섕클리는 전술에 해박한 인물은 아니다.
당연히 획기적인 전술 같은 건 생각해 내기 힘들 터.
‘누군가 알려 줬겠군. 영국에 없던 전술이니, 그렇다면…….’
버스비의 눈길이 필드에서 뛰고 있는 준영에게 향했다.
안 그래도 유나이티드에 오기 전에 준영은 허더스필드에 잠시 몸담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괜찮은 전술이군. 선수들의 위치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수비와 패스를 하는 데 유리해.’
양쪽 측면을 곧잘 사용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공격 시 좌우 측면 수비수들이 전진해서 지원하는데, 그렇게 하면 전체적으로 라인이 올라가면서 숫자 싸움을 하기에 유리했다.
‘머릿수가 많으면 공격이든 수비든 수월하지. 헝가리인들이 썼던 MM 전술도 순간적으로 공격 숫자를 늘려 수비진을 파괴하는 수법이었으니까.’
유나이티드도 이런 전술 개념이 없는 건 아니다.
수비 시에는 하프백들이 중앙으로 내려오고, 센터백들이 좌우 측면을 맡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또 공격에서도 하프백들이 전진해서 지원을 하고.
여기에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선수가 전천후 만능 플레이어 던컨 에드워즈.
활동력이 뛰어난 바비 찰튼 역시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
거기다 존 Y. 리가 나타나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릴 잡으려고 꽤 노력을 했나 보구먼.”
“물론이지요. 받은 만큼 갚아 주지 않으면 팬들에게 면목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맥도웰 감독만이 아니었다.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필드를 뛰고 있는 선수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
맨시티가 펼치는 트라이앵글 디펜스에 맨유는 고전했다.
어디로든 공을 돌려도 상대방 3명에게 포위당하니, 마음 놓고 공격을 할 수 없었기 때문.
특히 이제 갓 유망주 딱지를 뗀 케니 모건스는 금세 공을 빼앗기거나 패스 미스를 저지르곤 했다.
‘케니뿐만이 아니야. 반대편의 알도 고전하고 있으니…….’
오늘 경기는 알버트 스캔론보다 경험 많은 데이비드 펙이 나오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펙은 요즘 출전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12월 14일 첼시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기 때문.
처음엔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고 경기를 계속 뛰었는데, 끝나고 더 악화되어 버렸다.
‘덕분에 회복도 쉽지 않은 상태이니…….’
아무튼 출전 못한 선수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다.
교체도 할 수 없으니, 지금 있는 선수들끼리 뭉쳐서 난관을 타개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금은 수비가 우선이다!’
꽤 열심히 훈련했는지, 맨체스터 시티의 4-1-2-3 전술 운용은 제법 뛰어났다.
특히 측면 쪽 선수들의 움직임이 좋았는데, 그중에 가장 돋보이는 선수가 케네스 반즈였다.
경기하기 전에 준영에게 죽은 바퀴벌레를 선물했던 개구쟁이.
그는 상당히 빠른 발과 깔끔한 테크닉의 소유자였다.
지금도 삽시간에 유나이티드 측면을 파고들어가서는 크로스를 올리는 척하다 로저 바인을 따돌리고 골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슛해라, 반즈!”
“골-!”
선제골을 원하는 맨시티 팬들이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반즈가 해리 그렉과 마주하기 직전, 준영이 그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거기까지야, 바퀴벌레맨.”
“이런,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하긴 옷에 붙이고 다닐 정도니…….”
“뭐라고?”
아까 버린 바퀴벌레가 붙어 있다고?
준영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반즈는 중앙에 자리를 잡은 바비 존스턴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존스턴은 주저 없이 논스톱으로 슈팅을 날렸다.
강력했던 그 슈팅은 해리 그렉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반사적으로 양손을 내민 해리는 골대 위로 공을 쳐 냈다.
“아이고, 아까워라.”
‘이게 날 또 속였어!’
순간적으로 반즈에게 낚였던 준영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결국 속아 넘어간 자신이 바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진짜 실점을 하고 말 것이다.
“코너킥이다. 절대 상대를 놓치지 마!”
“뒤에서 달려드는 놈들은 특히 조심하고!”
다들 시끄럽게 외치며 자리를 잡는 가운데, 준영은 코너킥을 차러 가는 반즈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가 오늘 코너킥 전담 키커인 모양.
’코너킥을 맡을 정도면 킥 능력도 좋다는 거겠지?’
준영이 바싹 경계심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반즈는 여유롭게 코너에 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바람을 살피다 공을 강하게 찼다.
파앙-!
거의 슈팅 수준으로 빠르고 날카롭게 날아드는 코너킥.
활대처럼 휘어져 날아드는 공은 골대 왼쪽 구석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맙소사, 슈터링이잖아!’
중앙에 있던 준영이 손쓸 틈은 없었다.
깜짝 놀란 해리 그렉이 몸을 날렸지만, 손에 닿을 것 같지 않았다.
***
케네스 반즈는 실제로 장난이 심했답니다. 그래도 젊은 선수들과도 잘 어울려서 나중에 데니스 로가 맨체스터 시티로 갔을 때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