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80. 불쾌한 상징
The Football Association.
약칭으로 FA라 불리는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1863년 창설된 이후,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의 모든 축구팀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입헌군주제 국가인 만큼, 이 FA의 수장도 왕족들이 맡았다.
하지만 실제 운영자는 협회 의장과 총무.
1957년 12월 현재 협회 의장은 아서 드루리, 그리고 협회 총무는 스탠리 루스였다.
이 두 사람 중에 사실상 실무 책임자는 스탠리 루스.
젊은 시절 아마추어 골키퍼로 활동했던 그는 축구 심판과 행정가를 거쳐 현재의 직위에 올랐다.
협회에서 사실상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루스는 연말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앞에 두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니까.
“각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스탠리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가에 불을 붙이는 노인, 바로 전시 총리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었다.
“호기심이 들어서 말이야. 대영제국 축구를 ‘잘’ 선도하고 있는 이들이 누군지 궁금하더군.”
“아, 예…….”
어째 ‘잘(Well)’이란 말의 뉘앙스가 미묘했다.
근래에 월드컵이나 국가 대항전에서의 성적이 축구 종가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수준.
그렇다 보니 루스 입장에선 제 발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이 늙은이가 요즘 축구에 재미를 들였다네. 덕분에 무료한 나날이 제법 활기차졌지.”
“그러시군요. 각하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그래, 그렇게 축구에 빠져 여러 가지를 보고 듣다 보니 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있더군.”
“예? 대체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
“경기 일정 말이야. 좀 빡빡하고 융통성이 없어 보이더라고.”
루스의 표정이 금세 딱딱하게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가 어제 언론에서 들먹여졌다.
스포츠란 일면에 ‘스크루지만큼 지독한 FA’라고 적혀 있었던 것.
루스는 보자마자 신문을 구겨 버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2연전을 치른 게 한두 해도 아닌데 왜 지금 와서 논란이 된단 말인가.
‘제기랄, 이게 다 그 덩치 큰 노란 원숭이 놈 때문이다.’
그 불쾌한 놈의 인터뷰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어디서 축구를 했는지 근본도 알 수 없는 놈이 실력 하나만 믿고 깝죽대는 꼴이라니!
“이보게, 총무, 내 말을 듣고 있나?”
“아! 예, 각하. 그 일정 말인데, 리그 경기뿐만 아니라 FA컵, 채리티실드컵(* 현재의 FA 커뮤니티실드컵) 경기도 있어서…….”
처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루스가 주절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자신들도 최선을 다해 짠 일정인데, 몰라주니 섭섭하다는 것.
“자네들이 고생하고 있는 건 알겠네. 하지만 조금 융통성을 발휘해 줬으면 싶어. 특히 세계 무대에 영국을 대표해서 나가는 팀들한테는 말이야.”
“유러피언 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거기 참가하는 팀 일정이 몹시 빡빡하다고 하더군. 이동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제대로 훈련하거나 휴식을 취할 틈도 없다던데.”
원정 경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홈경기에 있어서도 리그나 FA컵, 채리티실드컵 등 소화할 경기들이 많아 선수들의 컨디션이나 체력 안배에 곤란함이 있는 형편이었다.
처칠은 준영에게 이 같은 사정을 듣고 혀를 찼다.
우승컵을 따내기 위해 기운을 북돋아 줄 온갖 방법을 강구해도 시원찮을 판에 야박하게 굴다니!
“난 축구는 잘 몰라. 하지만 스포츠는 총성 없는 전쟁임을 잘 알지. 그러니 파시스트 놈들이 선전용으로 써먹지 않았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올림픽을 자신들의 체제 선전에 이용했다.
그건 냉전이 자리 잡은 현재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게 옳다고 보네. 그러니 참가 팀의 일정에 융통성을 발휘해 주면 어떤가?”
처칠의 요구에 루스는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제아무리 영국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자, 세계적인 명사라 해도 이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전부터 축구에 관심이 많았으면 몰라, 실권도 없는 주제에 왜 이제 와서 참견이란 말인가.
“각하, 그 총성 없는 전쟁터에 나간 놈들 말입니다만, 원칙적으로 따지면 탈영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탈영병?”
“예. 상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싸우러 갔지요. 각하께서 사령관이라면 이렇게 군율을 어지럽히는 놈들을 그냥 두실 겁니까?”
이렇게 반박하면 할 말이 없겠지.
루스는 그리 확신했지만, 상대는 처칠이었다.
“무능한 사령관 때문에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 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 그건 이 늙은이도 예외는 아니야.”
“그건…….”
“늙은이들 고집 때문에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 전쟁을 두 번이나 봤네. 자네들은 무엇을 고집하기에 젊은이들을 고생시키려고 하는가?”
굳어진 루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저희가 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그놈들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는 겁니다!”
유러피언 컵에 참가하지 않으면 일정 문제로 곤란할 이유도 없다.
자기들이 고집해 놓고 왜 협회를 원망한단 말인가!
“저들은 유러피언 컵 우승을 목표로 한다고 나갔지요. 영국 축구를 영광에 올려놓겠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댑니다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요?”
루스가 볼 땐 그저 막대한 상금과 출전료가 탐이 나서 나간 것 같았다.
그렇게 돈에 홀려 질서를 어지럽히는 놈들을 왜 신경 써 줘야 하는가.
놈들에 대한 특혜는 허용할 수 없었다.
협회의 지시를 존중하는 팀들과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일이니까.
“그럴싸한 이유를 대는 건 자네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솔직하게 말해 보게. 협회가 해내지 못한 국제 대회 우승을 일개 프로팀이 먼저 해내면 체면이 서지 않아 그런 게 아닌가?”
루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실제로 잉글랜드 대표팀은 두 번의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탈락, 8강이라는 변변찮은 성적만 기록했다.
축구 종가의 위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기록이었던 것.
그에 반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56-1957 유러피언 컵에 최초 출전하여 4강이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렸다.
더구나 4강에서 만난 팀은 지난 대회 우승팀이자, 그 대회 우승팀인 유럽 최강의 레알 마드리드.
대표팀보다 훨씬 선전하고 체면도 차린 셈이다.
“내가 볼 땐 융통성 있게 지원해 주고 생색을 내는 게 낫다고 보네만?”
처칠의 충고에 잠시 말이 없던 루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각하의 충고는 귀담아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즌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안 하겠다는 게로군.”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이미 시즌이 절반 가까이 지났습니다. 부디 저희 입장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잔소리 그만하고 가라.
루스의 완고한 태도에 처칠은 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알았네. 그럼 최소한 다음 시즌은 배려해 주는 걸로 알겠네.”
“예, 다음 시즌은 노력해 보겠습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얼마나 노력할까.
처칠은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더 남겼다.
“자네들의 집념이 고집이 아니기를 비네.”
“감사합니다, 각하. 살펴 가십시오.”
정중하게 처칠을 배웅한 루스는 그가 떠난 후 분통을 터트렸다.
“흥! 집념이 고집이 아니길 빈다고? 노망난 늙은이 주제에!”
루스는 처칠이 괜히 참견하러 온 게 아닐 거라 믿었다.
일부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보러 가고, 현재 그 팀에서 유명한 노란 원숭이와 악수하며 사진까지 찍었으니까.
“하여튼 맘에 안 드는군! 멋대로 구는 유나이티드도, 노란 원숭이 놈도!”
일부러 영구 퇴출시키려고 볼턴전 심판 배정에도 은근슬쩍 손을 썼건만.
그 교활한 원숭이 놈은 도발에 걸려들지 않고 함정을 빠져나가 버렸다.
덕분에 심판 판정과 배정 문제로 후폭풍이 일어 언론에서 한동안 시끄러운 잡음이 일었다.
“두고 보라지. 나중에 제대로 걸리면 아주 박살을 내 놓을 테니까!”
맨체스터가 있는 먼 북쪽 하늘을 바라보는 루스의 눈빛이 흉하게 빛났다.
***
“누가 내 욕을 하나?”
간질간질한 귀를 매만지던 준영.
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수 바비 존스턴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널 욕할 녀석들이 어디 한둘이냐.”
존재 자체가 반칙인 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외하고 퍼스트 디비전에서 뛰고 있는 축구 선수들은 다들 그렇게 보고 있었다.
특히 준영을 상대로 골을 먹거나 경기에서 패배한 팀의 선수들은 더욱 원성이 컸다.
“우리 팀에도 널 욕하는 놈들 많아. 올 것처럼 그래 놓고 유나이티드로 가 버렸으니까.”
그 말이 맞는다는 듯,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딱히 간다고 한 적 없는데? 그쪽에서 멋대로 설레발친 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게 나쁘다고! 애초에 딱 잘라 거절하든가!”
그렇게 호통친 존스턴은 준영에게 엄포를 놓았다.
“하여간 각오하라고. 네 녀석과 유나이티드에게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다들 칼을 싹싹 갈고 나왔으니까.”
“그래?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가?”
준영은 이마에 두른 붕대를 긁적이며 물음을 건넸다.
“그러니까 이름이 어떻게 되더라? 바비…….”
“바비 존스턴이다! 그새 까먹었냐! 나한테 골도 먹었으면서!”
바비 존스턴은 펄펄 뛰었다.
자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건만, 놈은 잊었다니!
“이 자식,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화나게 만들려고 말이야!”
“아니, 그럴 리가. 그냥 댁의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서 그랬어.”
바비까지는 기억했다.
지금 동료로 있는 바비 찰튼이나 바비 무어, 바비 롭슨에 비하면 후대에 유명하지도 않은 선수니까.
“워워∼ 진정해, 존스턴. 중요한 시합이 바로 코앞인데 흥분하면 쓰나.”
포마드 머리에 완장을 찬 선수가 식식거리는 바비 존스턴을 진정시켰다.
그는 준영에게 악수를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난 시티의 주장인 케네스 반스야. 아쉽게도 지난번 너랑은 겨뤄 보지 못했지.”
“예, 반갑습… 우와앗!”
케네스와 악수를 하던 준영은 화들짝 놀랐다.
손바닥 느낌이 이상해서 봤더니 바짝 마른 바퀴벌레가 있는 게 아닌가.
기겁한 그의 모습에 케네스와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이야, 유나이티드의 거인께서 죽은 벌레 한 마리에 놀랄 줄은 몰랐는걸.”
“특종감이야, 완전.”
순식간에 비웃음거리가 된 준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옆에 있던 던컨이 나지막하게 주의를 주었다.
“어이, 리틀 존. 저 아저씨 조심해. 나잇값은 못해도 실력은 수준급이니까.”
“그래?”
“윙 하프로는 영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걸.”
던컨이 그 정도로 평가할 정도면 보통내기가 아닌 모양이다.
확실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경기 시작 전에 쪽팔림을 당했는데, 필드에서도 당할 순 없다.
“자, 시간 됐습니다. 선수 여러분, 입장하십쇼.”
경기장 관리요원의 말에 양 팀 선수들은 필드로 나왔다.
메인 로드의 잔디에 발을 내디딘 준영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엄청나게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최소 6, 아니 7만은 족히 되겠군.’
이 정도로 많은 관중들 앞에서 뛰는 건 이 시대에 와서 처음.
들뜬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던 준영은 인상을 팍 구기고 말았다.
‘뭐야, C발. 저게 왜 있어?’
핏빛의 원에 방사형의 붉은 줄무늬가 그려진 깃발.
분명히 21세기에 전범기로 불리는 욱일기였다.
***
스탠리 루스는 현대 축구 경기에서 심판의 위치 지정 및 책임 분담 시스템(DSC)을 도입하여 판정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게 기여한 공로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한 좋지 못한 행적도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