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79화 (79/400)

Round 79. 특별한 부탁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나타내는 이 말을 준영은 오늘 아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또……!”

잽싸게 유나이티드의 왼쪽 측면으로 파고든 루턴 타운의 공격수 지미 아담이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다소 낮지만 빠르게 날아온 그 크로스를 준영은 헤딩으로 끊어 냈다.

“마크, 측면 좀 확실히 막아.”

“미안해, 존. 아차 하는 순간에 그만…….”

거칠게 숨을 토하는 마크 존스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사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 선수들은 물론이고 준영도 그랬다.

‘빌어먹을, 이틀 연속 경기는 대체 어떤 놈 머리에서 나온 거야!’

1957년 12월 26일 박싱데이.

맨유는 전날 올드 트래퍼드에서 만났던 루턴 타운을 하루 만에 다시 만났다.

바로 그들의 홈인 케닐워스 로드에서.

“힘내라. 할 수 있어!”

“저 악마 같은 애송이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라고!”

2만여 명의 루턴 타운 팬들은 쉴 새 없이 함성을 쏟아 냈다.

사실 이런 열띤 분위기는 전반전에 없었다.

경기 시작 전만 해도 홈 관중들이 좀 시끄럽긴 했다.

그러나 전반 28분 맨유의 선제골이 터지자, 실망 어린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 침묵은 전반 종료 2분 전에 나온 토미 테일러의 골에 더욱 무거워졌다.

어제하고 똑같이 전반에 2-0 리드.

다들 어제랑 똑같이 경기를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후반전이 시작되고 5분 만에 루턴 타운의 추격 골이 나왔다.

측면을 허물어트리는 돌파 후 낮고 빠르게 날아온 크로스가 때맞춰 쇄도하던 루턴의 미드필더 존 그리브스의 발에 제대로 걸렸다.

그 추격 골이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거 해 볼 만하지 않은가.

적어도 홈에서는 질 수 없다.

이렇게 자신감을 얻고 의욕을 불태운 루턴 타운 선수들은 이후 놀라운 활동력과 집중력을 보였다.

집요하게 맨유의 측면을 파고들며 공격 찬스를 만들었으며, 수비에선 몸을 아끼지 않는 적극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그 바람에 준영이나 던컨이 공격수들에게 찔러 준 패스가 번번이 잘렸다.

공격수들도 찬스에서 공을 놓쳐 버리거나 성급한 결정으로 골대에서 빗나가는 슛을 날렸다.

“하, 어제랑 완전히 다르잖아.”

마치 두 팀 모두 전반전과 전혀 다른 팀이 된 듯한 상황.

피곤하고, 후반전 와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건 양쪽 모두 마찬가지다.

문제는 유나이티드가 좋지 않은 흐름을 탔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토트넘 녀석들의 기분이 어땠는지 알 것 같아.”

“두 골 차 리드가 뒤집히고 역전당하는 걸 우리도 겪을지도?”

“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말이 씨가 된다는 거 몰라?”

제아무리 뛰어난 선원들이라도 난데없는 폭풍 앞에서는 당황하기 마련.

현재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딱 이랬다.

이 폭풍 같은 상황을 모면하지 못하면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려한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연방 목소리를 높였다.

“침착하게 해! 리드하고 있는 건 우리야!”

“급하게 굴지 말고 최대한 공을 오래 유지하면서 플레이하라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 상황.

다행히 이렇게 폭풍에 흔들리고 있는 유나이티드 호의 키를 꽉 잡아 주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바비, 내려와서 마크 좀 거들어 줘!”

“전방에서 가만히 보고 있지 말고 압박해! 그래, 잘한다! 그렇게 해야 루턴 타운 녀석들이 설치지 못한다고!”

준영이 연방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가며 팀원들을 독려했다.

물론 말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상대 크로스는 헤딩으로 끊어 내고, 공을 잡은 공격수에겐 악착같이 마크해서 위기에서 팀을 구해 냈다.

“잘한다, 리틀 존!”

“네가 유나이티드의 마지막 보루야!”

멀리서 원정 응원을 온 유나이티드 팬들이 박수와 함성으로 준영의 선전을 격려했다.

하지만 준영의 눈과 귀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응원은 따로 있었다.

“힘내라, 이준영!”

“지지 마라, 대한의 건아야!”

관중석 한쪽에서 나부끼는 태극기.

런던에 있는 유학생과 교포들이 응원을 나온 모양이다.

몇몇은 하얀 한복까지 차려입고, 손에는 놋쇠 냄비를 들고 꽹과리처럼 두들겨 댔다.

그 모습에 준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네네, 동포 여러분. 버프 감사합니다.”

이마의 땀을 훔친 그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채찍질하며 수비를 계속했다.

“뭣들 하고 있어? 멀뚱히 있지 말고 움직여!”

“존한테만 맡겨 두지 말라고!”

준영의 분전에 다른 선수들도 투지를 불태웠다.

가장 먼저 호응한 건 골키퍼 해리 그렉.

그는 루턴 타운의 중거리 슛을 모조리 막아 냄은 물론, 과감하게 뛰어나가 공중볼을 페널티 박스 밖으로 쳐 냈다.

이에 질세라 빌 포크스와 로저 바인도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상대의 패스를 끊어 내고, 날아오는 슈팅을 몸을 던져 막아 냈다.

“잘한다! 이제 정신을 차렸군!”

“그래야 유나이티드지!”

이렇게 수비가 안정되자, 공격수들도 걱정 없이 공세에 나설 수 있었다.

“시간 얼마 남았지?”

“3분 정도 남았어. 정신줄 놓지 말고 끝까지 버텨!”

이길 수 있을 때 이겨야 승점을 얻고, 우승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안 그래도 2위 울버햄프턴이 바싹 추격해 오는 상황이었기에 이 경기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물론, 놓칠 수 없다고 여기는 건 루턴 타운 역시 마찬가지.

승점 1점이라도 얻기 위해 그들 역시 사력을 다했다.

“크로스가 온다!”

“놓치지 마!”

오른쪽 측면 꽤 먼 거리에서 루턴 타운이 길게 크로스를 올렸다.

위치를 포착한 준영이 헤딩으로 걷어 내려는 순간, 루턴 타운 공격수 A.브라운이 뒤늦게 쇄도해 들어왔다.

퍽-!

“윽……!”

충돌 순간 눈앞에서 번쩍 불꽃이 튀었다.

삽시간에 시야 한쪽이 붉게 물들었다.

‘공은 어디에……?’

준영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손으로 공을 잡아챈 해리 그렉이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딱 맞춰 시계가 멎었군.’

스코어보드를 힐끔 쳐다보았던 준영은 찢어진 눈두덩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며 그는 다시 앞으로 뛰어나갔다.

***

경기는 2-1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승.

경기 종료 후, 골을 넣은 알버트 스캔론이나 토미 테일러보다 준영에게 더 많은 기자들이 몰렸다.

준영이 후반에 보인 분전이 승리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리 선수, 오늘 경기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간단하게 말하자면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이틀 연속 뛰어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레스터 시티전이 끝난 뒤에도 일정 문제를 언급했는데, 협회 일정이 맘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라면 거짓말이죠. 크리스마스에 부려 먹는 건 스크루지밖에 없잖아요.”

“하하하하핫!”

준영의 너스레에 기자들이 단체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몇몇은 머릿속에 자극적인 제목까지 만들어 두었다.

“다음 상대는 맨체스터 시티인데, 대비는 하고 계신가요?”

“죄송하지만, 그건 안 알랴줌니다. 전투 전에 정보를 누설하면 안 되잖아요.”

“아차, 그렇군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한바탕 인터뷰를 마친 후, 준영은 팬 미팅을 가졌다.

몸은 피곤하다며 빨리 쉬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비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같은 한국인들에겐 더더욱.

“잘 싸웠습니다, 이준영 선수! 정말 눈물이 다 났습니다. 영국 최고의 팀에서 한국 사람이 최고의 활약을 보여 주다니…….”

“정말이지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기분이에요.”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 다들 정말 감격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자랑할 것도 없이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했었다.

그런데 혜성같이 나타난 한국인 축구 선수는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는 활약을 보여 주었다.

“이준영 선수, 조국의 2천만 겨레도 이 선수의 활약을 듣고 기뻐하고 있소. 오늘 활약도 들으면 다들 매우 기뻐할 거요.”

방금 말을 건넨 40대 중반의 신사는 자신을 주영 대한민국 대사 김용우라고 밝혔다.

오늘 한국인 응원단은 그가 조직해서 데려왔다고 한다.

런던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한국인은 죄다 모아서 왔다고.

“듣자 하니 한국에선 제 활약에 대해서 믿는 둥 마는 둥 한다던데요?”

“하하하, 이해해 주시오. 워낙에 믿기 힘든 일이니 말이지. 그래도 지금은 다들 믿고 있으니까 서운해하지 마시오.”

그렇게 준영을 다독인 김용우 대사는 교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모두들, 이준영 선수 만세를 외칩시다! 이준영 만세!”

“만세! 이준영 만세!”

마치 3.1 운동이나 8.15 해방을 연상시키는 만세 합창.

아까 인터뷰로 성이 차지 않은 기자들은 이 모습을 보며 연방 플래시를 터트렸다.

***

한국인 응원단과의 만남 후, 준영은 또 한 명의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

입에 시가를 문 동글동글한 인상의 노인,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여, 오늘도 한몫 단단히 하더구만, 리틀 존.”

“잘 지내셨습니까, 각하.”

“잘 지내다마다. 내 얼굴 보면 모르겠나?”

처칠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지난번 맨체스터에서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준영에게 미래와 관련한 전망에 대해서 듣고 우울한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덕분이었다.

“자네 덕에 축구에 맛을 들여 요즘 축구 경기를 많이 보러 다니고 있지. 프로팀 경기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시합도. 그렇게 쏘다닌 덕분에 다리에 힘이 꽤 붙더군.”

“건강하시니 기쁘네요. 근데 특별히 서포트하는 팀은요?”

“없어. 딱히 성에 차지 않더라고.”

아스날, 첼시, 토트넘 등등.

처칠이 있는 런던에는 프로와 아마추어 통틀어 수두룩한 팀들이 있었지만, 그의 맘에 드는 팀은 없었다.

아니, 팀보다 선수 쪽이 더 문제였다.

“미래에 존 Y. 리를 꺾을 만한 선수가 있나 싶어 살펴봐도 보이지 않더라고.”

“하하하! 뭐, 금방은 안 나올 테지만 나중엔 분명 나올 겁니다.”

준영은 지난번에 모즐리 마을 꼬맹이들이 축구를 하면서 자신의 개인기를 흉내 내는 광경을 보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모즐리뿐만 아니라 맨체스터나 허더스필드 쪽 소년들도 자신의 개인기를 연습하는 게 유행이라고.

거기다 단지 개인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존 Y. 리만큼 키가 크겠다고, 우유를 열심히 마시거나 운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그런 떡잎들 중에 나중에 거목으로 성장하는 녀석들도 나올 겁니다.”

“반가운 이야기로군. 언제 거목이 자랄지 몰라도,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구경해 봤으면 좋겠구먼.”

기대감을 부풀리던 처칠은 준영의 표정이 달라진 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가? 다른 할 말이라도 있나?”

“지금 있는 거목이라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준영은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각하께서 사령관이라면 전투에 싸우러 가는 병사들에게 최선의 지원을 해 주실 거지요?”

“물론이지. 그래야 이길 게 아닌가.”

“그래서 그러는데, 저희도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도와 달라고? 유나이티드를? 어떻게 말인가?”

거절할 것 같진 않았다.

그리 확신한 준영은 자신은 물론, 팀에서 가장 고민하고 있던 유러피언 컵 일정 문제를 털어놓았다.

‘이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을 이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완고하기 짝이 없는 영국 축구협회.

하지만 그들도 현재 영국 최고의 명사로 유명한 처칠의 말을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

항상 화려한 스타플레이어들은 젊은 꿈나무들의 우상이 되곤 했죠.

21세기엔 메시가 있었는데, 그 뒤를 이어 갈 선수는 누가 될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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