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78. 인싸 준영
런던 북쪽, 베드퍼드셔주에 자리한 작은 도시 루턴에 연고를 둔 루턴 타운 FC는 오랫동안 하부 리그를 떠돌던 약체였다.
그러다 댈리 던컨이란 스코틀랜드 감독이 부임하고, 유능한 선수들이 영입되면서 1955-1956시즌에 1부 리그로 올라왔다.
현재 리그 순위는 6위.
무게감이 있는 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얕볼 상대는 아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런 팀과 크리스마스와 박싱데이 이틀에 걸쳐 상대하게 되었다.
“고든 터너가 빠졌잖아.”
“누구야? 실력이 있는 선수야?”
준영의 물음에 바비 찰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꽤 실력 있는 공격수죠. 루턴을 1부에 승격시킨 주역이기도 하고요.”
“그래? 부상이라도 당한 모양이군.”
아무튼 상대의 주전 공격수가 빠졌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수비의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
‘물론 대신해서 나온 선수가 만만찮으면 쉽진 않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그리 위협적인 선수는 보이지 않았다.
경기 초반에 조심스럽게 상대를 살피던 버스비의 아이들은 이후, 마음껏 적진을 누비고 다녔다.
하프백으로 출전한 준영도 과감하게 전진해 패스와 슈팅을 날렸다.
「유나이티드 5번 존 Y. 리, 중앙선에서 패스를 받아 돌파, 측면에 있는 알버트 스캔론에게 연결해 줍니다. 스캔론이 다시 존에게… 슈웃-!」
리턴 패스를 받은 준영이 그대로 강력한 중거리 슛을 날렸다.
한 손에 닭다리나 컵라면을 들고 있던 관중들도 목을 길게 뺐다가 이내 아쉬움의 탄성을 내뱉었다.
“하, 아깝네. 살짝 빗나갔어.”
“그래도 좋은 슈팅이었어, 리틀 존!”
준영이 슈팅하는 순간, 슬쩍 수비를 끌어냈던 데니스 바이올렛이 엄지 척을 보내왔다.
그의 말대로 준영의 슈팅은 기선 제압용으로 효과가 있었다.
강력하고 위협적인 슈팅에 놀랐던 건지, 루턴 타운 선수들이 수비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것.
당연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쪽의 볼 점유율이 올라갔고, 공격 시도도 잦아졌다.
“이쯤이면 슬슬 골이 나올 텐데…….”
“앗! 저것 봐! 기가 막히게 패스가 들어갔어!”
데니스 바이올렛이 수비수들을 끌고 나온 순간, 공을 잡고 있던 토미 테일러가 잽싸게 페널티 박스로 파고들던 바비 찰튼에게 침투 패스를 건네주었다.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
하지만 뒤늦게 달려온 루턴 타운 수비수 켄 호크스가 뒤에서 태클을 날렸다.
“파울이다!”
삐익-!
준영이 본 대로 켄 호크스의 태클은 공이 아닌 바비 찰튼의 발목을 걷어찼다.
페널티킥!
맨유 팬들은 환호성을 울렸고, 루턴 선수들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부지런한 공격 끝에 유나이티드가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키커로… 네, 던컨 에드워즈가 나오는군요. 믿을 만한 키커이지요.」
라디오 중계 캐스터의 말대로, 던컨은 골키퍼를 완전히 속이며 골을 성공시켰다.
“잘했어, 던컨!”
“하하, 다 바비 덕분이지. 아 참, 근데 발목은 괜찮아?”
“멀쩡해. 문제없어!”
전세는 선제골을 터트린 유나이티드 쪽으로 기울었다.
루턴 타운은 실점 후에도 이렇다 할 반격을 펼치지 못했다.
‘이 여세를 몰아 추가 골을 만들어야 돼.’
골을 넣을 수 있을 때 넣지 못하면 경기가 어렵게 꼬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비단 준영뿐만이 아니었다.
맨유 선수들 모두가 활발히 뛰어다니며 상대에게서 공을 빼앗고, 빈 공간을 살피며 패스를 찔러 넣었다.
두드리면 열리는 법.
부지런히 뛰며 뿌린 땀은 헛되지 않았다.
전반 31분, 던컨에게 패스가 들어오자 준영은 방향만 살짝 돌리는 논스톱 패스를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찔러 주었다.
바로 슛을 할 듯하던 데니스는 수비를 끌고 가며 공을 흘렸다.
뒤쪽에서 이것을 받은 사람은 미소의 암살자 토미 테일러.
당황하는 루턴 타운 수비수들에게 별명대로 웃음을 지어 준 그는 시원하게 골대 안으로 공을 차 넣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관중들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울렸다.
“추가 골이다!”
“방금 패스 플레이는 정말 기가 막혔어!”
“그래, 토트넘전에서 터졌던 동점 골이랑 비슷했어!”
약속이나 한 것 같은 움직임과 그에 맞는 절묘한 패스.
마치 잘 만든 시계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멋진 플레이에 취재 기자들이나 축구 관계자들도 입을 떡하니 벌렸다.
“우리나라 축구가 아닌 것 같은데?”
“마치 프랑스나 스페인 축구 비슷한 느낌이…….”
“아냐. 그치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경기 분위기가 맨유 쪽에 기울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루턴 타운 선수들도 맥없이 구경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지 못했다.
단어 그대로 완전히 농락당했다!
속도나 집중력, 그리고 치밀함의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놀랍군. 어떻게 저런 축구를 할 수 있는 건지.”
“단지 좋은 선수들이 모였다는 것만으론 답이 되지 않아. 분명히 특별한 뭔가가 있어.”
“유러피언 컵에서의 경험 덕분일까요?”
이들의 의문은 버스비 감독이나 지미 머피 코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반응만 봐도 그들이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다들 우리 팀의 변화에 대해 놀랍고 궁금한 모양이에요.”
“나 역시 그렇다네, 짐.”
다른 게 있다면 두 사람은 대강의 답을 알고 있다는 점.
그들의 시선은 필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준영에게 향해 있었다.
“존이 오고 나서 선수들이 달라졌단 말이지.”
“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입니다.”
유나이티드의 훈련에 있어 준영이 크게 관여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훈련을 할 때 딱히 지적할 만한 점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감독이나 코치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간단하고 수월한 움직임을 보일 때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세련된 플레이에 코치들뿐만 아니라 선수들도 주목했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던컨 에드워즈였다.
천재라는 평가대로, 그는 준영이 하는 플레이를 고스란히 흡수해 갔다.
“존이 지난번에 그러더라고요. 스펀지 같은 녀석이라고요.”
“스펀지라. 딱 맞는 표현이구만.”
던컨만큼은 아니지만, 마크 존스나 다른 선수들도 익힐 수 있는 건 훔쳐 배웠다.
그래야 본인들도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주전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아무튼 훔쳐 익히는 과정에서 준영이 하는 방식의 플레이가 슬그머니 팀에 자리를 잡았다.
드리블이나 패스, 공간 활용이나 수비하는 방식 등등.
방금 전 톱니바퀴 같은 패스 플레이도 그렇기에 가능했다.
“물론 훔쳐 배우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네, 사이가 좋아야죠.”
좋은 선수들이 모인 팀이라도 형편없는 플레이를 보여 줄 때가 있다.
서로 잘났다고 으스대거나, 시기하며 다투는 통에 조직력이 다져지지 못한 탓이다.
그에 비하면 버스비의 아이들은 매우 단합이 잘되어 있었다.
서로 챙겨 주고, 형제처럼 어울리며 지냈다.
이방인인 준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인종도 다르고 문화나 언행이 이질적이라 우려는 있었지만, 금세 잘 어울려 지냈다.
“마치 초콜릿에 섞인 아몬드나 땅콩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죠. 달라도 잘 어울리는 게 신기했죠.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요.”
머피 코치의 말에 버스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준영을 영입해 오길 잘했다 싶을 정도.
“그런데 리틀 존 그 녀석, 좀 이상한 게 있어요.”
“뭐가 말인가?”
“부쩍 유러피언 컵 원정 경기를 신경 쓰더라고요.”
유고슬라비아를 왕복하는 직항 비행기는 없는지, 꼭 뮌헨을 거쳐야 하는지, 일정 변경은 안 되는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고민하는 듯했다고.
“컨디션 문제 때문이겠지. 프라하에서도 꽤 고생을 했잖나.”
“물론 그렇지만… 지나치게 진지해 보였단 말이죠.”
그 때문에 머피 코치도 유러피언 컵 원정 준비를 다시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런다고 딱히 더 개선되지는 않았다.
가장 아쉬운 일정 문제만 해도 협회에서 전혀 양보를 해 주지 않았다.
“저번에 경기 시간이라도 좀 늦춰 주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1분이라도 지연되면 무조건 몰수 패래요.”
“나한테도 똑같은 소릴 하더군.”
“거참, 나중에 우리가 트로피라도 따내면 온갖 생색을 다 낼 거면서…….”
투덜대는 머피의 말에 버스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러피언 컵 출전을 고집했던 이유.
그것은 국제 무대에서 다양한 팀들과 겨뤄 보면서 경험을 쌓고 성장을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뿐만 아니라 완고한 축구협회 역시 변화하는 계기가 되리라 보았다.
‘하지만 이런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오히려 우승하면 축구 종가로서 당연한 결과라고 여기거나, 자만에 취하는 건 아닐지?
‘그렇다고 해서 이미 시작한 걸 그만둘 순 없지.’
결과가 어떻든 끝까지 가 보자.
맷 버스비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
전반전을 2-0으로 앞섰던 맨유는 후반전에서도 우세를 보였다.
그 결과 후반 25분에 바비 찰튼의 세 번째 골이 터지며, 3-0의 완승으로 경기를 끝냈다.
신나는 승리였지만, 평소와 달리 뒤풀이를 즐길 틈은 없었다.
바로 루턴시로 이동하기로 스케줄이 잡혀 있기 때문.
다음 날 바로 이동해서 경기하는 것보다, 전날 이동해서 현지에서 1박 하고 경기를 뛰는 게 낫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오늘 경기에서 뛰진 않았지만 내일 출전할 선수들은 이미 먼저 루턴에 도착해 있었다.
“다들 소지품 제대로 챙겼는지 확인해. 현지에 가서 뭐 빠졌느니 하며 소란 떨지 말고.”
주장인 로저 바인의 말에 준영은 캐리어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여분의 옷과 세면도구, 그리고 책 몇 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디 멀리 외국에 다녀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가볍게 다녀올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가는 데만 기차로 4시간 넘게 걸린다니…….”
“걱정되는 거야? 그래도 기차 공포증은 처음에 비하면 나아졌잖아?”
던컨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난번 노팅엄 원정을 갈 때 던컨이 기타를 챙겨 준 덕분에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무튼 뒤풀이는 기차에서 할 거야. 존 너는 마시지 않아도 좋으니 노래만 열심히 불러 줘.”
“야, 내가 무슨 축음기인 줄 아냐? 4시간 내내 노래만 부르게.”
“다 네 노래가 좋아서 그러는 거지. 안 그래, 모두들?”
던컨의 말에 다들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준영이 부르는 노래는 들어 보지 못했거나, 가사도 알기 힘든 외국 노래였지만, 그래도 듣기에는 참 좋았으니까.
그래서 맨유 선수들이 자주 드나드는 클럽에서는 종종 준영에게 한 곡 부탁할 때도 있었다.
“미리 선곡해도 괜찮겠지? 난 Uptown Girl 듣고 싶어.”
“난 Sugar인지 하는 신나고 달콤한 노래가 좋아.”
“지난번에 들었던 위잉위잉하는 노래가 좋던데……. 그 한국말로 되었다는 가사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쏟아지는 선곡 주문에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온 지 넉 달째. 이만하면 인싸라 할 만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난감할 때도 있었다.
‘뭐, 그래도 아싸보다 인싸가 훨씬 나으니까.’
그냥 좋게 생각하자.
준영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
독자 여러분, 모두 인싸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