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77화 (77/400)

Round 77. 야심 찬 미래

연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몰입했던 만큼이나, 엔딩이 후련한 감이 있었기 때문.

“잘 아는 이야기인데도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들 수 있구먼.”

알버트의 감탄에 준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달리 미래의 대배우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도 아직은 연륜이 부족해 보이는군.”

알버트는 지난번에 준영이 보여 줬던 영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의 내용을 떠올렸다.

거기서 노년의 숀 코너리는 유쾌한 모험 영화에 맛있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맡았다.

개그 연기를 하면서도 크게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근데 그 사람이 앞으로 제임스 본드가 된다니…….”

앤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프레드로 저택에는 준영의 동료들이 종종 놀러 오는데, 숀 코너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본 숀은 세련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는 고릴라 같은 인상이었다.

책에서 본 007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변하겠지. 백색의 사루만도 지금은 흉악한 프랑켄슈타인에 불과하잖아.”

“하긴…….”

준영의 말을 거들기라도 하듯, 알버트가 이어 말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단다, 앤지야. 그게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든, 외부의 간섭과 영향에 의해서든. 당장 현재만 보고 미래를 단정해선 안 된다.”

그러면서 알버트는 슬쩍 준영을 바라보았다.

미래에서 온 이 청년은 리즈의 운명을 바꿨고, 낯선 시대에서 자신이 갈 길을 개척해 가고 있었다.

주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스스로 변화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자네에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할 말이라 하시면 혹시…….”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준영의 말에 알버트는 손을 내저었다.

“이런 어수선한 자리에선 곤란하지. 집에 가서 따뜻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먹은 뒤에 하세.”

“네, 알겠습니다.”

서두를 이유도, 조바심을 느낄 필요도 없다.

리즈는 좀 불안해하는 눈치였지만, 준영은 자신 있는 미소로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

식탁 위로 근사하게 구워진 통닭이 올려졌다.

크리스마스이브 정찬에 딱 어울리는 로스트 치킨.

저택의 요리사가 준영이 알려 준 레시피대로 오븐에 구워 낸 것이었다.

속에 소시지와 양파, 마늘, 레몬 등을 채우고 겉에 파프리카 가루를 바른 로스트 치킨의 맛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가 막혔다.

“훌륭하군. 이것도 그 인터넷 방송인지 하는 걸로 Mr. 백이라는 요리사에게 배운 건가?”

“아뇨. 그와 동갑내기인 축구 선수 출신의 영국인 요리사가 가르쳐 준 방식입니다.”

욕 잘하는 걸로도 유명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아무튼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훌륭한 요리였고, 알버트는 물론 세 자매들도 크게 만족했다.

“자, 그럼 얘기를 좀 해야겠군.”

식사 후 홍차를 마시며, 알버트는 아까 극장에서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존, 자네가 내 손녀들과 남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네만…….”

잠시 목을 축였던 알버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리즈랑은 각별히 가까운 듯하더군. 이미 이 집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역시 이 얘기로군.’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준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일전에 특강(?) 중에 앤지에게 들켰기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딱히 그게 아니라도 남들이 볼 때 사귀고 있구나, 라고 여길 정도로 정답게 지내 왔으니까.

“리즈가 존 자네에게 호감을 보이는 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여기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어떤가?”

“저도 충분히 납득할 만큼 리즈에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알버트는 깜짝 놀랐다.

준영이 꽤 거침없는 성격이란 건 알았지만, 이런 문제에서 망설임 없이 말을 내뱉을 줄은 몰랐으니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저도 힘든 때가 있었습니다. 무서운 과거에 사로잡혀 주저앉을 뻔했었죠.”

“울버햄프턴을 다녀왔을 때 말인가?”

“예. 그때 정말 힘들었는데, 리즈가 다그쳐 준 덕분에 어두운 마음을 떨쳐 낼 수 있었죠. 리즈가 곁에 있어 준 게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졌었죠.”

“그래서 마음을 두게 되었다는 거로군.”

알 것 같다는 듯이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충분히 싹틀 만했다.

특히 준영은 외로운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서 도움을 준다 해도 자신이 살던 세계와 단절된 상황을 극복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에게 훨씬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을 터.

그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알버트도 양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존, 자네도 알다시피 나에겐 이 아이들뿐이야. 내 손녀들은 항상 무탈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낱 축구 선수에게 손녀를 보낼 생각은 전혀 없네.”

가만히, 하지만 조마조마하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리즈가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졸라도 소용없다. 절대 허락 못한다. 난 이 결정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할아버지의 완고한 태도에 리즈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준영이 자신을 구해 준 은인임을,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내 준 사람임을 잘 알고 계시면서.

그래서 그를 가족처럼 잘 대해 주신 게 아닌가?

그런데 왜?

리즈의 눈길이 준영에게 향했다.

잠시 우두커니 있던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그럼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네. 자네도 명심하고 처신하도록 하게.”

“예, 분부하신 대로.”

준영은 순순히 알버트의 말을 따랐다.

영화나 소설에서 볼 법한 애원도, 반항도 일절 없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인 걸까?

***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서재에 있는 준영에게 세 자매가 찾아갔다.

“카린은 오빠야에게 실망했어!”

중대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21세기의 흔한 프로실망러 같은 태도로 말하는 카린의 모습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오빠야! 지금 웃음이 나와?”

“그만해, 카린. 존도 생각이 있을 거야.”

동생을 만류한 앤지가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언제 단행할 거야?”

“단행하다니?”

“언니랑 같이 야반도주할 거 아니야?”

앤지는 준영의 옆자리에 놓인 책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마침 그 소설에 남녀가 눈이 맞아 도주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물어본 거지만…….

“야반도주는 무슨. 내가 골동품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 따라 할 것 같냐?”

“그럼 언니를 포기할 생각이야?”

“하, 왜 또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확실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당사자인 리즈에겐 더더욱.

“셋 다 거기 앉아 봐.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너무하다 싶은 거야?”

“네,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리즈의 한숨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당연하지. 내가 남작님 입장이라도 그럴 테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을까.

그 점을 생각하면 손녀들이 좋은 반려를 만나기를 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냥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면 되는 거야. 내가 딱히 리즈를 포기할 필요도 없는 거고.”

“네? 할아버지 뜻을 따르는데 포기하지 않겠다면… 아!”

무슨 말인지 이해한 리즈는 금방 얼굴을 폈다.

왜 바보같이 할아버지를 원망했을까 부끄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웅, 뭔데? 잘 해결될 수 있는 거야?”

“야반도주 안 해도 돼?”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카린과 앤지에게 준영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봐, 한낱 축구 선수에게 손녀를 보낼 생각이 없다고 하셨지?”

“응, 그러니까 존은 안 된다는 거잖아.”

“그래, 그럼 안 되지. 하지만 한낱 축구 선수가 아니라면? 축구 선수라도 사업도 크게 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면? 그래도 허락하지 않으실까?”

“아하!”

이제야 둘도 이해했다.

만약 알버트가 황인종에게 손녀를 보낼 생각이 없다고 했으면 정말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편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 독려해 주신 거라고 할 수 있지. 이방인인 내가 앞으로도 차별받지 않고 살 방법은 유명해지거나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는 것뿐이니까.”

“그렇구나. 하지만 준은 이미 부자 아니야? 사업도 잘되고 있다고 들었는걸?”

현재 하루하루 폭발적인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

앤지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지만,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저 라면 장사에서 그칠 생각이 없어.”

“그럼?”

“내 목표는 석유라고. 현대 문명의 근간인 검은 황금!”

20세기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석유 재벌이나 산유국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은 세계 에너지 시장을 쥐고 흔들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나락으로 떨어졌던 러시아가 부활한 것도 시베리아의 가스와 유전 덕분이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라는 수렁에 빠져 침체를 겪었던 미국도 셰일 오일, 즉 새로운 석유 자원 덕분에 다시 경기가 살아났다.

“그러니까 존도 돈 많이 벌어서 석유왕처럼 되겠다는 거구나.”

“그 석유 재벌이라는 절대 영역에 올라가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지.”

인종이 어떻든, 종교가 어떻든.

석유를 손에 쥔 자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거슬렀다간 그 순간 잠가라, 밸브! 말라라, 돈줄!

경제도, 정치도, 스포츠도 모두 그들의 손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두고 봐. 반드시 석유 재벌 구단주가 되고 말 테니까.”

일개 축구 선수가 그리된다니.

고개를 갸웃하던 엔지는 극장에서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당장 현재만 보고 미래를 단정해선 안 된다는.

앤지는 리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해, 언니. 미래 석유왕의 부인이 되시겠네.”

“얘는 참…….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리즈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준영의 야심을 완전히 허풍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70년 후 미래에서 온 사람.

그런 이가 현재 알려지지 않은 유전을 모르겠는가.

“미래의 석유왕이 되든 어쨌든, 준은 앞으로 많이 노력해야겠네요. 사업도 잘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공부?”

“출세에는 학력도 중요하거든요.”

학벌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돈과 권력뿐만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인맥을 갖추어야 천박하다고 무시당하지 않는 것이다.

“미래의 석유왕이 될 거라면 그에 걸맞은 학력도 갖춰야 한다고 봐요.”

“공부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 적은 없는데.”

이리저리 배운 건 있어도 그냥 취미 삼아, 흥미가 있어 익혔을 뿐이다.

준영의 곤란한 표정에 리즈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하면 되죠. 시작이 반이라고 하잖아요. 나도 입시 공부 중이니까 같이 열심히 해요. 모르는 거 있으면 가르쳐 줄게요.”

“허, 개인 교사라도 되어 준다는 거야?”

“싫어요?”

“아뇨. 잘 부탁합니다, 선생님.”

준영은 깍듯하게 선생님께 인사를 올렸다.

야심 찬 미래를 향해 나가는 길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어릴 때 틈만 나면 석유 고갈 그랬는데, 과연 인류가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는 날은 언제 올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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