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76화 (76/400)

Round 76. 죽음의 일정

가아아앙-

프로펠러가 돌면서 비행기가 활주로 위를 내달렸다.

좌석에 앉은 준영은 불안 반, 기대 반의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아, 리틀 존. 맨체스터까진 금방이라고.”

옆자리에서 동료들과 포커를 시작한 던컨 에드워즈는 아무런 문제없다는 듯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비행기 점검은 물론이고, 활주로에 쌓인 눈도 다 치우게 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항공사와 공항 측에 적잖은 지출을 했지만, 뭐 어떤가.

사람의 생명은 돈다발과 비교할 수 없다.

‘됐어.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

잠시 후,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이륙 못한 채 그대로 지면에 처박혀 공항 담장과 민가를 들이받는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가 떴으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안도하고 있을 때, 창밖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보였다.

‘새?’

까마귀.

한두 마리가 아닌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비행기 주변을 날고 있었다.

마치 마중이라도 나온 것처럼.

준영의 마음에 꺼져 가던 불안이 화산처럼 치솟아 올랐다.

“빌어먹을, 안 돼!”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까마귀들이 비행기 엔진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쾅-!

버드 스트라이크.

한쪽 엔진이 멎으면서 균형을 잃은 비행기가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어릴 때 경험했던 악몽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콰아아아앙!

찢을 듯한 굉음과 충격이 준영의 외침을 집어삼켰다.

***

“으아아아악!”

발버둥 치던 준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락과 동시에 어둠이 깔렸던 시야로 낯익은 방 안 풍경이 펼쳐졌다.

프레드로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

진땀을 흥건하게 쏟은 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었구나.”

아주 끔찍한 악몽이었다.

막아 냈다고 생각했던 사고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벌어졌고, 심지어 자신도 거기에 휘말렸다.

‘단순한 악몽 같지 않군.’

마치 뭔가 경고를 해 주는 것 같았다.

미리 대비해서 역사를 바꾸었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듯이.

“지금까지 내가 한 정도로는 일어날 일을 막아 내기는 힘들다는 건가요?”

침대에서 일어난 준영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초월적인 존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뭐, 미리 생각해 둔 방법으로 안 된다면 다른 수단을 생각해 봐야겠군.”

준영은 태블릿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충전이 완료된 태블릿 메모 어플에는 2월에 벌어질 뮌헨 비행기 참사를 막을 방법들이 끄적여 있었다.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건 준영만이 아니었다.

비록 사고가 벌어질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버스비 감독과 맨유의 수뇌들은 어떻게든 경기 일정을 조정받으려 애썼다.

현재 FA가 정한 일정은 너무나 촉박했기 때문이다.

“일정만 해결되어도 역사를 크게 바꿀 수 있을 텐데.”

아쉬워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가벼운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리즈?”

“네, 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아침 운동 하러 도통 나오지 않던데……?”

“그게, 몹쓸 꿈을 좀 꿨어.”

“악몽을요?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

“그래서 그런 건지 모르지.”

아무래도 조심하라는 경고가 아닐까?

준영은 신은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될 수 있는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한 달쯤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당장 코앞의 경기들이 문제이지만.’

달력에 표시된 12월 말 경기 일정을 본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21일 레스터 시티 홈경기.

25일 루턴 타운 홈경기.

26일 루턴 타운 원정 경기.

28일 맨체스터 시티 원정 경기.

중간에 FA컵 같은 경기가 끼여 있는 것도 아니다.

전부 리그 일정이었다!

‘젠장, 이게 말이 돼?’

정말 눈앞에 FA의 고위 인사가 있으면 작정하고 한 대 팼을지 모른다.

***

12월의 세 번째 토요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홈에서 맞은 상대는 레스터 시티 FC였다.

21세기에는 깜짝 우승도 하고, 중상위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팀이다.

하나 1957년 12월 현재 22위로 리그 꼴찌.

최근의 성적만큼이나 그들의 플레이는 썩 좋지 못했다.

결국 전반 13분, 데이비드 펙 대신에 출전한 알버트 스캔론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공격수가 엄청 아까운 팀이군.’

준영은 자신을 상대로 분투 중인 공격수 아서 롤리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서 롤리.

619경기에 434골을 넣은 이 선수는 영국 프로 축구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다.

그는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의 형인 잭 롤리는 1954년까지 맨유에서 17년간 활약하며 200골 이상 득점한 특급 공격수였으므로.

‘거기다 이 형씨도 원래 맨유에 있었다고 했었지?’

전쟁 중인 1941년에 선수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15살의 나이에 맨유 1군에 데뷔했었다고.

거기다 ‘The Gunner’라 불릴 정도로 왼발 슈팅도 일품.

당장 지금만 해도 미드필더가 밀어 준 패스를 받아 잽싸게 돌아서며 유나이티드 문전으로 강력한 슈팅을 날렸다.

“쳇, 옆 그물이잖아!”

‘당연하지. 내가 괜히 붙은 건 줄 알아?’

상당히 잽싸고 슈팅력이 좋은 선수였기에 준영은 섣불리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적절한 마크로 슈팅의 각을 줄이고, 위험한 패스가 갈 곳을 막아섰다.

이렇다 보니 아서 롤리 입장에선 굉장히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젠장, 방해하지 마!”

‘수비수가 방해하지, 그럼 도와주랴?’

전반은 결국 1 대 0으로 종료.

후반이 되자, 버스비 감독은 준영과 던컨을 보다 공격적으로 전진시켰다.

그 작전은 후반 6분에 제대로 적중했다.

던컨의 침투 패스를 받은 바비 찰튼이 과감한 슈팅으로 두 번째 골을 만들어 낸 것!

“나이스 골!”

“좋았어. 한 골 더 넣자!”

바비 찰튼의 골은 레스터 시티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전반전에 1골 차이일 때만 해도 어떻게 버티면 동점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던 것.

“패스해 줘!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준영의 마크에서 자유로워진 아서가 동료들을 닦달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반보다 그가 공을 잡기 더 힘들어졌다.

전진해 있는 준영과 던컨, 그리고 바비 찰튼 이 삼총사가 적극적인 압박으로 공격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

그나마 잡은 기회도 골키퍼 해리 그렉에게 막혀 버렸다.

이렇게 레스터의 공격이 지지부진한 사이, 볼 점유율을 높인 유나이티드는 후반 19분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던컨의 패스를 토미 테일러가 슬쩍 흘려주었고, 이를 데니스 바이올렛이 골로 연결시킨 것.

3 대 0의 스코어를 만든 유나이티드 최고의 명사수는 후반 44분에 그림 같은 중거리 슛으로 추가 골을 기록했다.

만회 골이라도 바랐던 레스터 시티는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이겼다!”

“좋아하지 마. 강행군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크리스마스와 그 뒤의 박싱데이에는 리그 6위의 루턴 타운과 2연전이 있다.

거기다 28일 공휴일에는 맨체스터 더비가 있고.

“세상에 이런 거지 같은 일정은 처음 봐. 아니, 어떻게 이틀 연속으로 경기를 할 수 있지?”

“이맘때는 원래 그렇다고.”

어이없어하는 준영과 달리, 다른 선수들은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크리스마스나 박싱데이 전후에 언제나 하루 혹은 이틀 간격으로 2연전이 있었으니까.

“연말에 공휴일이라 그만큼 관중들이 몰려오니까 말이야. 흥행을 놓칠 수 없는 거지.”

“뭐, 우리만 힘든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선수들을 혹사시키다니!

경기 중에 교체 규정도 없으면서 말이다.

준영이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던컨이 말을 건네 왔다.

“존,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할 거야?”

“그날? 남작님 일가랑 연극 보러 가기로 했어.”

“연극?”

“그래, 너도 티켓 받았잖아. 24일 팰리스 극장에서 공연하는 크리스마스 캐럴.”

“아, 구두쇠 스크루지가 나오는 이야기 맞지?”

“그래, 숀이 주연으로 출연한다니 보러 가 줘야지.”

프라하에서 열연(?)을 펼쳤던 숀은 요즘 연극 무대에서도 제법 잘나가고 있었다.

예전보다 비중 있는 역을 맡는다 싶더니, 이번에는 주연 자리를 따낸 것.

그래서 요즘 뒤풀이도 줄여 가며 연습에 한창이었다.

“재밌으려나? 난 영화관은 자주 갔지만, 연극은…….”

“재밌을 거야. 미래의 대배우가 연기하실 거니까.”

그 점을 생각하면 절대 이 연극은 놓칠 수 없다.

그래서 준영은 하늘이 쪼개지더라도 구경 갈 생각이었다.

***

2,000여 명의 관객들이 모인 극장 안.

준영은 차가운 푸른색 조명이 비추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깐깐한 인상의 노인으로 분장한 숀 코너리가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예? 내일도 출근을 하란 말입니까? 사장님, 내일은 크리스마스인데요?”

“그게 뭐 어쨌다고?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은……. 나 때는 말이야.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딱히 파티를 하거나 선물을 주거나 하지도 않았어!”

매정하고 꼬장꼬장한 스크루지를 향해 카린과 어린아이들이 야유를 터트렸다.

“우-! 우!”

“어허, 어떤 놈들이 남의 가게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게야! 썩 꺼지지 못해!”

숀, 아니 스크루지가 소품용 부지깽이를 들더니 바로 객석으로 난입했다.

놀란 아이들은 꺅꺅 비명을 질러 댔다.

“이보쇼, 당신이 부모인가? 가정교육 똑바로 시키시오.”

그럴싸하게 관객에게 훈계까지 한 스크루지는 다시 무대로 돌아갔다.

가만히 보고 있던 리즈가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저런 것도 대본에 있을까요?”

“즉흥적으로 했을 거야.”

원작의 구두쇠 스크루지에 제법 능청맞은 면모를 더했는데, 관객들 입장에선 꽤 신선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너무 경박해지지는 않았다.

적절한 위트는 냉정한 구두쇠의 내면에 불씨처럼 남아 있는 인간성을 비쳤다.

또 문학을 좋아하던 소년이 돈벌레로 전락해 버리게 된 환경과 세태에 대해서도 관객들은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

이러면서 무대의 배우들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모두가 점점 내용에 몰입하게 되었다.

“오, 제발! 너무 늦었다고 하지 마시오! 내게 아직 시간이, 희망이 있다고 말해 주시오! 제발! 제발 부탁이요!”

미래의 자신의 무덤 앞에서 스크루지가 울부짖는 장면.

준영은 그것이 단순한 연기가 아님을 눈치챘다.

원치 않았던 길에 들어서 숀이 얼마나 방황하고 고뇌했는지 지켜봤으니까.

그래서 연기에 그의 진심이 묻어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대사가 다른 의미로 꽂혀 드는군.’

이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2월 6일의 참사.

미래를 아는 만큼 점점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러한 초조함은 처음 이 시대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버스비의 아이들.

그들은 이제 신부님에게 들었던 이야기 속의 대상이 아닌, 함께 땀을 흘리며 우애를 나눈 친구들이었으니까.

‘부디 막아 내기에 너무 늦지 않기를, 그리고 어떻게든 막을 수 있는 희망이 있기를…….’

죽음의 일정이 진짜 누군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기를!

준영은 간절히 기원했다.

***

저 말도 안 되는 리그 일정 진짜였습니다. 저 시절엔 저렇게 크리스마스 때 모든 팀들이 이틀 연속으로 경기를 치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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