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75화 (75/400)

Round 75. 생각지도 못한 일

“결론은 아돌프 히틀러랑 다를 게 없다는 거네요.”

“히, 히틀러라니요!”

나치 독일의 수장이었던 히틀러는 죽은 후에도 유럽에서 악마의 현신으로 취급받고 있다.

들먹이는 것도 꺼려질 정도인 최악의 학살자.

그런데 그런 자와 같다니!

두 일본인은 냉큼 손을 내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우리는 아시아의…….”

가늘게 비웃음을 지은 준영은 가차 없이 말을 끊어 버렸다.

“뭐가 다른데? 전쟁 일으켰다가 쫄딱 망하니까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져서는 게르만족 자긍심 운운하면서 뭉쳐서 싸우자는 거랑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다릅니다! 우리는 서양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시아를 단결시켜 새로운 번영을 일구는 게 목적이지, 전쟁은 아닙니다!”

“그게 대동아공영권이잖아. 핵폭탄 두 방 처맞고 끝난 거 아닌가?”

핵폭탄만큼이나 묵직한 팩트 폭격에 일본인들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아시아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유럽 못지않은 역량을 가지는 건 좋지. 근데 그건 각자 알아서들 할 일이라고. 댁들이 뭔데 단합이니 뭐니 떠들어 대는 건데?”

“그야 우리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문명에 맞설 수 있는 국가니까…….”

“거봐, 저럴 줄 알았어. 게르만이, 독일인이 우수하니 열등 민족을 지배하고 선도하자 떠벌리던 나치랑 차이도 없잖아.”

“그것은…….”

“하긴 그럴 만도 하겠네. 지난 전쟁 때도 같은 패거리였으니까.”

작정하고 치부를 들추는 준영의 언행에 두 일본인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냥 솔직하게 조센징이 영국에서 축구 선수로 잘나가는 게 배 아프다고 해. 같잖은 이유 덕지덕지 대면서 이용해 먹을 생각은 하지 말고 말이야.”

“…리 선수, 당신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분노를 억누르고 내뱉는 말에 준영은 코웃음을 쳤다.

“댁의 입장에선 확실히 그렇겠지. 하지만 내 입장은 달라.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 각자 갈 길 가자고.”

준영은 거기서 손절하려 했지만, 이들은 보기보다 끈덕졌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아시아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축구 선수가 아니라요!”

차에 다시 올라타려던 준영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날 그렇게 만들어 준다고?”

“리 선수가 그렇게 결정을 한다면 그리될 겁니다.”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던 일본인들에게 그는 냉소를 지었다.

“꼭두각시가 영웅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큭!”

“꼭두각시가 영웅으로 대우받으면 그거야말로 촌극이지. 그런 싸구려 연극은 관두는 게 좋아.”

말한다고 들어먹긴 할까.

아무튼 이 어처구니없는 자들과 계속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이 없었던 준영은 차에 올라타 그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일본인들은 그가 멀어질 동안 분노를 삭여야 했다.

“젠장, 생각지도 못한 일이야. 저렇게 말이 통하지 않다니!”

“운동선수라서 좀 어수룩한 구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젠 어떻게 하죠?”

아무튼 이 왕가와 연관 관계는 물론 설득도 물 건너갔으니, 영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상부에 보고하자고. 그럼 위에서 뭔 수를 내겠지.”

저 시건방진 조센징을 구워삶을 정도로 혓바닥이 매끄러운 인간을 보내든, 아니면 다른 수단을 동원해 굴복시키든.

상부에서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그만한 역량을 가진 조직이 돕기로 했으니까.

***

모즐리 마을 공원에 자리한 실파크.

이곳을 홈구장으로 쓰는 모즐리 AFC는 북서부 지역 리그인 체셔 카운티 리그에 속해 있었다.

21세기 한국으로 치면 나름 구색을 갖춘 사회인 축구팀.

선수들도 주로 아마추어이지만, 프로에서 은퇴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이 팀에 최근 굉장히 유능한 코치가 영입되었다.

“그게 아니지! 아까 말했잖아. 공을 받고 돌아서려고 하지 말고, 공을 받는 순간에 돌아서라고.”

“필드에선 아주 한순간에 상황이 변할 수 있어. 그러니 미리 패스를 하거나 슈팅을 할 준비를 갖춰 놓아야 하는 거야.”

“드리블 잘하는 비결? 간단해. 부지런히 연습하면 돼.”

잔소리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 이 키다리 코치는 바로 이준영.

모즐리 AFC는 준영이 처음 1957년에 왔을 때 같이 공을 차 본 팀이다.

그때도 모즐리 선수들은 그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준영은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해서 그 유명한 천재 던컨 에드워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으니!

거기다 천하의 처칠도 반하게 한 플레이어라지 않은가.

이렇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유명 선수를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에 팀의 선수 겸 감독으로 있는 에디 퀴글리가 프레드로 저택에 찾아와 요청을 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찾아와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해 주면 안 되겠나?’

준영은 흔쾌히 수락했다.

현재 영국 사회에서 자신은 이방인.

많은 이웃과의 사이가 돈독해야 별 탈 없이 정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추어 팀 지도 같은 지역 사회 봉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존, 고맙네. 자네 덕에 젊은 녀석들의 기량이 부쩍 늘었어!”

“그래요?”

지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다 부쩍이라고 할 만큼 실력이 향상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프로인 준영의 눈에 성이 차지 않는 수준일 뿐.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달랐다.

실제로 8월 이후 9경기나 무승, 그것도 최근의 2무를 빼면 7연패를 했던 팀이 준영이 지도해 준 뒤로 값진 승리를 따냈다.

“잠재력은 충분히 있으니까 좀 더 체력 단련을 하고 개인기를 연마하면…….”

준영이 에디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선수들이 모인 곳에서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졌다.

“뭔데? 무슨 일이야?”

“사과가 목에 걸렸나 봐요.”

훈련이 끝나고 모즐리 선수들은 사과를 먹으며 허기와 갈증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한 명이 목을 움켜쥐고 버둥대기 시작했다.

급하게 먹다 기도가 막힌 모양.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주변의 동료들이 등을 쳐 줘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더 나빠져서 낯빛이 하얗다 못해 시체처럼 파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이거 큰일 났구만. 빨리 가서 의사 선생님 모셔 와!”

“비켜 봐요. 내가 해 보죠.”

준영이 황급히 나섰다.

‘기침을 못하고 의식을 거의 잃어 가는 상태라면…….’

그는 질식사 직전인 선수, 아니 환자를 등 뒤에서 안았다.

그리고 명치와 배꼽 사이에 주먹을 대고 안쪽에서 위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동작을 수차례 반복했다.

“뭐 하는 거야?”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땐데, 급식 시간 때 밥을 먹다 기도가 막힌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때 선생님이…….”

준영이 전부 설명하기 전에 환자가 크게 기침을 하며 입에서 커다란 사과 조각을 토해 냈다.

“오! 살았군, 살았어!”

구사일생한 선수나,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란 눈길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대단해. 이게 동양의 비법이라는 건가!”

“역시 마법사 리틀 존!”

이거 서양 의학이다, 이놈들아.

진실을 알려 주고 싶어도 제멋대로 감탄하고 호들갑을 떠는 이들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준영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쨌거나 좋게 끝난 걸로 충분하니까.

***

“사과가 목에 걸리다니, 마치 백설 공주 이야기 같네요.”

준영에게서 실파크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들은 리즈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죽을 뻔한 녀석 별명이 백설 공주가 되어 버렸지.”

“그리 불릴 만해요. 어쨌거나 Prince가 살려 준 거니까.”

왕의 아들뿐만 아니라 왕가의 피를 이은 이도 프린스라 칭하기도 한다.

리즈의 이런 지적에 준영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설 공주 같은 아가씨가 아니라 아쉽지 않았어요?”

“전혀. 여왕 폐하를 구한 경험으로 충분하옵니다.”

엘리자베스, 리즈의 실명을 두고 빗댄 말장난.

리즈는 문득 사고를 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마치 전깃줄이 끊긴 전구처럼 몸과 영혼이 단절될 뻔한 사고.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리고 병원에 있을 때 꾼 악몽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준이 있는걸.’

자신을 죽음의 수렁에서 건져 준 사람.

그가 곁에 있기에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근데 준, 21세기에는 응급처치 같은 걸 기본으로 배우는 거예요?”

“체육 과목이나 생활 안전의 일환으로 배우고 있어. 여기선 가르치지 않는 거야?”

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준영이 했던 것 같은 응급처치는 선원이나 광부같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이들만 익히고 있을 뿐이다.

“혹시 모르니까 나도 배워 보고 싶어요. 나중에 누군가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래, 배워 둬서 나쁘지 않지.”

어째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거절할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준영이 곧장 뒤에서 끌어안자, 리즈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변했다.

“이게 백설 공주를 살린 방법인가요?”

“하임리히법이라 하옵니다, 여왕 폐하.”

“강하게 끌어당긴다면서요? 이렇게 살살 하는 거예요?”

“위급할 때나 하는 거니까. 잘못하면 뼈가 부러질 수 있어.”

그것 때문에 나긋한 몸을 살포시 안아 든 건 아니지만.

가르침이 좀 부실하지만, 배우는 학생은 불만은 없는 듯했다.

“다음 걸 가르쳐 줘요. 예전에 나한테 했다는 그거.”

“인공호흡?”

“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다니, 상당히 근사해 보여요.”

“확실히 근사하지.”

리즈의 턱을 잡고 기도를 확보(?)한 준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달콤한 향이 맴도는 부드러운 감촉.

생명의 숨결을 주고받는 순간, 그들이 있던 응접실 문이 덜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리즈는 황급히 준영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앤지였다.

“무, 무슨 일이니?”

“기타를 두고 갔었어.”

구석에 놓인 기타를 들고 나가던 앤지는 돌아서며 말했다.

“방해해서 미안.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이미 산통이 깨져 버린 두 사람에게서 아쉬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

2027년 설날.

유럽 각지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맨체스터 서쪽 작은 마을 모즐리에 모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강익이냐? 오랜만이다.”

손웅민은 모처럼 보는 후배를 반갑게 맞았다.

현재 대한민국 대표팀의 대들보인 이강익은 스페인 라 리가에서 뛰고 있었다.

“너네 감독 깐깐하다고 들었는데, 용케 허락해 줬구나.”

“오히려 빠지지 말라고 하던데요?”

빠질 수 없는 모임.

대한민국 축구 선수, 특히 유럽파들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부득이하게 오지 못한 선수들도 SNS 등에 저마다 추모글을 남겼다.

“원래 기일은 내일이지만, 내일은 우리도 경기에 출전해야 하니까.”

“그렇죠. 그분도 우리가 경기 빼먹는 건 싫어하실 테죠.”

더구나 오늘은 설날.

민족의 명절에 찾아뵙기 딱 좋은 날이었다.

“다들 모였지? 그럼 가 보자고.”

검은 정장과 코트를 걸친 선수들은 대선배 박치성을 따라 마을 남쪽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한 묘비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미 다녀간 사람들이 있는 듯, 묘비 앞에는 꽃들이 놓여 있었다.

손에 든 꽃을 내려놓은 손웅민의 두 눈에 묘비에 새겨진 이름이 들어왔다.

<이준영 John Young Lee>

(1934.7.20∼1958.2.6)

대한민국의 첫 번째 해외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초의 한국인 선수.

그리고 1958년 2월 6일 뮌헨 참사의 희생자.

화려하게 떠오르려던 아시아의 별은 가장 어두운 날 빛을 잃었다.

***

1970년대 러시아에 고려인 출신의 미하일 안이라는 축구 선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는데, 안타깝게도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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