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74화 (74/400)

Round 74. 절친과 악우

“승리의 여신 니케, 아니 나2키. 정말 근사한 이름이군요.”

조셉은 진짜 맘에 드는지 바로 수첩을 꺼내 그 이름을 적어 놓았다.

“전 이게 딱이다 싶은데, 형님 생각은 어떠세요?”

“나2키… 말이야?”

“네. 스포츠에 있어 승리는 영광과 명예잖아요.”

근데 그거 나중에 미국에서 누가 쓸 거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준영은 일단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권하기로 했다.

“나도 괜찮다고 봐. 근데 우리만 그 좋은 이름을 생각했을 리는 없잖아.”

“맞아요. 다른 누군가가 쓸 가능성도 있겠죠.”

“그러니까 알아보고 등록해.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당연히 그래야죠. 상표 특허는 상당히 민감한 거니까.”

조셉은 군소리하지 않고 따랐다.

리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영의 놀라는 반응에서 분명히 미래와 관련이 있는 사항임을 눈치챈 것이다.

‘만약에 아직 나2키가 없다면 법적으론 문제가 없을 거다.’

준영은 결코 이번 건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나2키라는 브랜드의 이름값은 그야말로 굉장하니까.

물론 이름만 가로챘다고 미래 나2키가 차지했던 거대 시장을 모두 차지한다는 보장은 없다.

‘내가 펠레라고 칭한다고 진짜 축구 황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나2키가 성공한 건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 소비자들의 취향도 잘 맞췄기 때문.

장차 Ree복, 아니 나2키를 실제 경영하게 될 조셉도 이 점을 잊지 않게 조언해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조셉이 새치기를 하면 진짜 나2키 창업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필 나이트와 빌 바우어만.

그냥 스포츠인으로 머물러 있을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어떻게든 사업가로 성공할 게 틀림없다.

빌 섕클리 감독도 훗날 말하지 않던가.

폼은 일시적이라도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말이다.

‘나중에 조셉이 역량을 갖추면 소개해 주는 것도 괜찮겠지. 잘하면 미국 시장 진출에 동업자가 될지도?’

이리저리 미래 일이나 인재들에 대해 생각하던 준영은 문득 자신이 잊은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 참, 조셉, 내가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뭐죠? 새로운 장비가 필요한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사람을 좀 찾아 줬으면 해.”

“누군데요?”

“이철호, Cheol-ho Lee라는 한국인이야. 현재 난민 신분으로 노르웨이에 와 있다고 들었는데, 좀 도와주고 싶어.”

회사 이름과 사업 아이템을 가로챘으니 보상은 해 줘야 마땅할 터.

거기다 낯선 땅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니, 키워 주면 큰 인재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조셉은 이런 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Lee씨면 형님의 친척인가요?”

“아냐. 그냥 같은 한국 사람이고 낯선 외국에 있으니 도와주고 싶어서.”

조셉도 현재 한국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그냥 불쌍한 동포를 도와주고 싶나 보다 생각했다.

이탈리아나 아일랜드 사람들도 끼리끼리 뭉치며 돕고 살곤 하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저도 노르웨이 쪽은 모르지만, 해산물 수입업자들을 통하면 어떻게든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부탁 좀 할게.”

이후에도 그들은 사업이나 몇 가지 화제들에 대해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래를 아는 자와 미래를 넘보는 자.

슬며시 끼여서 지켜보는 리즈에게는 참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

“빨리빨리 뛰어!”

“왜 그래, 조니? 죽 먹고 나왔어?”

날씨가 쌀쌀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훈련장은 후끈하게 열기가 달아올랐다.

다음 첼시전 선발로 뽑히기 위해 기존 선발 멤버들과 후보 선수들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일어난 것.

골키퍼 포지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2월에 유나이티드는 23,500파운드의 이적료를 주고 새로운 골키퍼를 영입했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이 골키퍼는 해리 그렉.

뮌헨 비행기 참사 당시 용감하게 동료들과 승객을 구출한 영웅이다.

준영은 이미 그와 안면이 있었다.

허더스필드 타운에서 뛸 때 해리의 전 소속 팀인 돈캐스터 로버스와 경기를 했었으니까.

“하하, 정말이지 네 녀석이랑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니까.”

훈련이 끝난 후, 해리 그렉은 준영과 대화를 나누었다.

악연(?)이 있긴 해도, 현재 맨유에서 그나마 아는 녀석이라곤 준영뿐이었으니까.

“난 해리가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알다니? 혹시 감독님께 이야기라도 들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해리의 실력이면 유나이티드에 올 만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나 참, 남의 얼굴에 멋대로 금칠하지 마. 선발로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현재는 레이 우드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 골키퍼.

다른 포지션보다 보수적으로 기용되는 자리가 골키퍼인 점을 생각하면 해리 그렉의 말대로 미래를 낙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지 후보로 묵히려고 23,500파운드나 썼을 리는 없잖아.’

이번에 해리 그렉의 이적료는 골키퍼 중에서 가장 비싼 이적료였다.

영국 풋볼 리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리그들을 통틀어서도.

그만큼 실력이 있고, 버스비 감독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봐, 신참. 존의 말을 믿으라고.”

“맞아. 이 녀석 말대로 하면 가만히 앉아서도 돈이 굴러들어온다고.”

팀원들이 해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있었다.

준영이 갓 회사를 세웠을 때, 선수와 코칭스태프들에게 주식을 판 적이 있었다.

사실 기대한 이들은 별로 없었고, 그냥 앞으로 잘되라는 뜻에서 조금씩 샀다.

그런데 들어 보니 그 회사가 미친 듯이 잘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당연히 주식을 산 이들은 열광했다.

“깜짝 놀랐다니까. 신문은 물론 라디오에서도 나올 정도이니.”

“신참 너도 여기 와서 치킨 누들 먹어 봤지? 그거 이 녀석이 세운 회사에서 만든 거야.”

“괜히 요새 기자들이 인터뷰하려고 안달인 게 아니라고.”

모두의 이야기에 준영을 보는 해리의 표정이 달라졌다.

크게 될 놈이라고 보긴 했지만, 그냥 축구만 잘하는 놈이 아니었다니!

“거참, 설마 사장님이실 줄이야. 진짜 잘 알아 둬야겠네. 나중에 은퇴하고 찾아가면 취직시켜 줄지 모르니까.”

“이야, 해리, 보기보다 정략적이군요!”

너스레를 떨며 해리 그렉과 금세 절친이 된 준영.

훈련장을 나온 그에게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와, 존 Y. 리다!”

“사인 좀 해 줘요!”

사인을 요청하는 소년과 아이들을 지나고 나니 다음엔 수첩과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 선수, 수비수임에도 가공할 득점력을 갖출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런 피지컬을 가질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이렇게 축구와 관련한 질문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최근에 진행되는 사업에 대해서 묻는 취재원들도 있었다.

“리 선수, 그 획기적인 치킨 누들을 어떻게 개발하게 된 겁니까?”

“제 고향에 비슷한 식품이 있었거든요. 그게 참고가 되었죠.”

“그 천국의 만찬 같은 양념 치킨도 리 선수의 고향에 있던 음식입니까?”

이리저리 답해 주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차장으로 온 준영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을 때, 또 다른 기자들이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오늘 인터뷰는 끝났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죠, 리 선수. 저희는 정말 멀리서 왔습니다.”

애원하며 다가온 두 사람을 보고 준영의 표정이 달라졌다.

중절모를 눌러쓰고 있어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동양인들이었다.

“혹시 지난번에 저택에 찾아왔었다던……?”

“예, 맞습니다. 리 선수가 안 계셔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요.”

리즈와 카린이 말했던 동양인 기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던 모양.

준영은 차에서 내려 두 사람 앞에 섰다.

머리 하나보다도 훨씬 큰 준영이 내려다보자, 두 동양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내 과거를 꽤 궁금해하셨다죠?”

“예, 거기에 대해 리 선수 본인에게서 보다 상세한…….”

“딱히 상세한 건 없습니다. 앞서 알아내신 게 전부입니다.”

준영이 딱 잘라 말했음에도 둘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했다.

“정말 이 왕가와는 관련이 없다는 겁니까?”

“수백 년 전에 갈라진 머나먼 친척이죠. 근데 일본분들이 왜 그리 남의 나라 선수 혈통에 관심이 많죠?”

정체가 탄로 나자 둘 다 깜짝 놀랐다.

잠시 당황하던 그들은 이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리 선수는 남의 나라 선수이기 이전에 아시아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자랑? 내가?”

“물론입니다. 많은 아시아인들이 리 선수의 활약을 매우 통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 오만방자한 영국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렀다고 말이죠.”

‘그러고 보니 억관 아저씨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그때 이억관은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준영을 자기네 나라 사람, 혹은 혈통이라고 여기는 데 분통을 터트렸다.

준영도 어이가 없었다.

혈통이고 뭐고, 자신은 100퍼센트 한국인이라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러니까 이놈들이 남의 족보를 캐묻고 다닌 것도 자기네들이랑 연관이 있을까 싶어서 그랬던 거지.’

1910년 나라가 망하고, 조선 왕실은 일본 귀족 집단에 편입되었다.

실제 일본 방계 황족 여자가 고종의 아들과 결혼하기도 했다고 하고.

그래서 최근 영국에서 유명한 동양인 선수가 이씨에 왕족이라는 소문까지 있으니 뭔가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박치성 선배가 맨유에서 활약할 때도 일본 축구인들이 유난을 떨었다던가?’

J리그에서 뛰었던 선수라고, 자기네가 키운 선수라고 으스댔다고 들었다.

하지만 박치성과 달리 준영은 일본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

축구는 한국에서 배웠고, 프로 생활은 프랑스에서 시작했다.

일본은 가 본 적도 없거니와, 국가대표 시절에도 일본과 경기한 경험은 없었다.

이런 준영의 심드렁한 심정도 모르고 두 일본인들은 열심히 침을 튀겨 댔다.

“국경을 떠나 리 선수는 모든 아시아인들의 친구이자 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유럽인들에게 뒤처졌던 아시아인들에게 리 선수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거지요. 저들을 이길 수 있다고, 월등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린 리 선수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알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준영은 손을 내밀어 두 일본인이 떠벌리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끊어 냈다.

“나 여기 와서 아직 반년 정도밖에 뛰지 않았는데, 그렇게 대단해 보입니까?”

“당연하죠.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증명해 내지 않았습니까. 아시아인의 역량도 유럽인에 못지않다는 걸. 아니, 그 이상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게 또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걸까.

피식 웃음을 지은 준영은 자신의 애마 라곤다에 기대어 물음을 건넸다.

“뭐, 지루하게 이런저런 말은 필요 없고, 하나만 물어보죠. 당신네 목적이 뭡니까?”

“저희는 그저 아시아인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다 같은 친구가 되어 유럽인들에 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게 당신들의 계획인 거군요. 알겠습니다. 아주 잘 알겠어요.”

준영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두 일본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가 구겨지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

사돈의 팔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론 남남인데 출세하면 친한 척 비벼 보려는 사람들이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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