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73. 새치기
12월 7일 토요일.
맨유는 여독을 풀 틈도 없이 버밍엄 원정에 나섰다.
피로 때문에 자칫하면 꼬일 경기를 풀어 준 사람은 명사수 데니스 바이올렛이었다.
그는 프라하 원정에 끼지 않았고, 그만큼 체력에 여유가 있었다.
전반 14분에 선제골을 터트린 데니스는 세인트 앤드류 경기장에 모인 3만 명의 버밍엄 팬들을 단번에 침묵시켰다.
이후 반격에 나선 버밍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장 피터 머피가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라디오 중계석의 캐스터가 흥분감에 목소리를 높였다.
「에디 브라운이 흘려 준 패스를 측면을 파고들던 피터 머피에게 연결……! 슛-! 아, 유나이티드 5번 존 Y. 리가 육탄으로 막아 냅니다.」
아까운 기회를 놓친 버밍엄 시티는 1분 후 고든 애스톨이 페널티 박스 안으로 돌파해 들어왔다.
하지만 황급히 접근한 준영 때문에 슈팅 각이 좁혀지고 말았다.
덕분에 레이 우드 골키퍼는 가볍게 선방을 해냈다.
「존 Y. 리가 연거푸 위기에서 팀을 구해 내는군요. 과연 버밍엄이 이 거인을 쓰러트리고 득점에… 아, 말씀드리는 순간, 유나이티드의 역습이 전개됩니다!」
레이 우드가 길게 던진 공을 측면에서 조니 베리가 받아 버밍엄 진영을 거침없이 돌파해 나갔다.
황급히 마크에 나선 버밍엄 선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니 베리의 패스가 빈 공간에 파고든 토미 테일러에게 연결되었다!
「아,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 토미 테일러, 침착하게 밀어 넣었습니다. 유나이티드가 순식간에 2골을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반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두 골이나 벌어지자, 버밍엄 팬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버스비의 아이들.
올 시즌도 굉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이들은 소문대로 악마 같았다.
특히 저 키 큰 황인종 선수는 정말이지 높은 성벽처럼 보였다.
“젠장, 왜 저 원숭이가 설치게 두는 거야!”
“나라면 발등을 밟거나 발목을 작살내 줬을 텐데!”
버밍엄 팬들은 가슴을 쳤다.
물론 선수들도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의적으로 부상을 입혀 머릿수를 줄이는 더러운 작전은 종종 벌어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소용없는걸!’
덩치도 큰 놈이 뭐 저리 발재간과 몸놀림이 빠른지!
차징이나 태클을 걸어도 가볍게 피해 버리곤 했다.
마치 성난 소를 농락하는 투우사처럼.
더구나 섣불리 덤비다간 투우사가 숨겨 둔 칼에 심장이 찔릴 수도 있었다.
「유나이티드 문전으로 높게 날아드는 크로스! 에디 브라운, 점프… 아, 이번에도 존 Y. 리가 헤딩으로 잘라 냈습니다.」
준영과 공중 경합을 했던 에디 브라운은 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좀 전에 공중에서 준영의 팔꿈치에 목젖을 살짝 얻어맞았는데, 순간 숨통이 턱 막혀 온 것이다.
“쿨럭! 쿨럭!”
“이봐요, 괜찮아요?”
준영의 물음에 에디 브라운은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내가 키가 크다 보니 공중 경합할 때 팔꿈치가 엉뚱하게 부딪치더라고요.”
“그래, 뭐… 경기하다 보면 그럴 수 있으니까.”
에디 브라운은 재작년 FA컵 결승을 떠올렸다.
그때 후반전에 골 다툼을 하다 맨체스터 시티의 독일 골키퍼랑 부딪쳤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버트 트라우트만은 그때 목뼈가 부러졌었다고.
‘경기하다 보면 부딪칠 때가 있지. 근데 이 녀석이 만약에 일부러 휘둘러 댄다면……?’
그런 상황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버트 트라우트만처럼 다쳐서 시즌을 날려 먹으면 몸이고 급료고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니까.
「버밍엄은 공격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간판 공격수인 에디 브라운도 계속 침묵만 이어 가고 있네요.」
라디오 중계 캐스터만큼이나 버밍엄 팬들도 아쉬움이 컸다.
에디 브라운은 거의 2경기에 1골씩은 넣을 정도로 뛰어난 공격수.
거기다 그가 골을 넣은 후에 보이는 셀레브레이션도 아주 재미있었다.
관중 통제를 맡은 경찰을 번쩍 안아 들기도 하고, 취재 기자들의 모자를 벗겨다 관중석에 던지는 장난을 할 때도 있었다.
과연 오늘 경기에서도 그의 쇼를 볼 수 있을지?
이렇게 추격 골을 기대하던 버밍엄 팬들은 전반 36분, 길게 목을 뺐다.
측면에서 공을 잡은 버밍엄의 노엘 킨제이가 잽싸게 유나이티드 골대를 향해 내달린 것.
하지만 골대를 흔든 그의 슛은 골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프사이드였으니까.
“잘했어, 존스! 이제 타이밍을 맞추는구나!”
“하하핫, 요령을 알겠더라고!”
방금 오프사이드 트랩을 쓴 수비수 마크 존스는 준영이 보내는 엄지 척에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지난번 아스톤 빌라전 때는 어설프게 하다 크게 망신을 당할 뻔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성공했다.
그동안 준영이나 다른 수비수들과 라인 맞추기나 오프사이드 트랩 연습을 많이 한 덕분이었다.
“제길, 인사이드 같았는데.”
“잊어버려. 다음번엔 성공할 테니까.”
아직 시간은 많다.
전반전의 아쉬움은 후반전에 풀면 된다.
버밍엄 선수들이 이렇게 낙관했을 때, 던컨 에드워즈가 치고 올라오며 반대편의 데니스 바이올렛에게로 정확한 패스를 보냈다.
“막아! 페널티 박스로 들여보내지 마!”
돌파를 시도하던 데니스는 버밍엄 수비수들이 길목을 막아 버리자, 페널티 아크 쪽으로 살짝 크로스를 올려 보냈다.
때마침 쇄도해 들어온 준영은 발등으로 날아온 공을 띄우며 상대 선수 한 명을 빙글 돌며 제친 다음, 발리슛을 날렸다.
“아니!”
“저, 저런!”
“으아아아아아!”
골대 오른쪽 구석에 꽂혀 버리는 절묘한 터닝 발리슛!
비명 같은 함성이 세인트 앤드류 스타디움을 울렸다.
“들아갔다아!”
시즌 통산 8호골, 리그 여섯 번째 골!
준영은 취재 기자들이 모인 쪽으로 달려가더니, 무릎으로 쭉 미끄러지면서 두 팔을 좍 펼쳤다.
“허, 마치 보란 듯이 폼을 잡는구만!”
“사진 찍기 딱 좋은 각도인걸.”
마침 카메라 셔터에 손을 대고 있던 기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자기 팀 선수의 멋진 골 셀레브레이션을 기대했던 버밍엄 팬들은 울분을 삼켰다.
마치 새치기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으므로.
“오늘 경기 망한 것 같아.”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망한 거야.”
전반전 종료 직전 스코어 3 대 0.
아직 후반전이 남아 있지만, 정말 승리는 아득해 보였다.
***
다음 날 일요일 오후, 조셉이 준영을 찾아왔다.
“형님, 버밍엄 원정승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사업은 좀 어때?”
“후후후! 딱히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좋습니다.”
제기, 훌라후프, 작업용 목장갑 등등.
준영이 제안한 상품들은 만들기 무섭게 팔려 나가고 있다.
덩달아서 구두와 운동화 등 기존의 상품 판매 실적도 좋다고.
“그런데 고민이 좀 생겼어요.”
“고민?”
“회사 이름이 너무 평범한 것 같아서요.”
신상품을 판매하기 전, 조셉은 형 제프리와 함께 JW 포스터&손스에서 독립해서 새로운 제화 및 스포츠 용품 회사를 세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의 이름은 JJJ 스포츠 컴퍼니.
조셉(Joseph), 제프리(Jeffrey), 그리고 준영(John)이 협력해서 세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조셉은 이 이름이 성에 차지 않았다.
영국이면 몰라도 장차 세계 무대로 진출할 때는 평범하지 않나 싶었던 것.
“하긴 독일의 아D다스나 프랑스의 르꼬끄 스포르티브에 비하면 뭔가 약해 보이는 느낌이 들긴 해.”
“그렇죠? 그래서 쓸 만한 이름을 찾고 있는데,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더라고요.”
아직 Ree복이라는 명칭을, 미래에 자신이 세울 회사의 이름을 생각하지 못한 걸까.
이에 준영은 도움을 주기로 했다.
어차피 역사도 좀 바뀐 데다, 원래 조셉이 생각해 낸 것이니 알려 줘도 무방할 것이라 판단한 것.
“Ree복(Reebok)은 어때?”
“Ree복? 혹시 아프리카에서 가장 빨리 달린다는 영양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 알고 있었구나.”
“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조셉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은 이름이긴 한데,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을까요? 어째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아서…….”
‘아니, 이 자식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거 네가 미래에 세울 회사 이름이라고!’
나름 글로벌 브랜드로 입지를 구축한 명칭인데 만족스럽지 못하다니!
“형님도 알겠지만, 아D다스는 창업자인 아돌프 다슬러의 이름과 성을 줄여서 지었죠. 르꼬끄는 프랑스 국조인 닭에서 따왔고요.”
“그랬지.”
“네, 그런 식의 연관은 있지만, 아프리카 영양하고 우리랑은 그다지 상관이 없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다만…….”
“뭐, 어떻게든 연관을 시키자면 육상 선수였던 할아버지랑 잘 달리는 영양을 엮어 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느낌이 약해요.”
준영은 곤란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뭘 잘못했을까.
원래 Ree복이라 이름 짓고 장사했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를 거절하게 된 걸까.
‘본인이 생각한 게 아니라 내가 추천해서? 아니면 내가 알려 준 사업 아이템이 대박 나서 야망이 커진 건가?’
아, 이러면 완전히 에바인데.
난감해하고 있을 때, 리즈가 나타났다.
“두 사람,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조셉이 지금 회사 이름이 마음에 별로 안 든다나 봐.”
그러면서 준영은 Ree복이란 이름을 추천했는데, 맘에 안 들어 하더라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래요? 확실히 잘 모르는 동물이면 다들 어리둥절할 것 같아요.”
리즈의 말에 조셉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잘 아시네요. 그런 점에선 차라리 르꼬끄가 훨씬 낫단 말이죠.”
“네, 제가 생각해도 Ree복은 아닌 것 같아요. 차라리 신비감을 줄 거면 신화 속의 이름을 빌려 오는 게 낫지 않아요? 페가수스나 유니콘 같은 거요.”
“신화 좋죠. 안 그래도 원래 회사 이름도 머큐리라고 하려고 했죠. 신속(神速)을 가진 신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그 이름으로 하지 않았죠?”
혹시 내가 끼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조셉의 입에서 의외의 답이 흘러나왔다.
“신속이든 어쨌든 머큐리는 신들의 심부름꾼이잖아요. 그런 이미지가 별로였어요.”
“자주적인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이거군.”
“예, 형님. 기왕에 할아버지 회사에서 독립했으니 그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봤어요.”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Ree복은 나중에 아D다스에 합병되어 미국 시장에서 나2키와 싸우게 된다.
그리고 그 싸움은 처참하게 패배. 그나마 갖고 있던 미국 시장 점유율도 다 날려 먹었다.
“자주적이면서도 신비감 있고, 스포츠 브랜드로 괜찮은 이름이라…….”
“아가씨, 좋은 이름 생각나면 추천 좀 해 주세요.”
조셉의 요청에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리즈가 박수를 쳤다.
괜찮은 이름이 생각났다는 듯이.
“빅토리아 어때요?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인데.”
“오, 그거 괜찮습니다!”
“거기다 영국스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말이죠.”
“맞아요, 맞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통치했던 여왕 빅토리아.
그녀의 치세는 21세기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영국인들의 국뽕이 폭발하던 시절.
그래서 조셉도 딱이다 싶었다.
그때 준영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세계 시장 노릴 거 아니야? 대영제국 이미지를 안 좋게 여기는 나라들도 꽤 있다고.”
“그래요? 그러고 보니 너무 노골적인가?”
“그럼 빅토리아라고 하지 말고 니케, 나2키는 어때요?”
그리스 신화의 니케는 로마 신화의 빅토리아와 같은 승리의 여신.
그래서 제안한 리즈의 말은 준영의 어이를 안드로메다까지 보내 버렸다.
‘아니, 왜 나2키가 나와?’
이건 그야말로 역대급 새치기였다.
***
에디 브라운은 당시 축구 선수들 중에서 흔치 않은 고학력자였습니다. 대학에서 8년 동안 공부하면서 영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를 익혔죠.
특이한 골 셀레브레이션만큼이나 쇼맨십도 강해서 은퇴하면 스탠드 업 코미디언을 해도 되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운동선수 출신 예능인으로 대성할 수 있었다는 건데, 선수 생활 은퇴 후에는 그냥 프랑스어 교사로 살았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