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72화 (72/400)

Round 72. 엉뚱한 투혼

던컨은 준영이 얻은 프리킥을 처리하기 위해 공 앞에 섰다.

삐익-!

심판의 휘슬이 울렸음에도, 그는 바로 킥을 처리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적절히 시간을 끌었다.

“빨리 차라!”

“얼어붙었냐. 왜 이리 꾸물대?”

“우우우- 우우-”

관중들의 야유에도 던컨은 요지부동.

결국 독일인 심판에게 주의를 들었다.

“Tritt den Ball schnell!”

“알았어요. 할게요. 이제 찰 겁니다.”

그러나 경기는 쉽게 재개되지 못했다.

페널티 박스에 들어가 있던 준영이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

무슨 일인가 했던 심판에게 맨유 선수들은 열심히 제스처를 쓰며 상황을 설명했다.

“쟤가 우리 5번을 잡아챘어요.”

“다리도 걸던데요?”

“이거 페널티킥 아닙니까?”

당연히 두클라 프라하 쪽에서는 펄쩍 뛰었다.

“별로 세게 잡지도 않았어!”

“그냥 저 멀대가 픽 쓰러져 버렸단 말입니다!”

“난 오히려 저 자식이 휘두른 팔에 얼굴을 맞았다고요!”

우리가 당했다는 둥, 저놈이 잘못했다는 둥.

한동안 이어진 양 팀의 논쟁은 심판의 만류로 마무리되었다.

어느 쪽도 유리한 판정을 얻지 못한 채.

아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쪽이 득을 보았다.

‘77ㅓ- 억, 시간 잘 먹었습니다.’

준영은 아까 페널티 박스로 들어오기 전에 던컨에게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일렀다.

프라하에 오기 전에 이미 토트넘과 격전을 벌였다.

거기다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체력을 소모했다간 손해였다.

‘그러니까 지공이 옳은 거지.’

좀 전에 넘어진 것도 일부러 그랬다.

던컨은 물론, 다른 선수들도 이런 준영의 의도를 금방 눈치챘다.

어차피 지금 급한 건 두클라 프라하이지, 자신들이 아니니까.

삐익!

심판의 재촉 어린 휘슬이 울렸다.

이번에는 꾸물거리지 않고 던컨이 프리킥을 길게 띄워 올렸다.

“온다! 놓치지 마라!”

“저 키 큰 원숭이가 뛰지 못하게 해!”

문전은 수비수와 공격수들이 어지럽게 엉킨 상황.

그 와중에 가장 먼저 공의 낙하지점을 포착한 사람은 준영이었다.

“Přestaň!”

“Nenechte si to ujít!”

상대 수비수들이 아귀처럼 달라붙었다.

어깨를 붙들고, 유니폼을 잡아끌고, 등으로 떠밀고.

그 와중에도 뛰어오른 준영은 이마로 공을 살짝 틀어 놓았다.

그리고 골키퍼의 손을 스친 헤딩슛이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들어갔다!”

“역시 리틀 존! 덩칫값을 한다니까!”

스타디온 스트라호브(* 두클라 프라하의 홈구장)가 일시에 고요해진 가운데, 준영과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보란 듯이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쳤다.

스코어는 1 대 1.

준영이 예언한 대로 두클라 프라하의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

동점 골을 허용한 두클라 프라하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거친 플레이는 실점하기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에 집중력은 흐트러져 있었다.

그와 달리 맨유 선수들의 수비 조직력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을 되찾았다.

이런 양상은 전반이 끝나고 후반전에서도 마찬가지.

유나이티드는 느긋하게 경기에 임했다.

물론 그렇다고 상대 공격을 널널하게 놔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 이 녀석인가.’

요세프 마소프스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준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동점 골을 내준 후, 그는 팀의 공격을 선도해 나갔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돌파나 패스 시도에서 이 덩치 큰 황인종에게 막혔으니까.

겨우 뿌리쳤다 싶으면 그다음에는 던컨 에드워즈와 마크 존스 등이 막아서곤 했다.

‘여기서는 돌파가 안 돼. 차라리…….’

요세프는 반대편 쪽에서 돌아 들어가는 같은 편 선수를 보고 길게 크로스를 보냈다.

하지만 빌 포크스가 헤딩으로 끊어 버렸고, 그것은 콜린 웹스터의 발을 거쳐 전방의 토미 테일러에게 연결되었다.

“나이스 패스!”

토미 테일러는 삽시간에 상대 진영으로 달려갔다.

남아 있던 수비수가 황급히 막아섰지만, 토미는 곧장 공을 찬 다음에 치고 들어갔다.

이대로 놔두면 골키퍼랑 일대일 상황.

다급한 마음에 수비수는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채 쓰러트렸다.

당연히 파울이었다.

“저런 건 퇴장을 줘야지!”

21세기라면 저런 상황에선 레드카드를 받았을 텐데.

그래도 판정은 몰라도, 선수들의 생각은 지금이나 70년 후나 비슷한 모양이다.

토미 테일러는 서둘러 일어나는 대신 느슨해진(?) 축구화 끈을 다시 맸다.

“우우-! 우!”

“토미, 천천히 해요.”

“알고 있어, 존.”

준영에게 씩 미소를 지은 토미는 이번에 반대편 축구화 끈을 고쳐 맸다.

역습은 빠르게.

하지만 다른 공격은 최대한 신중하게.

이것이 거칠고 다급한 상대에 대응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작전이었다.

그래서 두클라 프라하가 파울을 저지를 때마다 그들은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그런데 경기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아악-!”

오늘 경기 맨유의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한 숀 코너리.

그가 상대 진영에서 수비수의 백태클을 맞고 나뒹굴었다.

“괜찮아요, 숀?”

발목을 움켜쥐고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의 모습은 척 봐도 심각해 보였다.

“이건 너무하잖아!”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어!”

맨유 선수들의 거센 항의에 두클라 프라하 선수들도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아, 이건 좀.’이라고 볼 정도의 심한 파울이었던 것.

심판도 그리 봤던지 숀을 걷어찬 수비수를 퇴장시켰다.

그사이 준영은 숀을 부축해서 필드 밖으로 데려갔다.

허겁지겁 달려왔던 팀 닥터는 숀의 발목을 만져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런!”

“왜요? 설마 골절입니까?”

긴장한 준영의 물음에 팀 닥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멀쩡해. 아무 이상도 없어.”

“예에?”

아니, 그럼 시뮬레이션 액션이었단 말인가!

“쉿! 조용히 해, 리틀 존! 선생님은 얼른 붕대나 감아 줘요!”

“나 이거야 원…….”

어처구니없어하던 팀 닥터는 부심이 힐끔 쳐다보자, 심각한 표정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이 상황에선 어떻게든 장단을 맞춰야 했으니까.

그렇게 준영이 필드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밖에서 치료(?)를 받았던 숀.

그는 경기가 약간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다시 필드 안으로 들어왔다.

“저 녀석, 다쳤는데도 계속 뛰겠다는 건가?”

“투지가 장난이 아니군.”

절뚝이면서도 계속 뛰려는 그의 투혼(?)에 두클라 프라하 팬들도 감탄했다.

독일인 심판도 다가와서 걱정스럽게 바라볼 정도.

“Bist du in Ordnung?”

“뛸 수 있어요. 나는 이 영광의 무대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숀의 결연한 표정에 심판은 감동의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 공이 오자 숀은 아픔을 꾹 눌러 참고(?) 뛰었다.

“엄청나게 아플 텐데…….”

“앗, 다시 주저앉았어. 저 선수, 정말 괜찮을까?”

절뚝거리며 움직이다 패스가 들어오면 이를 악물고(?) 뛰고.

공을 몰고 또 뛰다 동료에게 패스해 주고 주저앉고.

그 분투는 경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심판이 휘슬을 불기 직전, 정말 놀랄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토미 테일러가 건넨 침투 패스를 숀이 그대로 골대 안으로 밀어 넣으며 역전 골을 터트린 것이다!

“저 영국 놈, 정말 지독하군!”

“저런 건 대단하다고 해 줘야지. 앗, 또 쓰러졌네!”

“이젠 일어나기도 힘든가 봐.”

“혼신을 다한다는 게 저런 거로군!”

숀의 엄청난 투혼(의 연기)에 감동한 프라하 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준영에게 사정을 들은 맨유 선수들은 어이없어했지만.

“존, 네 말대로 숀은 배우로 성공할 것 같아.”

“물론이지.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가 될 거라고.”

오늘 팀에게 승리를 안겨 준 투혼, 아니 열연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준영은 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

적지에서 승리를 거둔 유나이티드는 유러피언 컵 8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축배를 들 틈도 없이 그들은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겨우 3일 후에 버밍엄 시티와 리그 경기가 있었으므로.

“그래서 프라하까지 갔는데 구경도 못한 거야?”

집으로 돌아온 후, 앤지의 물음에 준영은 손을 내저었다.

“구경이 뭐냐. 더구나 자칫하면 북한으로 끌려갈 뻔했는데.”

“아, 그 소식은 신문으로 봤어요.”

준영이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국에 잠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은 동행한 특파원들이 알려 왔다.

리즈도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애매하게 말한 게 그렇게 일이 커질 줄이야…….”

“그러게요. 외교적인 분쟁까지 발생할 뻔했으니.”

실제로 영국 외무성은 이번 사건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 항의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처음엔 묵묵부답이던 체코슬로바키아는 계속된 비난에 사과는커녕, 역정에 가까운 성명을 내놓았다.

남의 나라를 멋대로 파시스트에게 팔아넘긴 나라가 국가 보안에 간섭하려 들지 말라면서.

“우와, 워딩 한번 세게 하네. 소련을 뒷배로 둬서 그런가?”

“뮌헨 협정에 대한 앙심도 있는 거겠죠.”

“그렇기도 하겠군.”

두클라 프라하 선수들이 전투 축구 수준으로 거칠게 달려든 것도 그 앙심 때문은 아닐까?

아무튼 다 끝난 일이다.

준영은 이번 일을 교훈 삼아 공산 국가로 원정을 갈 때 거듭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그렇고, 이 초콜릿 맛있네. 구경할 틈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어?”

“공항에서 팔더라고.”

21세기에 있을 때 프라하의 초콜릿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샀다.

아몬드와 계피가 적절히 섞인 프라하 초콜릿은 꽤 독특한 풍미가 있었다.

그래서 출발 전에 선수들과 피로 회복을 겸해서 나눠 먹었다.

그리고 따로 선물용으로 사서 이억관이나 조셉 등 지인들에게도 주었다.

알버트나 세 자매도 한 상자씩 받은 건 물론이다.

“카린,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지 마라. 잘못하면 이가 썩어.”

“히히힛, 알았어. 근데 오빠야 회사에선 과자는 안 만들어?”

“과자?”

카린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21세기의 과자. 카린은 미래의 과자가 어떤 맛일지 궁금하거든.”

“그게 계획은 있는데…….”

지금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는 라면 생산에 거의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다음엔 치킨 판매에 필요한 소스나 식재를 만들 계획이라, 과자는 3순위로 밀려나 있었다.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줘.”

“우!”

“알았다, 인석아. 견본용으로 만들면 시식하게 해 줄게.”

그제야 카린은 개구리처럼 불룩하게 부풀렸던 뺨을 쏙 집어넣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리즈가 잔소리를 좀 했다.

“카린, 사소한 걸로 조르면 못써. 준은 요즘 많이 바쁘단 말이야.”

“하긴 오빠야를 찾는 사람들이 요새 많으니까. 그저께도 동양 사람들이 왔었고.”

동양인들이 찾아왔다?

준영은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았다.

“혹시 억관 아저씨가 누굴 데려왔어?”

“아뇨. 리 셰프는 아니에요.”

리즈의 말에 따르면 처음 보는 동양인들이라고 했다.

준영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라고 했는데, 주로 과거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

“한국의 이씨 왕조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많이 궁금한 모양이었어요.”

“저번에 내가 이야기했던 족보라도 알려 주지 그랬어?”

“네, 그러니까 좀 실망하는 눈치였어요. 근데 그 사람들, 자기네끼리 쓰던 말이 지난번에 극장 영화에서 들었던 거랑 같더라고요.”

“영화라면 콰이강의 다리?”

“네, 분명히 거기서…….”

리즈의 이야기를 들은 준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놈들이 왜 날 조사하는 거지?’

***

중동 선수들 중에 본문의 숀 코너리와 같은 투혼을 보여 주는 선수들이 종종 있죠. 아프다고 엎어져 있다가 공이 오자 귀신같이 일어나서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보통 투혼(?)이 아니구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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