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71. 오판
‘짜식들, 단단히 쫀 모양인데?’
준영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히죽 웃음을 지었다.
체코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저놈들도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닫긴 한 모양이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까? 태세 전환은 분명해 보이는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이.”
방문이 열리며 중년의 북한인이 홀로 들어왔다.
그는 준영에게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손연형이라 하네.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를 맡고 있지.”
“하?”
준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자리에 끼는 걸 보면 외교관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설마 대사급의 거물일 줄이야!
“동무의 활약은 익히 들었네. 처음엔 거짓말 같아서 믿어지지 않았는데…….”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시죠.”
준영이 차갑게 말을 끊어 버리자 손연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기분을 상하게 해서 유감이네. 우린 동무가 불법 월경자인 줄 알았단 말이지. 그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처하는 게 원칙이라서 말이야.”
“아까 못 들었습니까? 난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래, 남조선에서 왔다고 했지. 그런데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라며?”
준영은 기가 막혔다.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어 두루뭉술하게 말한 게 이렇게 또 일을 만들다니.
“뭐, 동무의 입장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네. 남조선 괴뢰들의 정치 공작과 탄압에 실망과 분노가 컸을 테지.”
손연형이 기억하기로 해방 후 조선의 정국은 혼란했다.
북에서 소련군이 들어왔을 때, 남쪽은 미제가 점령했고,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들에 빌붙어 기생했다.
‘이승만이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암살당한 자들도 많았지.’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등.
이 때문에 남조선에 실망하고 월북한 이들도 있고, 해외로 망명한 자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손연형은 준영도 그런 망명자의 아들이나 손자일 거라 보았다.
‘아무튼 외국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면 그만큼 쓸 만하다는 거지. 그런 친구가 우리 공화국으로 와 준다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면서 남과 북의 총성은 멈췄다.
하지만 전쟁은 총포로만 하는 게 아닌 법.
조선 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정통성을 세우자면 외교는 물론, 해외 동포들의 포섭과 전향도 중요했다.
가까운 일본에서 조총련과 민단이 싸우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
쓸 만한 인재를 포섭할 수 있다면 큰 이득이었다.
특히 공화국의 명예를 드높여 줄 스포츠 영웅이라면 더욱.
“영국 그 제국주의 섬나라 양놈들 틈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그 와중에 성공을 거두었다니 동무는 참으로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것 같네.”
“…….”
“타향에서 더 이상 그런 의지를 낭비하지 말게. 돌아갈 수 없는 곳에도 미련을 둘 필요가 없어. 진짜 조국이 동무를 격하게 환영해 줄 것이니 말이야.”
손연형의 말에 준영은 아무런 대꾸 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얘기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기대감을 품고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손 대사에게 말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뭐든지.”
준영이 호기심이 든 표정을 짓자 손연형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이… 아니지, 참. 김일성이가 나 영입해 오라던가요?”
“뭐, 뭐라고……!”
손연형의 낯빛이 파리하게 굳었다.
불세출의 항일 영웅이자, 조선 최고사령관 김일성 원수의 함자를 동네 강아지 부르듯이 불러 대다니!
“확실히 대답해 주세요. 본국의 훈령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거야…….”
“거참, 난 또 김일성이가 축지법으로 와서 지시한 줄 알았네. 아무튼 그럼 독단이었다는 거네요. 그렇죠?”
손연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준영의 무례한 언행을 떠나서, 녀석이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
“본국의 훈령도 없이, 타국의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서방 진영 국가의 시민을 납치해서 전향을 강요하다니. 역시 적색혁명 하시는 양반들은 배짱부터 다르네.”
손연형은 준영의 빈정거림에 대꾸하지 못한 채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실제로 문제 될 일이 맞다.
그래서 불법 월경자로 모는 게 힘들어지자, 다독이기로 했던 것.
이대로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면 공화국이, 최고사령관의 위신도 구겨진다.
더구나 서방 진영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켰다간 소련에서 곱지 않게 볼 터.
“안 그래도 이번 경기 취재한다고 따라온 기자들도 있는데……. 지금도 아주 신나게 펜을 휘갈기고 있겠네요.”
“도, 동무가 오해하는 거야. 납치 강요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했잖아요. 우리 팀 감독님이랑 선수들이 똑똑히 다 봤는데?”
“그, 그건…….”
저지른 게 있으니 변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완전히 끝장.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했다.
“동무 말대로 내 독단이지. 하지만 딱히 다른 욕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모두 공화국을 위해, 인민을 위해, 그리고 위대한 수령…….”
“꼭 엿 같은 짓을 하면서 거창한 명분을 들더군요.”
손연형이 이어서 할 말이 뻔한 레퍼토리였기에 준영은 확 끊어 버렸다.
“날더러 양놈들 틈에서 성공을 거둔 강철 같은 의지를 가졌다고 했죠? 그걸 잘 알면서 만만하게 봤습니까? 채찍과 당근이면 되는 망아지 새낀 줄 알았어?”
“큭……!”
“뻘짓 그만하고 빨리 보내 주시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새 되는 건 당신하고 그 잘난 공화국의 나부랭이님들이니까.”
결국 손연형은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는 보안국 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되돌아가는 준영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너무 얕보고 덤볐군.”
쓸 만한 놈을 포섭하겠다는 욕심에 눈이 멀었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나이가 젊고, 공 차는 재주밖에 없는 축구 선수라고 가볍게 봤다.
그래서 적당히 으르거나 꼬드기면 될 줄 알았건만!
지나치게 일이 시끄러워지지 않기를 바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
두클라 프라하는 창단한 지 겨우 10년도 안 된 젊은 팀이다.
거기다 11월 20일에 벌어진 1차전에서도 맨유에게 3-0 완패를 당했기에, 지나친 텃세만 아니면 어렵지 않은 상대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실제로 두클라 프라하에는 재능 있는 선수들이 많이 있었고, 1956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리그 정상에 올랐다.
그래서일까.
전반전 초반부터 경기력에서도 유나이티드보다 우위를 보였다.
‘이 녀석, 올드 트래퍼드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잘하는군.’
준영이 지금 경계하고 있는 상대 선수는 하프백인 요세프 마소프스트.
체격도 좋은 데다, 드리블과 패스도 뛰어났다.
거기다 위치 선정 능력도 좋아서 인터셉트도 상당히 잘했다.
“Josef! Josef! Josef!”
이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명 선수인지,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3만여 명의 관중들이 들썩이며 함성을 질렀다.
그런 그가 키 큰 동양인에게 채여 쓰러지자, 금방 야유와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제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군.’
상대가 만만찮기도 했지만, 준영은 물론 현재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몸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이건 토트넘전에 뛰지 않았던 일부 선수들도 마찬가지.
시차는 영국과 고작 한 시간 차이였지만, 장시간의 비행 여정으로 인한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지에 도착해서도 검색이니 뭐니 해서 제대로 훈련을 못했다.
‘거기다 부카니스탄 왕조 졸개도 한몫했지. 빌어먹을!’
그 포섭 미수 사건은 그리 시간을 끌진 않았지만, 스트레스는 잔뜩 받았다.
‘일정을 보면 이 경기 넘기고 다음 상대가 츠르베나 츠베츠다인데……. 거긴 괜찮겠지?’
FK 츠르베나 츠베츠다는 베오그라드에 연고를 둔 유고슬라비아 팀이다.
유고슬라비아도 사회주의 국가.
그래도 그들은 소련과 등을 진 데다,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원만한 편이라고.
‘그거보다 베오그라드 원정은 따로 신경 쓸 게 있잖아. 돌아오면서 뮌헨에서…….’
잠시 딴생각을 하던 준영은 요세프 마소프스트가 공을 몰고 들어오자 황급히 마크에 나섰다.
그래, 지금은 딴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상대는 결코 만만찮았으니까.
‘페인트 동작? 그럼 오른쪽으로……!’
예상과 다르게 가볍게 페인트를 건 요세프는 왼쪽으로 공을 치고 빠져나갔다.
낭패를 본 준영이 황급히 쫓아오자, 그는 중앙 쪽에서 쇄도하는 우군 선수에게로 패스를 보냈다.
공을 잡은 선수가 후려 찬 중거리 슛은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유나이티드의 골대 왼쪽 상단에 꽂혔다.
“Mila- an!”
“Dukla! Dukla! Dukla!”
전반 17분, 두클라 프라하의 선제골이 터졌다.
관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껏 환호성을 터트렸다.
“제길, 저 거리에서 들어가 버릴 줄이야.”
“밀란이라…….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로군.”
선제골의 주인공 밀란 드보르작은 준영이나 던컨 에드워즈와 비슷했다.
18세라는 젊은 나이에 리그 데뷔를 했고, 수비수였지만 하프백이나 포워드 포지션까지 소화 가능한 팔방미인이었다.
무엇보다 득점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1956시즌 두클라 프라하가 우승할 때 15골을 터트리며 공동 득점왕에 올랐을 정도.
그런 선수를 노마크로 두었으니 골을 먹을 수밖에.
“이미 먹은 실점은 어쩔 수 없어. 정신 차리고 동점 골을 뽑아내자고.”
“그래, 프라하 관광도 못했는데 경기까지 지면 Zola 억울할 거야.”
던컨의 말에 다들 피식 웃었지만, 준영은 아니었다.
훈련 때 종종 한국말을 내뱉긴 하지만, 하필 던컨 녀석, 배워도 저런 말을 배운단 말인가.
“던, 너 말 좀 가려서 해. 그거 별로 좋은 뜻은 아니다?”
“그래도 입에 짝짝 붙는걸.”
아무튼 던컨 덕에 실점으로 인한 낭패감이 풀렸다.
덕분에 반격에 나서는 준영과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발은 한결 가벼워졌다.
***
선제골을 터트린 두클라 프라하는 웅크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추가 득점을 노리겠다는 듯이 과감하게 유나이티드를 몰아붙이며 공세를 이어 갔다.
아니, 단지 과감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굉장히 거칠게 나왔으니까.
높은 태클과 거친 차징, 후려 찰 것처럼 높게 날리는 위협적인 발길질까지.
이렇다 보니 맨유 선수가 공을 잡으면 몇 초 뒤에 휘슬이 울리기 예사였다.
‘이놈들, 지금 군대식 전투 축구 하나.’
마침 두클라 진영에서 공을 가로챈 준영에게 상대가 뒤에서 태클을 날렸다.
“우왓!”
위험했다!
하마터면 한쪽 다리가 꼬인 상태에서 그대로 무릎이 돌아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도 당하지 않았던 위험한 파울.
이렇다 보니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만무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동업자 정신은 밥 말아 처먹었냐?”
“Co dělám špatně?”
준영이 상대 선수와 으르렁대고 있자, 주장 로저가 만류하고 나섰다.
“말려들면 안 돼. 저 녀석들, 우릴 자극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예, 압니다, 알아요.”
이미 맨체스터 원정에서 3 대 0으로 대패한 두클라 프라하는 이 경기를 반드시 이겨야 했다.
저들이 저런 거친 플레이로 견제하는 것도 결국 승리에 대한 조바심 때문일 터.
‘리드한 상황에서도 저러는 걸 보면 얼마나 똥줄이 타는지 알 만해.’
그만큼 유나이티드를 경계하고 있다면 마땅히 부응해 주는 것이 옳았다.
“그 타들어 가는 똥줄을 재로 만들어 주지!”
긴 소매를 걷어 올린 준영의 눈빛이 용암처럼 달아올랐다.
***
두클라 프라하는 실제로 군대 팀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천 상무 같은 팀이죠.
요세프 마소프스트의 경우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준우승까지 이끌며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나중에 스탠리 매튜스 은퇴 경기에도 참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