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70화 (70/400)

Round 70. 잘못된 만남

웅웅-

일부러 프로펠러에서 먼 자리에 앉았음에도 소음은 작지 않았다.

그나마 소음은 이어폰을 쓰고 노래를 들으면 조금은 낫다.

그럼에도 준영이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크악! 이 망할 흡연충 놈들!’

여기저기서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에 기내는 너구리굴을 방불케 했다.

승무원들은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승객이 원하면 담배를 주고 친절하게 불까지 붙여 줬다.

‘진짜 돈 많이 벌어서 전용기를 사든가 해야지!’

준영은 21세기에서 챙겨 온 방역 마스크를 쓰고 버텼다.

다행히 중간에 숨통을 틔울 기회는 있었다.

프라하로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 환승을 해야 하기 때문.

그렇게 비행기를 갈아타고 프라하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깐깐한 검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던컨의 소지품을 살펴본 검색요원이 컵라면을 들고 물었다.

저 녀석, 저걸 챙겨 왔던가.

준영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던컨은 태연스럽게 말했다.

“맛있는 겁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돼요.”

“속에 다른 게 든 건 아니고?”

영 수상했던지 검색요원은 컵라면을 하나 뜯어서 안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나 면 부스러기 말고는 나오는 게 없자, 그냥 통과시켰다.

다음은 준영의 차례였다.

“특이한 가방이군요.”

“바퀴가 달려서 끌고 다니기 좋죠.”

준영은 보란 듯이 캐리어를 열었다.

딱히 수상하다 싶은 물건은 없었지만, 정장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에 대해서 지적하고 나섰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보청기입니다.”

준영은 스마트폰에 대해 뻔뻔하게 둘러댔다.

하긴 네모난 모양에 이어폰이 연결된 모양새가 트랜지스터를 쓰는 최신형 보청기와 비슷해 보였다.

“음, 이렇게 얇은 보청기는 처음 보는데…….”

“비싼 겁니다. 고장 나지 않도록 해 주세요.”

고장 나면 너희들 책임이다.

그렇게 압박하는 준영의 태도에 검색요원은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청각이 좋지 않은데, 용케 축구 선수를 하는군요.”

“시력이 나빠도 사서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준영의 대꾸에 말이 궁색해진 검색요원이 바로 통과시키려 할 때였다.

갑자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오더니 준영을 둘러싸고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뭡니까, 이 사람들은?”

제복 사내들이 내보인 신분증을 본 검색요원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 보안국 사람들인데, 잠시 좀 조사할 게 있다고 합니다.”

“조사라고? 대체 뭘……?”

준영은 어이가 없었다.

보안국이라면 정보부 같은 데가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왜 자신을 찾는 걸까? 수상한 짓이라곤 하지도 않았는데.

‘잠깐, 이놈들, 설마 그 헛소문을 믿고 있는 건가?’

돌아가지 못할 곳, 공산 국가에서 온 망명자.

준영은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아마 공산 국가의 입장에서 준영은 제 발로 되돌아온 얼간이나 마찬가지로 보였을 터.

“이게 무슨 짓이요! 존은 법적으로 영국인이란 말이요!”

“잠깐이면 됩니다. 아주 잠깐.”

펄펄 뛰는 버스비 감독을 제지한 보안국 요원들은 준영을 데리고 갔다.

‘설마 이대로 북한으로 보내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영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하지만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까.

***

보안국 요원들은 준영을 멀리 데려가지 않았다.

그들은 공항 한편에 마련된 방에서 준영을 취조했다.

“존 Y. 리, 원래 이름은 이준영. 한국계 홍콩 시민권자 맞소?”

“그렇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보안국 요원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당신의 신상에 대해서 조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소.”

“누가 그런 요청을 한 겁니까?”

보안국 요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출입문 말고 사방이 꽉 막힌 방으로 인민복을 입은 동양인들이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중국인? 아니, 이억관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북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당신은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왔다지? Korean이라고 밝혔으니 그럼 북조선에서 왔다고 봐도 되겠소?”

“뭐라고? 하… 이봐요,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날 잡아 둔 겁니까?”

“수상한 건 사실이니까. 수상한 인물이 국내에 들어오는 걸 방지하는 게 우리 보안국의 일이요.”

보안국 요원은 보다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질문은 이쪽에서 하겠소. 당신은 불법 월경자로 의심받고 있으니 조사에 순순히 협조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대놓고 협박을 하다니!

화가 났지만, 지금은 침착하고 냉정해야 한다.

어차피 자신의 과거는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하는 걸 봐선 이놈들도 제대로 아는 건 없어. 분명히 찔러 보자는 심정으로 덤벼들었겠지.’

북한을 들먹인 걸 보면, 친북 국가답게 자신을 북한 쪽으로 몰아세우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분명히 취조하면서 뭔가 트집을 잡고, 그것으로 낙인을 찍으려는 수작일 터.

“다시 묻겠소. 스스로 한국계라 밝힌 당신은 어디에서 온 거요?”

일단 준영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부분만 이야기했다.

“내 고향은 대한민국의 화성이란 지역입니다. 수도인 서울 남쪽에 있는 곳이죠.”

“남조선이라고?”

중년의 동양인에게서 북한 억양이 강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뭔가 아쉬워하는 기색.

그러든 말든 준영은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보안국 요원이 건네는 물음에 집중했다.

“남한은 영국과 수교 중일 텐데? 그런데 어째서 돌아갈 수 없다고 한 거요?”

혹시 속이고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묻는 듯한 요원의 물음에 준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의 남한에 있는 정부의 성향은 내가 떠날 때의 체제와 다릅니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과 21세기 제6공화국은 같지 않다.

진실은 이랬지만, 보안국 요원들이나 동양인들은 엉뚱하게 해석하는 듯했다.

“떠날 때면… 미제의 군정 때였나? 아니면 왜정 시기였나?”

중년의 동양인이 건넨 물음에 준영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젊은이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왜 말이 없어? 날래 대답해 보라!”

‘역시 부카니스탄 새끼들 맞구만.’

상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준영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이보라, 말이 말같이 들리지 않은 거이야?”

젊은 북한 사내는 짜증이 났던지 다가와서 준영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에 준영은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 이런 간나…….”

“난 지금 이쪽의 조사에 응하고 있다. 그러니 지방 방송은 꺼 주시지.”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국 요원들도 북한인들을 만류했다.

준영의 말대로 자신들이 조사 중인데 끼어드는 건 합당하지 않으니까.

“실례. 다시 계속 묻겠소. 떠난 시기가 언제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어릴 때였고, 워낙 정신없던 시기였으니까요.”

보안국 요원은 중년의 북한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해방 이후의 혼란을 잘 알고 있었던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건 지나친 과장 같소만?”

“남이 처한 입장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쇼! 나도 돌아갈 수 있으면 벌써 돌아갔어!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쾅!

준영이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심이라 여기게 해 주려고 일부러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지만, 진심이 묻어 있기도 했다.

진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갔을 테니까.

아무튼 이런 격한 반응에 보안국 요원들이나 북한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Calm down. Answer your questi…….”

“하, 진정은 GR. 축구 하러 온 사람한테 이딴 식으로 대해? 축구에 정치가 관여하는 걸 FIFA가 금지하는 거 모르냐, 이 무개념 또라이 CVR 새끼야.”

“W, What?”

“너네 월드컵 출전 정지당하면 너네 국민들이 어쩔 것 같냐? 너희들 Joj대가리 잘라다가 프라하 광장에 걸어 놓는다는 데 1페니 걸어 줄게. 이 10 플러스 8넘들아.”

갑자기 준영이 한국말을 좔좔 쏟아 내자 보안국 요원들은 멍하니 북한 사람들만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인지 통역을 해 보라는 듯.

하지만 북한 사람들도 낯빛이 하얗게 변해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준영이 지금 기관총처럼 쏟아 내는 욕은 그들이 지금까지 들은 적도 없는 창조적인(?)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차마 그대로 통역하진 못하고 적당히 압축해서 알려 주었다.

“그게… 자신에게 이런 대우를 하면 좋지 않다는 의미였소.”

“든든한 뒷배라도 있는 건가?”

보안국 요원과 북한 사람이 체코어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준영도 진정한 기색을 보였다.

사실 너무 오버해서 내지른 게 아닌가 싶기도 했으니까.

‘나도 참, 협박한다고 이 상황이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아니, 잠깐!’

머릿속에 한 가지 번쩍 떠오른 게 있었다.

나름 쓸 만하다고 여겨진 그 히든카드는 바로…….

“당신들, 윈스턴 처칠 압니까?”

준영이 다시 말을 건네자, 보안국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지. 그런데 그 사람 이야기는 왜 하는 거요?”

“아, 별거 아니고. 지난번에 내 경기도 보러 오고, 같이 차도 마시고 진지하게 이야기도 나누었거든요.”

“…아는 사이라는 건가?”

“내가 꽤 맘에 든 모양이더라고요. 다음에 또 보자고 그러던데…….”

“잠시, 잠시 쉬도록 합시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일어난 보안국 요원들은 방에서 나갔다.

표정이 달라진 건 북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준영을 두고 밖으로 나간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처칠이라면 전직 영국 총리 아니오? 그런 자와 아는 사이라고? 허풍이 아닌가?”

“단순한 허풍이라 볼 수 없는 증거도 있습니다.”

보안국 요원들은 가방에서 신문 뭉치를 꺼냈다.

북한 쪽의 요청을 받아 조사하면서 입수했던 서방 신문들.

그중 영국 신문에 이준영이 처칠과 악수하는 사진이 떡 박혀 있었다.

“어, 이, 이건…….”

“알고 있겠지만, 현재는 물러났지만 처칠은 여전히 영국 정계에 영향력이 강합니다.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명사이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의 지인을 건드렸다.

더구나 법적으로 홍콩 시민, 그러니까 영국인인 사람을.

자칫하면 진짜 문제가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단순한 불법 월경자로 처리할 수 없는데 어쩔 겁니까? 함부로 손대거나 잡아 가두는 건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데?”

북한인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을 이어 갔다.

최근 영국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조선인 선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일을 진행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너무 고압적으로 군 게 문제가 아닌지…….”

“하! 이제 와서 우리에게 책임을 떠넘기시려는 겁니까? 불법 월경자 같다고 조사를 요청한 건 당신들이잖습니까!”

“그래도 좀 다독여 가면서 그랬어야지.”

“뭐라고? 조사하는 데 끼어들어 언성 높이고 어깨를 잡아챈 게 누군데!”

네가 잘못했다는 둥, 네가 먼저 그랬다는 둥.

양측이 책임을 전가하며 말다툼이 이어 가고 있을 때, 중년의 북한인이 만류하며 말했다.

“내가 직접 나서겠소. 달래 주면서 설득하면 협조해 줄지 모르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시작한 쪽이 마무리 짓는 게 나을 테니.”

아무리 국가 간에 돈독한 사이라지만, 이런 사고의 책임까지 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보안국은 공을 북한 대사관으로 넘겼다.

헛발질을 하든, 골인을 시키든 결과는 그들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

냉전 시대, 해외에서 남북 간의 포섭과 납치 시도가 꽤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프리카에 갔던 태권도 사범님이 북한 측 요원들에게 끌려갈 뻔하다 탈출한 사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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