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69화 (69/400)

Round 69.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

기분 좋게 4-3의 대역전승을 거둔 다음 날.

회복 훈련을 끝낸 후, 준영은 올드 트래퍼드 서쪽에 있는 트래퍼드 파크로 향했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업체들이 입주한 초거대 산업 단지였다고 한다.

운하를 기반으로 식품, 전자, 기계, 화학 등 다양한 산업들이 발전했다고.

‘군수 공장들도 많아서 2차 대전 때 독일의 폭격에 시달렸다던가.’

처음 알버트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전쟁의 폐허 같은 광경을 떠올렸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경기 호황 덕분에 공장들은 복구가 잘 되어 있었다.

7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이 공단에는 11월 초에 준영이 세운 회사도 있었다.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Mr. Lee Food Company)…….”

준영은 공장 입구에 붙은 현판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 이름을 추천해 준 사람은 알버트였다.

Mr. Lee가 Mystery와 비슷하게 발음되기에 그만큼 신비감을 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처음에 준영은 이 이름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재 개그스러워서 아니라, 실제 이철호라는 교포가 세운 식품 회사와 이름이 같기 때문.

다큐멘터리에서 본 바에 따르면 그는 1954년 노르웨이에 최초로 이민을 간 한국인이었다.

‘심지어 거기 간판 상품도 라면이었지.’

하지만 마땅한 이름이 없었다.

거기다 투자금을 대 주는 알버트나 보딩톤의 찰리 사장, 데이비드 브라운, 조셉 포스터도 괜찮은 이름이라고 해서 결국 미스터리로 정하고 말았다.

“이철호 씨, 나중에 반드시 보상해 드릴게요.”

실제 역사와 이름이 같은 이 회사에서도 현재 주력 상품은 치킨 누들, 인스턴트 라면이었다.

준영은 개발자 이억관의 이름으로 특허를 냈다.

그것도 일반 라면과 끓는 물에 불려 먹는 컵라면을 동시에 내놓았다.

“오셨습니까, 오너(Owner).”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30대 초반의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헨리 케일이라고 하는 이 남자는 현재 상무를 맡고 있었다.

알버트와 찰리 사장이 적극 추천을 해 줬을 정도로 싹싹한 사람이었다.

“생산은 어떻습니까?”

“나쁩니다. 아주 나빠요.”

헨리의 심각한 표정에 준영도 정색이 되었다.

“왜? 뭐가 문젠데요?”

관련 기술은 부사장을 맡고 있는 이억관이 전수를 다 해 줬다.

재료 배합이나 반죽, 튀김 등에 필요한 기구들도 기존 요리 업체에서 쓰던 것을 개조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설마 동양인 오너와 부사장 밑에서 일할 수 없다고 태업이라도 부리는 것인가?

“주문은 쇄도하는데, 생산 물량을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요.”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렇게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헨리는 이렇게 단기간에 대박을 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스파게티나 중국의 누들이 식도락가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일반 대중에게 아직 면 요리는 낯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나 간단한 조리와 익숙한 닭 국물 맛이 그 이질감을 극복해 버렸다.

거기다 맛도 좋은 데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더욱더 늘었다.

“당장 이 트래퍼드 파크의 노동자들에게도 인기 폭발이라고요. 홍차 끓이는 주전자로 얼마든지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거기다 식사 시간 단축도 되니까 말이죠?”

“예, 광부들도 보온 통에 물 담아서 컵누들 들고 갱도로 내려간다고 들었습니다.”

노동자뿐만이 아니다.

경찰, 기자, 사무원, 학생 등등.

시간에 쪼들리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라면은 혁명적인 요리였다.

그래서 순식간에 입소문을 탔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주문량은 괴물같이 늘어나고 있었다.

현재 공식적인 판로는 그레이터맨체스터와 그 주변 지역 정도.

하지만 현재 상승 추세로 볼 때 내년 상반기에 영국을 석권하고도 남을 거라고.

그래서 처음에 기쁨의 비명을 지르던 헨리와 임원들도 지금은 진짜 비명을 지르는 중이라고.

“하아, 저는 창업 초라서 좀 여유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이게 뭡니까!”

“알았어요. 열심히 하는 만큼 보너스를…….”

“그걸로 안 됩니다! 당장 고용과 규모를 확장하지 않으면 다들 파업을 일으킬 겁니다!”

헨리에게 잔소리를 실컷 들은 준영은 진땀을 잔뜩 쏟은 후에 개발부로 찾아갔다.

하지만 개발부는 텅 비어 있었다.

이곳에서 몇몇 직원들과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던 이억관도 밀가루를 하얗게 쓴 채 생산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헨리가 말한 대로 주문은 쇄도하는데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

“여, 이 군 왔나.”

“안녕… 하시냐고 해야 하나요?”

“잔말 말고 거기 밀가루 포대 나르는 것 좀 거들게.”

오너까지 거들어야 할 판이란 말인가!

결국 준영도 억관과 마찬가지로 밀가루투성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 땀을 쏟은 뒤, 휴식 시간에 이억관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닥치고 확장하게.”

“예, 원래 그럴 계획이었지만, 이렇게 이르게 진행해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아니래. 자네가 잘될 거라 말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그 바람에 억관은 원래 운영하던 식당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아내 혼자서 변변찮게 운영하느니, 그냥 여기 일을 거들게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그럼 사모님은?”

“저쪽에서 면 튀기는 작업을 같이하고 있지.”

“그랬군요. 그런데 신제품 개발은 어떻습니까?”

“자네가 힌트를 준 대로 4개를 진행하고 있지. 토마토 스파게티 맛, 카레 맛, 자장 맛, 그리고 불닭 맛.”

불닭이라고 해서 진짜 21세기의 그 불닭은 아니다.

이 시대에 그 핵폭탄을 내놨다간 당장 음식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을 터.

그래서 실제론 영국 사람들 입맛에서 좀 매콤한 닭고기 라면 수준이었다.

“비벼 줄 양념을 추가하는 거니 어렵지 않지. 분말 스프 만드는 것도 나보다 여기 공장에 있던 기술자들이 더 잘하더군.”

영국 요리가 악명이 높다지만, 식품 가공 관련 기술은 우수한 편이었다.

이미 19세기부터 통조림을 양산했고, 페트병이라 알려진 플라스틱 용기를 만든 것도 이곳 맨체스터의 과학자들이었다.

“근데 그렇게 급하게 신제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나 싶더군.”

“지금이야 잘 팔리지만, 하나밖에 없으면 질리게 될 테니까요.”

맛있는 것도 계속 먹다 보면 물리는 법.

그건 어제 토트넘전에 맞춰 올드 트래퍼드에 1호점을 연 미스터리 치킨(Mr. Lee Chicken)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준영은 프라이드치킨뿐만 아니라, 인도인 요리사도 영입해 탄두리 치킨과 한국식 양념 통닭 삼총사의 구도를 만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닭 장사는 어땠나?”

“완판이었죠. 경기 끝난 후에도 손님이 계속 몰려왔어요.”

“그렇겠지. 나도 차이나타운에서 이런저런 튀김 요리를 먹어 봤지만, 그렇게 고소하면서 느끼하지 않은 맛은 진짜 처음이었어. 대체 어디서 그런 비법을 배운 건가?”

“백씨 성을 가진 요리사가 하는 걸 봤죠.”

빵가루와 전분을 이용한 바삭한 튀김옷, 두 번 튀기는 기법, 튀김 표면에 바르는 매콤한 양념, 느끼함을 씻어 주는 무절임 등등.

전부 프랑스에 있을 때 유튜브로 배운 레시피와 기법들이다.

무려 70여 년 동안 발전해 온 노하우가 담겨져 있으니, 1950년대 사람들에겐 충격적일 수밖에.

‘앞으로도 계속 장사하려면 재료 공급을 안정적으로 해야 돼. 그래서 이 공장이 중요하지.’

지금은 라면을 만드느라 바쁘지만, 준영은 앞으로 여러 가지를 생산할 생각이었다.

고추장이나 간장 같은 양념은 물론 당장 영국 사람들이 즐겨 찾을 마요네즈나 식초, 케첩, 드레싱 소스 등등.

“아 참, 곧 외국으로 원정 경기를 하러 간다면서?”

억관은 뒤늦게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네, 유러피언 컵 경기 때문에 체코에 다녀올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거긴 공산 국가 아닌가.”

“그렇긴 한데, 축구에 사상이나 정치는 장벽이 안 되거든요.”

준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억관은 염려를 거두지 못했다.

“이 군, 자네가 지난번에 말했지? 장차 큰일을, 조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이야.”

“그랬죠.”

그게 체코에 다녀오는 것과 상관이 있나?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준영에게 억관이 주의를 주었다.

“자넨 법적으론 홍콩 시민이지. 그래도 공산 국가를 다녀왔다고 하면 한국에서 좋지 않게 여길 수도 있어.”

“그게… 반공이 국시라서 말입니까?”

“그래, 공산당 정권과 전쟁을 했으니 당연하지 않겠나.”

더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현재 북한과 수교를 맺은 국가였다.

그들은 한국 전쟁 전부터 건설, 교육, 의료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북한 정권을 지원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뒤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북한에 군사 원조를 했다고.

“그놈들,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들어가 놓곤 전혀 중립을 지키지 않고 북한 편만 들었지.”

‘친북 국가라 이거군.’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한 준영에게 억관은 거듭 주의를 주었다.

“혹시 거기서 동포를 만나게 되면 거리를 두도록 하게. 분명히 북쪽에서 온 자들일 테니.”

‘북한 사람이라…….’

그 철의 장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기라도 할까.

아무튼 준영은 지금이 냉전 시대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사장님, 부사장님! 그만 빈둥거리시고 일 좀 도와주세요!”

다시 작업을 시작한 직원들의 성화에 준영과 억관은 다시금 분주하게 움직였다.

냉전 시대라지만, 지금 이 공장에선 자본가도, 노동자도 구분이 없었다.

그저 다 같이 땀 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뿐.

***

“존 Y. 리의 뒷조사를 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MI6의 제이미 번즈는 최근에 부하가 전달한 정보에 살짝 눈을 치켜떴다.

혹시나 자신들 말고 냄새를 맡은 놈들이 있는가 싶었기 때문.

“어느 나라지? 설마 소련인가?”

존 Y. 리의 정체가 사실이라면,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지금 허더스필드의 애S턴 마틴 공장에 있는 자동차와 비교도 안 된다.

그러니 동토의 불곰들이 접근하는 것은 탐탁지 않을 수밖에.

그렇지 않아도 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프라하 원정을 떠난다고 하니 좀 걱정이 되었다.

거기서 자칫 존 Y. 리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소련은 아닙니다. 일본인들입니다.”

“그래? 그놈들도 혹시 ‘기밀’을 알고 덤비는 건가?”

“기밀을 알고 있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주로 존 Y. 리의 과거에 대해 캐내려 애쓰더군요.”

부하의 말에 번즈는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조사한 정보들이 맞는다면, 일본인들은 과거가 전혀 없는 사람의 과거를 찾는 셈이었으니까.

“근데 그놈들이 왜 그걸 찾지?”

“자기네와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는 듯했습니다. 일종의 자긍심 고양 목적으로요.”

“헛짓거리를 하는군.”

“근데 일본 대사를 거들고 있는 놈의 내력이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왜, 어떤 놈들인데?”

“그들은…….”

부하에게 대답을 들은 번즈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 망령이 다시 나타났으므로.

***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생산한 업체는 안도 모모후쿠가 세운 일본의 닛신 식품인데, 이 소설 세계에서는 준영이 때문에 사업도 하기 전에 접게 생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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