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68. 악몽 같은 결과
“아악! 또 먹었다.”
“저 애송이 골키퍼 자식, 공도 제대로 못 잡나!”
토트넘이 다시 두 골 리드해 나가게 된 상황.
울상이 된 가스켈은 허탈해하는 팀원들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공이 너무 강해서 손에서 그만 미끄러졌어요.”
“얀마, 그래서 내가 장갑 끼라고 했잖아!”
준영의 핀잔에 가스켈은 더욱더 면목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준영은 한 달 전부터 골키퍼들에게 고무가 발린 장갑을 나눠 줬다.
레이 우드는 종종 썼지만, 가스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끼고 보니 손이 갑갑하고 둔하게 느껴졌기 때문.
“장갑 준 거 어쨌어?”
“그게… 옆집에 사는 배관공 아저씨에게 쓰라고 줬어요.”
“어이구!”
준영은 가슴을 쳤다.
정작 상대편 골키퍼는 잘 쓰는데, 우리 편은 이러니!
‘아마 경험 차이 때문이겠지.’
오늘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이슬비가 살살 내리고 있었다.
필드가 진창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평소보다 공이 훨씬 미끄러워질 정도는 되었다.
36세 노장 골키퍼 테드 디치번은 이 점을 알았기에 장갑을 끼고 나왔으리라.
“생각하면 공만 미끄러운 건 아니지. 필드의 잔디도 마찬가지야.”
“잔디는 딱히 미끄럽지 않은걸?”
동의하지 못하는 던컨에게 준영은 설명을 덧붙였다.
“뛰는 덴 문제없지. 하지만 잔디에 묻은 물기 때문에 패스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는 거야. 마치 기름칠을 한 것처럼!”
“아, 그래서 토트넘의 패스가 예전보다 더 빠르게 느껴지는 거로군.”
21세기에서는 필드에 물을 뿌려 놓는 건 홈팀의 전술이기도 했다.
특히 스피드와 패스 워크가 좋은 팀에게는 적당히 물을 먹은 필드가 경기하는 데 유리했다.
“이미 먹은 골은 어쩔 수 없어. 어떻게든 만회하는 수밖에.”
“프라하 원정이 코앞인데, 엄청 힘든 경기가 되겠구나.”
12월 4일 맨유는 유러피언 컵 경기가 있었다.
상대 팀은 체코슬로바키아 리그 우승팀인 두클라 프라하.
이미 11월 20일에 벌어진 1차전 홈경기에서는 3-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원정 경기는 함부로 낙관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상대 팀은 철의 장막 너머의 공산 진영에 있으니까.
‘두클라인지 세클라인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닭집부터 잡아야 해.’
준영은 스코어보드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다행히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이른 시간에 다시 추격 골을 만들 수만 있으면 분위기를 돌려놓을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는 빠르고 쉽게 갈 수 있는 수단이 있지!’
최전방의 트윈 타워인 리암과 숀.
한 명만 있으면 너무 단조로워질 수 있지만, 장신 2명이라면 수비를 어느 정도 분산시킬 수 있었다.
중요한 건 2선에서 제대로 지원을 해 주는 것.
그 지원은 준영과 던컨의 몫이었다.
“가자, 던! 우리 패스 워크도 토트넘에 못지않다는 걸 보여 주자고!”
“물론이지!”
이미 팀에서 공인된 단짝 콤비.
준영과 던컨은 능숙하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토트넘 진영으로 넘어갔다.
“훗, 애송이들이 이제 발동이 걸렸나 보군.”
“예열되기 전에 꺼 버리자고.”
토트넘 하프백들이 빠르게 저지에 나섰다.
바비 찰튼을 달고 있는 대니 블란치플라워도 재빨리 수비로 전환했다.
“쉽게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이크!”
공을 잡은 준영은 대니가 마크를 걸어오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날카롭게 들어온 인터셉트.
조금만 늦었더라도 먼치킨에게 공을 빼앗겨 버렸을 것이다.
“발재간이 좋다며? 어때? 일대일 해 보겠나?”
대니의 제안에 준영은 근처에 있는 바비 찰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저놈에게 공을 건네고 리턴 패스를 받을 속셈인가?’
자기 팀에서 흔한 수법.
대니가 바비의 움직임에 신경 쓴 그 순간, 준영이 과감하게 치고 나갔다.
그것도 대니의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면서.
“이 자식, 페이크였냐!”
대니는 황급히 준영을 쫓아갔다.
준족을 가진 그였기에 추격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수비진에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공간을 저렇게 내주면 어떡해!’
리암은 골대 가까이 파고들고, 숀은 준영을 마중 나오듯이 외곽으로 빠졌다.
그런 두 공격수의 움직임을 수비수들이 쫓아가다 보니 정작 중앙이 훤하게 뚫리고 만 것이다.
‘안 돼. 이 이상 돌파를 허락했다간 위험해진다!’
대니는 거칠게 발을 걸었다.
파울이나 다름없는 마크에 준영의 몸이 휘청였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공은 뒤에 흘리고 말았는데, 마침 뒤따라오던 던컨이 잡아 슈팅을 날렸다.
뻐엉-!
호쾌하게 날아간 무회전 슛.
하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테드 디치번의 손을 맞고 튕겨 나갔다.
“우와, 위험했다.”
“던컨 에드워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토트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슈팅.
비록 골로 연결되진 못했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움찔한 토트넘 쪽에서 함부로 전진해 오지 못한 것.
‘좋아, 흐름은 넘어왔다!’
준영은 토트넘이 이제 잠그기를 시전할 거라 보았다.
3골을 만드는 동안 그들도 아무런 손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상당히 많이 움직였고, 그만큼 체력을 소모했다.
그러므로 이제 닫아 잠그면서 2골의 리드를 지키려 할 터!
“겁먹지 마! 물러서지 말고 앞으로 나가란 말이야!”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이 꽉 물고 뛰어!”
토트넘의 수석 코치 빌 니콜슨과 대니 블란치플라워는 선수들을 계속 독려해 나갔다.
하지만 점점 발이 무거워지고 있는 토트넘 선수들은 이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맨유 선수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후반전 중반부터는 그들은 과감하게 전진해 나갔고, 볼 점유율을 점점 높여 갔다.
당연히 공격할 기회도 늘었다.
“측면! 왼쪽 측면의 공간을 활용해!”
“공중전은 우리가 우위다! 망설이지 말고 크로스를 올려!”
멧 버스비와 지미 머피도 쉴 새 없이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에 가장 부응한 것은 재키 블란치플라워.
전반의 실책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던 그는 공격의 흐름이 만들어지자, 적극적으로 전진해서 빈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던컨의 크로스를 숀이 헤딩으로 떨궈 준 패스가 그에게 연결되었다.
‘찬스!’
“어서 막아!”
동생이 잡은 절호의 찬스를 본 대니가 비명 지르듯 외쳐 댔다.
수비수들이 황급히 몰려오고, 골키퍼 테드 디치먼도 잽싸게 각을 좁혔다.
하지만 재키는 슈팅을 하지 않고 슬쩍 공을 흘려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리암 휄란의 발에 맞고 골대로 들어갔다.
“나이스 골!”
“역시 그냥 주저앉을 리 없다니까!”
답답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홈팬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할 수 있다!
동점, 역전 골을 노릴 만큼의 시간이 충분히 있다!
추격의 불씨를 다시 살린 맨유 측의 활발한 분위기와 달리, 대니를 비롯한 토트넘 선수들의 표정은 무거운 납덩이처럼 변했다.
‘젠장, 느낌이 좋지 않군.’
초조하고 답답해지는 마음에 대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먹구름이 짙어진 하늘에선 점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
분위기는 다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로 넘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토트넘은 이를 견제할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역습을 하려 해도 체력은 거의 바닥.
거기다 패스를 풀어 줘야 할 대니 블란치플라워도 바비 찰튼의 마크를 쉽사리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악재가 또 하나 있었다.
“남은 시간은 수비에 전념하는 게 낫지 않나?”
지금껏 가만히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토트넘의 감독 지미 앤더슨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 된 수프에 살포시 스푼을 얹는 그의 행태에 빌 니콜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간 유나이티드에게 기회만 줄 뿐입니다. 최선의 수비는 최선의 공격인 겁니다!”
“그거야 말이나 그런 거고, 체력도 없는데 괜히 역습을 노리다가 빈틈을 보이면 그게 더 큰일 아닌가?”
“지금 상대하는 건 버스비의 악마 같은 애새끼들이라고요! 내려앉는다고 해서 막아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토트넘 코칭스태프의 분란.
니콜슨 코치가 보수적인 감독과 싸우는 사이, 선수들은 계속 소극적인 플레이로 일관하고 있었다.
선수들을 독려하고 활로를 열어야 할 주장도 제대로 활약을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상대 선수나 볼을 보기보다 스코어보드의 시계로 자꾸 눈길을 주곤 했다.
당연하지만, 경기 중에 자꾸 딴눈을 팔면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
맨유는, 그리고 준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재키가 건네준 패스를 슬쩍 흘리고 지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공을 잡은 던컨이 문전으로 침투하는 준영의 발 앞으로 패스를 찔러 넣었다.
절묘한 삼각 패스!
이어지는 준영의 슈팅도 그에 걸맞게 아주 기가 막혔다.
황급히 전진한 키퍼의 키를 넘는 칩슛으로 골대에 집어넣은 것이다!
홈팬들은 또 한 번 폭발했다.
“우와, 방금 뭐냐!”
“뭐긴! 저게 바로 예술이지!”
예술 같은 동점 골.
악마 같은 버스비의 아이들은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
“이런 맙소사…….”
대니 블란치플라워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인도 그 과정을 보고 감탄했을 정도로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골이었다.
문제는 그게 동점인 데다, 그 이상의 충격을 토트넘에 안겨 주었다는 점이다.
“저런 골은 처음 봤어.”
“진짜 악마가 따로 없군!”
악마의 소행.
예로부터 설명하기 힘들 때 내놓던 핑계다.
그만한 핑계를 댈 정도면 ‘어쩔 수 없다.’라고 여기게 마련.
이런 체념은 남아 있는 사기까지 증발시켜 버렸다.
‘승리는… 물 건너갔군.’
여기서 경기를 끝내는 게 최선이다.
끝까지 독려하던 대니나 니콜슨 코치도 그리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토트넘과 달리 기세가 오른 맨유는 무승부로 끝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한 골 더 남았다! 역전으로 가는 거야!”
“For victory-!”
“얼마 안 남았다! 염통이 터져라 뛰어!”
기세가 오른 유나이티드의 젊은 선수들은 멈출 줄 몰랐다.
서로 독려해 가며, 겁먹은 상대를 몰아붙여 공을 빼앗고 찬스를 만들어 냈다.
그 화산 같은 기세는 이미 맥 빠진 토트넘의 수비로 막아 내기 힘들었다.
“때려, 던!”
아크 서클 앞에서 데이비드 펙의 패스를 받은 던컨.
그는 상대 수비수들과 몸싸움을 하는 준영을 보고 곧장 슈팅을 날렸다.
마치 쐐기처럼 수비진을 쪼갠 준영은 몸을 숙였고,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슈팅이 미사일같이 날아갔다.
몸을 날린 테드 디치번이 공을 잡았지만, 너무나 강했던 슈팅은 그 저항을 무시하고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역전! 역전 골이 터졌습니다! 정말 드라마틱하게! 유나이티드가 마지막에 승리를 거머쥡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의 흥분은 올드 트래퍼드의 관중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백, 수천 개의 모자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중에는 흥분한 누군가가 집어 던진 컵라면과 닭다리, 맥주 캔들도 끼여 있었다.
“United! United! United!”
어찌나 분위기가 과열되었는지, 심판이 잠시 경기를 중단시킬 정도였다.
“악마 같은 새끼들.”
허탈한 표정의 대니 블란치플라워는 의기양양하게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는 맨유 선수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다니, 아니 그 고기에게 도리어 잡아먹히다니!
이 악몽 같은 결과는 정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저 지미 앤더슨 감독은 나중에 결국 퇴출당하고 빌 니콜슨이 정식 감독으로 부임합니다. 그리고 1960-1961년 시즌에 더블 우승을 차지하지요. 그리고 이후로 현재까지 우승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