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65. 프라이드 오브 아시아
1957년 10월 19일.
주중 FA컵 경기에 대비해 주전 절반을 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대는 포츠머스였다.
최근 내리 4연패에 순위도 17위에 머물러 있는 포츠머스는 예상과 달리 과감하게 강공으로 나섰다.
그 결과 전반 6분 만에 스코틀랜드 공격수 재키 핸더슨이 선제골을 터트리며 앞서갔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만.’
준영은 오늘 경기에 빌 포크스와 20살의 신참 피터 존스와 함께 최종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하프백들이 중원에서 고전을 하고 있었기에, 종종 전진해서 공격 지원에 가세했다.
그때마다 포츠머스 진영에선 디킨스라는 덩치 큰 선수를 전담 마크로 붙이곤 했다.
“체격 좋구만. 헬스했냐?”
“럭비를 했지.”
전직 럭비 선수답게 디킨스는 상당히 거칠었다.
준영이 공을 잡든 그렇지 않든 중앙선만 넘어오면 냉큼 접근해서는 들소처럼 밀어붙이곤 했다.
‘이 녀석이 나에 대한 포츠머스의 대비책인가?’
하긴 그동안의 활약이 알려졌는데, 상대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나서진 않았을 터.
지금도 4만에 가까운 관중들 속에는 다음 라운드 팀들이 보낸 전력 분석관들이 자리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지금은 이 녀석을 떨쳐 내는 게 먼저… 커억!’
동료가 건넨 패스를 받는 순간,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황급히 달려든 디킨스가 무릎으로 등을 찍은 것.
준영의 몸이 그대로 필드에 엎어졌다.
“우-! 우우우!”
관중들의 야유와 심판의 구두 경고에도 디킨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으, 저 꼴통 새끼!”
“괜찮나, 존?”
깜짝 놀란 버스비 감독은 라인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준영은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다행히 가격당한 곳이 등뼈 쪽이 아니라 옆구리 부분이었으므로.
‘젠장, 그래도 너무 아픈데.’
피멍이 들었는지 등에서는 계속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움직여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 준영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요, 이준영 선수!”
“할 수 있다고!”
관중석에서 날아드는 외침 속에는 희미하게 한국말이 들려왔다.
‘누구지? 억관 아저씨도, 필립이도 아닌데……?’
누구든 상관없다.
여기까지 응원하러 와 준 사람의 성원에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을 내라, 이준영!’
스스로를 채찍질한 준영은 이어진 공격에 바로 가세했다.
상대 수비수들의 대응은 이전 경기보다 훨씬 빠르고 거칠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준영의 집중력은 더욱 높아졌다.
접근해 온 디킨스를 알까기로 제쳐 버리고, 최전방에 있던 숀 코너리와 일대일 패스를 주고받으며 골대로 돌진했다.
상대 골키퍼가 황급히 간격을 좁혔지만, 살짝 공을 띄워 올려 제쳐 낸 다음, 헤딩으로 골문 안에 구겨 넣었다.
“Goooooooal-!”
전반 막판에 터진 동점 골.
혹시 하위권 팀에게 덜미를 잡힐까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홈팬들이 쌍수를 들고, 모자를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
“Lee! Lee! Lee!”
“그래, 그래! 내가 넣었다! 이것도 똑똑히 기억하라고!”
환호하는 관중들 앞으로 달려간 준영은 유니폼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쳤다.
환호성으로 가득 찬 올드 트래퍼드 필드에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였다.
***
“이것 봐. 존이 또 골을 넣었다!”
런던에 유학 중인 동양인 학생들은 신문의 스포츠란을 보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요즘 그들은 주말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주로 듣는 건 맨체스터 방면의 방송사에서 중계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
그 팀에 현재 소문이 자자한 동양인 선수 존 Y. 리가 뛰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영국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는 실력이라니!”
“그래서인지 요즘 백인들도 동양인을 보는 눈이 약간 달라진 것 같더라고.”
교내 스포츠클럽에 몸담는 학생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황인은 열등하다고 주절대는 부류들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변하고 있었다.
체격이나 실력 모두 월등한 존 Y. 리라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뭐, 그래도 ‘너는 존 Y. 리가 아니다.’라며 거절하는 놈들이 있지만 말이야.”
“하하하, 넌 나보다도 작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쳇! 나도 발재간은 존에 못지않을걸?”
그렇게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스타플레이어를 두고 한참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누군가 민감한 말을 들먹였다.
“근데 존 Y. 리는 대체 어디에서 온 거야?”
“홍콩 출신이라던데.”
“아냐. 본인은 조선에서 왔다고 하더라고.”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나 봐.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왔다니까 말이야.”
동양인 학생들은 일부 신문에서 떠드는 존 Y. 리 백인 혼혈설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었다.
백인 우월주의나 인종주의에 찌든 자들이 지어낸 시시한 낭설이라고 봤던 것.
“이봐, 신문에 난 사진을 봐도 동양인이잖아! 성이 이(李)씨인 걸 보면 조상은 틀림없이 중국인일 거야.”
“맞아.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왕족이라던데, 당나라를 세웠던 농서 이씨일지 모르지.”
“그게 아니라도 조선은 우리 중국의 형제 나라니까…….”
이렇게 중국 유학생들은 준영을 중국인 혹은 중국 혈통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그 와중에 일본인들도 존 Y. 리 일본인설을 주창하고 있었다.
“이런 비범한 실력을 가진 선수가 열등한 지나인이나 조센징일 리 없지.”
“그럼 왜 조센징이라 자처하는 거지? 경기장에서 남조선 깃발도 흔들었다던데?”
“흥, 35년 동안 내선일체였는데 일본계 조선인이 없을까 봐?”
“따져 보면 조선인이 저만한 기량을 갖추게 된 것도 다 우리 일본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일본인들은 중국인들보다 훨씬 더 준영의 활약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재영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존 Y. 리, 리준욘과 이 왕가(李王家)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해 보라고?”
주영 일본대사 니시 하루히코는 본국에서 날아온 훈령을 살펴보고 있었다.
“귀족 제도가 폐지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왜……?”
고개를 갸웃하는 그에게 비서가 그럴 만한 이유를 댔다.
“리준욘을 리키도잔(力道山)처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과연, 그럴듯하군!”
역도산 모모타 미쓰히로.
그는 스모 선수 출신의 프로레슬링 선수로 링에서 미국 레슬러들을 때려눕히며 일본인들에게 패전의 아픔을 씻어 내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정체는 함경도 출신의 한국인 김신락.
본인이 일본에서 성공하려고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겼기에, 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아니, 안다 해도 언급할 이유가 없다.
일본인에게 다시 자긍심을 안겨 준 인물이 사실은 조센징이더라고 알려지면 그 얼마나 허탈할 것인가.
“하지만 리준욘은 스스로 조선인이라 떠벌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일본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오히려 낭패일 수 있어.”
“윗분들은 흥아론(興亞論)적인 입장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서구에 맞서 아시아를 일으키자.
이건 탈아론(脫亞論)을 부르짖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한때 신봉했던 이론이다.
이는 훗날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뭉쳐 서구 열강을 물리치자는 대동아공영권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대동아공영권은 실패했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리 일본은 다시 일어설 겁니다. 훗날 서구 세력과 맞서기 위해서는 아시아에 영향을 돈독히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리준욘은 그렇게 아시아인들을 단합시키고 자긍심을 심어 줄 구심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리더로서 리준욘의 후원자가 된다……. 확실히 괜찮은 발상이야.”
“그러기 위해서 더욱 리준욘이 우리 일본과 연관이 있음을 밝혀내야 합니다!”
다행히 리준욘은 왕족을 자처했다고 한다.
이 왕가가 조선 귀족으로 일본의 우대를 받고 황족들과도 혈연을 맺었으니, 그 일원인 리준욘도 일본에 대해서 그리 나쁜 감정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자가 말했다지. 자신은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왔다고.”
“예, 남조선의 대통령이 이 왕가의 입국을 불허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내심 조선에 대한 원망감도 있을지 모르겠군.”
그럼 조선인 리준욘이 아니라, 일본인 리노이에 토시나가(李家俊永)가 되어 주지 않을까?
니시 하루히코는 자신들만을 위한 행복 회로를 돌려 대며 김칫국을 들이켰다.
떡 줄 사람은 전혀 생각도 없다는 걸 모른 채.
***
11월의 마지막 날 토요일.
살짝 이슬비가 뿌려지는 가운데, 응원 머플러를 두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올드 트래퍼드로 모여 들었다.
“오늘 상대가 토트넘 핫스퍼였지?”
“옛날엔 별 볼 일 없는 팀이었는데, 언제 저렇게 컸는지…….”
현재 중위권에 있는 토트넘은 같은 북런던 팀 아스날에 비해 오랫동안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다 1950년 퍼스트 디비전으로 승격했고, 그다음 해 우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51-1952시즌에는 아깝게 준우승을 하고 말았는데, 그때 토트넘에게서 우승컵을 빼앗아 간 팀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로 버스비의 아이들이 최초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해였다.
“런던에서 온 닭들이 사납지 않았으면 좋겠군.”
“쉽진 않겠지만, 지금 전력이면 충분히 닭을 잡고도… 어? 이 냄새는 설마?”
관중들은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푸드 코너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뭘 파는 거지?”
“아, 이 냄새는 치킨 누들이잖아!”
“누들?”
“몰라? 너 아직 못 먹어 봤어? 쯧쯧, 얼마나 맛있는데.”
가늘고 꼬불꼬불한 밀가루 튀김을 따끈한 닭고기 수프에 담근 요리.
낯익은 맛에 생소한 식감을 가진 음식이었다.
“오늘같이 쌀쌀한 날에 든든하게 챙겨 먹기 딱 좋지.”
“저거 요리하는 거 맞아? 그냥 종이컵에 담아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는데?”
“냄비에 끓여 먹는 것도 있는데, 저렇게 뜨거운 물만 부어서 불려 먹는 것도 있더라고.”
간단한 데다 맛있고, 값도 싸다!
하지만 사람들이 노상에서 나무 포크로 컵라면을 먹는 건 단지 그 때문은 아니었다.
“하하핫, 닭 잡는 날에 닭고기 요리라! 딱 좋구만!”
“치킨 누들도 맛있지만, 이 닭고기 튀김도 정말 근사해!”
“이거야말로 천국의 맛이군!”
“아, 영원히 입에서 씹고 있었으면 좋겠다.”
푸드 코너에서는 컵라면뿐만 아니라 다른 닭고기 요리도 팔았다.
미국식 프라이드치킨에 인도식 탄두리 치킨, 그리고 한국식 양념 치킨까지.
가격이 좀 비싸긴 해도 요즘 식도락에 관심이 많은 영국인들의 호기심과 입맛을 자극하기에 딱 좋았다.
거기다 치킨 요리는 요즘 시원한 맛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보딩톤 맥주와도 정말 딱 맞았다.
“이봐, 언제까지 먹을 거야? 이러다 경기 시작하겠어!”
“잠깐만, 이것만 마저 먹고!”
1957년 11월 30일.
대서양 너머에서 샌더스 대령이 한창 KFC를 키우고 있을 때, 맨체스터에서도 치맥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
프라이드(Pride)인지 아니면 프라이드(Fried)인지. ^^;
아무튼 알아보니 영국도 1950년대부터 양계 산업이 크게 발전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국에 노동 이민 가신 분도 양계장 병아리 감별사를 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