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64화 (64/400)

Round 64. 작은 촛불

이억관의 식당은 오늘도 대호황이었다.

나날이 손님이 늘다 보니, 가게를 확장하라는 조언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억관은 그러는 대신에 이웃한 중국 레스토랑에 자신의 탕면 레시피를 알려 주었다.

“덕분에 인심은 얻었지만, 아무래도 손해를 본 것 같아요.”

아내의 말에 억관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식당이나 넓히자고 만든 게 아니오. 이 군이랑 나는 좀 더 큰 목표가 있소.”

“이 군이라면 그 키 큰 축구 선수 말이죠? 그 사람, 요즘 정말 유명하더라고요.”

영국 축구 리그의 유일한 동양인 선수라 허더스필드에 있을 때도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고 더 유명해졌다.

더구나 실력까지 빼어나서 영국인들도 감탄할 정도.

지난번 아스톤 빌라전이 끝난 직후에는 윈스턴 처칠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찍혀 맨체스터 가디언에 실리기도 했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윈스턴 처칠이라니!

억관은 그 신문을 보고 가슴을 채우는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기분을 조국의 동포들도 나누면 좋으련만.’

런던의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본국에서는 루머로 여긴다고.

축구 종주국에서 한국 선수가 대활약을 하고 있단 말이 너무 거짓말 같았기 때문.

“근데 여보, 그 사람, 정말 한국인이 맞아요?”

“당연하지! 신문에 태극기가 괜히 실린 줄 알아?”

“하지만 홍콩 국적이라면서요? 사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일 거라고 하던데…….”

“뭐라고? 아니, 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너무나 엉뚱한 소리에 억관은 저도 모르게 버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아니, 왜 나한테 화를 내요? 나도 들은 이야기라고요.”

“다 헛소문이야. 이 군은 틀림없는 한국인이라고!”

억관도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준영의 활약에 희열을 느끼는 건 알고 있다.

국적을 떠나 같은 아시아인이니까.

하지만 남의 떡이 커 보이니 뺏어 먹겠다고?

억관은 그 떡을 나눠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특히 원수 같은 일본 놈들과는 더더욱.

***

“하아… 이게 시제품이라고?”

준영은 조셉 포스터가 만들어 온 골키퍼 장갑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과 달리 반응이 좋지 않자 조셉은 진땀을 흘렸다.

“형님이 알려 준 대로 장갑 손바닥 쪽에 라텍스, 고무를 입혔는데… 이게 아닌가요?”

“응, 아니야.”

준영은 노팅엄과의 시합에서 레이 우드가 맨손으로 슛을 막다 실점을 한 것을 보고 골키퍼 장갑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조셉에게 주문을 했는데, 영 엉뚱한 물건이 나오고 말았다.

‘나한테 견본이 없어서 설명으로 때웠다지만… 그래도 공사판 목장갑을 만들어 오냐.’

천 장갑 손바닥 부분에 고무를 코팅한 제품.

이게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 고무 색깔까지 빨간색으로 똑같았다.

“살인마가 쓰던 것 같아.”

구경하고 있던 앤지의 말에 조셉은 더욱 무안함을 느꼈다.

언뜻 보니 정말 잭 더 리퍼(* 19세기 영국의 연쇄 살인마)가 쓰던 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으므로.

“그래도 맨손으로 공을 잡는 것보단 낫겠네.”

“예, 다음엔 더 제대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추욱 풀이 죽은 조셉의 모습에 준영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완전 실패작은 아냐. 이대로 시장에 내놓으면 불티나게 팔릴 테니까.”

“예? 이 살인마 장갑이요?”

“건설 현장이나 광산에서는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고 싶어 하니까. 가시가 박히거나 칼날에 베이는 것도 막을 수 있고.”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도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실제 외국에서도 제법 유명세를 탄 제품이고.

“과연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지만 이런 엉성한 시제품은 오래 쓸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오래 쓰는 물건만 좋은 거란 편견은 버려. 편하면 금방 해져도 새것을 찾아 쓰게 되어 있다고.”

“오! 그럼 그만큼 판매량도 늘겠군요.”

조셉은 준영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 제기와 훌라후프는 시판하기 무섭게 잘 팔려 나가고 있으므로.

특히 훌라후프는 판매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방 입소문을 탔다.

여기엔 노이즈 마케팅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종교계를 비롯한 보수적인 계층에서 음란하고 흉한 운동 기구라고 지탄을 했던 것.

“하지만 그 바람에 대중의 관심도가 더욱 높아졌고 판매량도 폭증했죠.”

“당연하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쉬이 꺾을 수 있는 게 아냐.”

당장 이 자리에도 가느다란 허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소녀가 있다.

본인은 안 하는 척하지만.

“뭐, 뜬소문이긴 한데 여왕 폐하께서도 하고 계신단 말이 있죠.”

“오, 그건 TV나 영화관 광고 소재로 딱 좋은걸? 불경하다고 지적받을 수 있으니까 대신 마리 앙투아네트로 분장한 배우가 돌리는 걸로…….”

아무튼 노이즈 마케팅의 위력을 확인한 준영은 이 다용도 작업용 목장갑 역시 잔뜩 어그로를 끌어 보기로 했다.

“이 장갑의 이름은 잭 더 리퍼 장갑! 줄여서 잭 글러브라고 하는 거야!”

“하하하, 그러다 범죄자들이 더 많이 쓰는 게 아닐까요?”

척척 죽이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앤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리즈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준, 리 셰프가 찾아오셨어요.”

“억관 아저씨가?”

준영은 냉큼 나가서 이억관을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

“그래, 이 군. 잘 지내고 있지? 일전에 자네가 말한 거 완성돼서 가져왔네.”

“예? 그거라면…….”

“인스턴트 라면 말이야.”

억관은 바로 보여 주겠다며 저택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작은 냄비에 물을 끓이더니 챙겨서 온 튀긴 면을 넣고 가루로 된 스프를 뿌렸다.

그러자 금방 닭고기 수프 냄새가 풍기는 탕면이 완성되었다.

호기심에 따라와서 봤던 조셉은 깜짝 놀랐다.

“아니, 뭔데 이렇게 빨리 만들어 내는 거죠?”

“맛있는 거야. 한번 먹어 봐.”

준영을 필두로 조셉과 리즈, 앤지는 억관이 만든 인스턴트 라면을 시식했다.

“우와! 진짜 맛있군요!”

“한 끼 식사로 든든하겠어요.”

“나쁘지 않네. 빨리 만든 것치곤.”

다들 호평 일색.

준영도 만족했지만, 매콤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그래도 영국인들 입맛에 맞추려면 담백한 쪽이 더 낫다고 보았다.

“아저씨,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셨어요!”

“뭘, 이 군이 틀을 잡아 준 덕분이지. 그런데 이거 좀 난감한 문제가 있더군.”

억관이 문제라고 본 것은 분말 스프.

식당에서 탕면을 만들 때는 항상 육수를 끓이니까 판매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인스턴트 라면은 그럴 수 없는 게 문제.

그래서 육수를 졸이고 증발시켜서 분말로 만들었는데, 이게 의외로 손이 많이 갔다.

“도중에 잘못하면 맛이 변해 버리고 말아.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더군.”

“하긴 양산품은 시제품보다 못하니까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의 품질이 어떤지 잘 아는 조셉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심하게 관리하면 괜찮지 않을까?”

“아, 형님, 그러면 자칫 단가가 높아질 수 있어요. 이거 저렴한 가격에 팔 거 아닙니까?”

“맞네. 비싸면 구매가 떨어지겠지.”

어떻게 한다? 완성품을 위해 좀 더 시간과 예산을 들여야 할까?

그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리즈가 손을 들었다.

“저기, 차라리 그 육수를 따로 분말로 만들지 말고 밀가루로 누들을 만들 때 넣으면 안 되나요?”

“면을 반죽할 때 육수를?”

“어차피 반죽할 때 물을 쓸 거잖아요. 혹시 육수로 반죽을 하면 잘 안 되나요?”

면 요리는 잘 아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리즈의 제안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이억관은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좋은 방법이요! 그럼 따로 스프를 첨가할 필요는 없지.”

“아저씨, 그런 식으로도 맛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억관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건 기름에 튀기는 면이잖아. 원래 음식을 기름에 튀기면 맛을 오래 유지할 수 있네.”

“아하, 기름으로 코팅을 해서 맛을 보존하는 거군요.”

“그런 거지. 그래도 부족하다면 후추나 소금 정도를 첨가해서 맞추면 될 거야.”

스프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물론 준영이 원하는 21세기 라면에 접근하기엔 아직 멀었지만, 이제 제대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억관은 리즈가 제안한 대로 육수를 진하게 첨가한 면을 곧장 만들어 보았다.

“오, 이런 방식도 맛있군요.”

“쌀쌀할 때 먹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두 번째 시식에서도 다들 호평을 해 주었다.

다만 앤지는 약간 아쉬움이 있었던 모양.

“그래도 뭔가 더 넣으면 좋겠어. 계란이나 치즈 같은 거.”

‘저 녀석, 라면 먹을 줄 아는군.’

라면 봉지에 부가 재료를 첨가하라는 문구가 괜히 있겠는가.

앞으로 시판할 제품에도 그 문구는 절대 빼먹어선 안 될 것이다.

“형님, 이 라면이란 인스턴트식품으로 사업을 하실 거죠?”

“왜? 투자해 보고 싶어?”

“헤헤, 제가 요리랑은 거리가 먼 제화 업자입니다만, 이건 정말 잘될 것 같아요. 저도 한몫 챙기게 끼워 주세요!”

그러면서 조셉은 친분 있는 식품 업체 관계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둥, 은행 대출을 거들겠다는 둥 떠들어 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억관은 갑자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한 데라도……?”

“아냐. 좀 서글픈 기분이 들어서.”

조셉이라는 젊은 사업가가 저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라면 사업은 낙관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준영이 말하는 식으로 대박이 날 사업의 상품이 중국 요리인 게 못내 아쉬웠다.

“기왕이면 한국 음식을 알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김치 같은 걸 팔 순 없잖아요. 그건 허들이 높아도 너무 높아요.”

김치는 21세기에도 호불호가 심한 음식.

사실 면 요리도 지금 영국에서 그리 대중적인 건 아니다. 닭고기 수프라는 통속적인 요리가 있어 받아들여질 뿐.

그래서 준영이 앞으로 생각하고 있는 음식도 완전 한국 전통 요리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낯선 땅에서 중국인 아류나 일본인 취급받을 때마다 항상 씁쓸한 기분이 들더군.”

“그렇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21세기에도 꽤 많은 한국인들이 자국 찬양 콘텐츠에 도취되거나 해외 반응에 집착하곤 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한국의 국가 인지도가 부족했기 때문.

21세기도 그런 상황인데 1950년대에는 오죽할까.

“이 군, 나는 이 군이 정말 잘되었으면 좋겠어. 한 줌도 안 되긴 하네만, 자네가 잘하는 만큼 영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도 기를 펼 수 있다네.”

“예, 저도 경기장에서 태극기를 보면 힘이 나곤 해요.”

“그래, 부디… 불쌍한 동포들을 위해서라도 대한 사람의 긍지를 잊지 말아 주게.”

억관은 준영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는지, 준영도 모르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한국인이라고 밝혔지만, 법적으로는 홍콩 시민으로 되어 있다.

거기다 한국인으로 언급되기보다 동양인이나 황인종이라고 뭉뚱그려 취급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취급받는 일도 허다했고 말이다.

‘그러니까 성공해야지. 나를 위해서도, 날 응원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문득 예전에 들었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작은 촛불 하나를 가지고 무얼 하냐고 그러지만, 달라지는 게 많다고.

불을 밝히면 다른 초를 찾을 수 있고, 그렇게 두 개, 세 개 늘리다 보면 어둠은 사라진다고.

‘명곡이었지. 그 노래…….’

작은 촛불이 되자.

꺼져 있는 수많은 초들을 밝히는 불빛이 되자!

언젠가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

개인적으로 god 노래는 전곡 다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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