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57화 (57/400)

Round 57. 상류 사회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고풍스러운 홀.

반듯하고 우아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때맞춰 도착한 알버트와 준영에게 쏠렸다.

“오셨군요, 남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제일 먼저 맞아 준 사람들은 알버트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알버트와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준영에게도 말을 건넸다.

“오, 자네가 빌리 라이트를 무너트린 아시아의 마법사로군. 정말 만나고 싶었다네, 미스터 리.”

“마법사라니,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자네 같은 뛰어난 재간을 가진 선수는 정말 드물어.”

이렇게 준영이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 젊은이가 그 동양인 축구 선수로군.”

“몸가짐도 제법 근사해 보이네요. 예의도 바르고요.”

“확실히 평범한 축구 선수 같진 않아 보입니다.”

준영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다.

서투른 실수는 평을 깎아먹고 인맥 구축에도 지장을 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말할 때도 신부님에게 배운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단어들을 골라서 구사했다.

알버트나 리즈에게 벼락치기로 배운 사교계 예법들을 숙지한 것은 물론이다.

“오늘은 운이 좋군. 이런 곳에서 자넬 보다니 말이야.”

“앗,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준영의 앞으로 애S턴 마틴의 데이비드 브라운 회장이 나타났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준영을 몹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알버트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눴다.

“엔지니어들이 그러는데, 자네 차 전구가 굉장히 특이하다던데? 미국인들이 개발 중인 발광 다이오드랑 흡사하다고 해.”

“그거 LED 라이트일 겁니다.”

“LED?”

“그런 게 있어요. 자세한 원리는 저도 모릅니다.”

“오, 이런…….”

브라운 회장은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 LED라는 전구는 효율이 굉장히 뛰어난 데다 내구성도 좋았다.

분석해서 대량 생산만 가능하다면 전기 시장에 일대 혁명을 불러올 정도.

“혹시 누가 발명했는지 알고 있나? 너무 미래의 인물은 아니겠지?”

“예,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닉 홀로니악.

고등학교 기술 가정 교과서에 언급되었고, 시험에도 두 번이나 나왔기에 똑똑히 기억했다.

그때 두 번 다 틀렸기 때문이다.

“그게 상용화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투자해 보실 거면 제 지분도 적당히 챙겨 주세요. 그럼 발명가가 누군지 알려 드리죠.”

“거참, 한몫 챙길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좋은 선수가 되니까요. 덕분에 회장님도 새로운 투자 기회가 생겼으니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준영의 말에 브라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에 계약서 들고 찾아갈 테니 그때 알려 주게. 그건 그렇고… 이 자리, 좀 딱딱하다 싶지 않나?”

“알고 있던 것과 딴판이긴 하네요.”

처음에 준영은 사교계라고 해서 영화 속에 나온 광경을 떠올렸다.

근엄한 귀족들이 값비싼 와인과 진수성찬을 음미하면서, 쌍쌍이 댄스파티를 벌이는.

정치적인 암투와 로맨스는 덤이다.

하지만 오늘 이곳은 간단하게 다과를 들면서 끼리끼리 담소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꽤 화려하거나 떠들썩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준영의 말에 브라운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모임마다 성향이 다르니까. 거기다 두 차례 전쟁과 경제 공황에 상류 사회도 꽤 영향을 받았지.”

“그렇군요.”

“숙녀들의 로망인 데뷔던트 볼도 곧 폐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 거기다 요즘 귀족가 젊은이들도 예법에 얽매이기보다 자유롭게 사는 걸 좋아하니까 말이야.”

‘일코가 유행이란 건가.’

준영은 그저께 만났던 앙리 드 보그를 떠올렸다.

리즈 말로는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하는데, 폭주족 행색을 하고 있었다.

“Bonsoir, Baron. Comment allez vous?”

“Je vais bien. Merci.”

보그를 떠올리던 순간에 공교롭게도 프랑스 사람이 다가와 알버트와 안부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안면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을 했는데, 어째 준영에게도 낯이 익었다.

“혹시 보그 가문 사람인가?”

준영의 혼잣말에 브라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제라르 드 보그 백작이지. 어떻게 알고 있나?”

“지난번에 앙리라는 친구를 만났었거든요.”

“그래? 앙리라면 보그 백작의 아들이야. 영특하긴 한데 행실이 영…….”

브라운은 서둘러 목소리 볼륨을 죽였다.

보그 백작이 알버트와 함께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

“이 젊은이가 우리 손녀의 은인인 존 Y. 리라네.”

“그렇습니까? 반갑네, 무슈 리. 제라르 드 보그일세.”

보그 백작의 소개에 준영도 곧장 대답했다.

“Je suis heureux de vous rencontrer. Je m’appelle Jun Young Lee(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이준영입니다).”

“오, 프랑스어를 잘하는군. 왕족이라더니 진짜 교육을 잘 받은 모양이야.”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준영은 보그 백작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사람, 신부님하고 완전 판박이잖아.’

지난번에 보았던 앙리보다 보그 백작 쪽이 더 윌리엄 터너 신부와 닮아 있었다.

도대체 이들과 신부님은 무슨 관계일까?

준영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

준영은 브라운 회장과 보그 백작을 비롯해 알버트의 지인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미스터 리, 자네는 한국계라고 했지?”

“예.”

“내가 9년 전 런던에 있었는데, 그때 한국 축구 선수들을 본 적이 있네.”

“9년 전이면, 런던 올림픽 때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때 Kim이라는 공격수가 나름 인상적이었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팀 공격수 Kim.

준영은 아마도 그가 KFA 명예의 전당에 오른 김용식 옹이 아닐까 추측했다.

대강 연대를 맞춰 보니 그때 김씨 성의 유명한 선수는 김용식 옹뿐이니까.

“근데 그들과 자네의 플레이는 다른 느낌이 들던데…….”

“그야 저는 그분들이랑 다른 곳에서 축구를 배웠으니까요.”

미래에서 배웠으니 다른 곳에서 배운 거나 마찬가지다.

고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백작, 아드님은 어쩌고 혼자 오셨소?”

“그게… 앙리 녀석, 그저께부터 심하게 앓는 바람에 입원해서 말이지요. 아마 일본에서 좋지 않은 병이라도 옮은 게 아닐지…….”

슬쩍 보그 백작의 대화를 들었던 준영의 표정은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거 혹시 병이 아니라, 그때 갖고 있던 인형에게 저주를 받은 게 아닐지?

“그랜드 투어(* 귀족 자제들이 식견을 넓히기 위해 하는 장기 여행)도 마냥 좋은 건 아니군요. 시대가 변했으니 교육 방식도 바꿔야 할까요?”

“물론 그렇지만, 너무 지나칠 필요는 없지요.”

그리 말하던 사람들은 알버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손녀들을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명문 기숙학교가 아닌 가까운 사립학교에 보냈기 때문.

이는 한국에서 전사한 아들에 대한 교육 방식과 사뭇 달랐다.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이야말로 명예를 아는 우수한 인재를 만들죠. 그 때문에 서민들도 부유해지면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은근히 자신을 지적하는 발언에 알버트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문을 열었다.

“확실히 옳은 말입니다. 명예를 아는 것은 중요하죠. 하지만 지나쳐도 좋을 건 없습니다.”

국가와 혈통, 학벌.

이와 관련한 명예를 지키려고,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청년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했다.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전쟁에 뛰어드는 게 대표적인 경우다.

친구나 동창들이 다 같이 참전하니까 휩쓸려서 아수라장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겁쟁이나 비굴한 인간으로 남고 싶지 않았던 용감한 청년들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했다.

사회는 그들을 영웅으로 기리지만, 가족들의 가슴엔 뽑을 수 없는 대못이 박혔다.

“시대는 변하고 있죠. 그러니 나 같은 구시대의 늙은이는 고집이나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알버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지 눈치 못 채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반박도 나오지 않았다.

먼저 교육 이야기를 꺼냈던 남자도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스웨덴 월드컵도 이제 1년이 안 남았군요. 예선도 슬슬 막바지인 모양이던데…….”

“후후후, 내년 월드컵은 나의 고국 프랑스가 우승할 거요.”

보그 백작은 자신 있게 큰소리를 탕탕 쳤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프랑스는 본선 진출이 유력했고,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철벽 수문장 도미니크 콜로나에 유럽 최고의 수비수 로지 마르셰, 로베르 종케가 자리하고 있지. 거기다 공격은 또 어떤지! 뱅상과 피아토니, 레몽 코파 이 삼총사를 막을 팀은 없을 거요.”

감히 축구 종가에서 축구 선수 자랑을 하다니!

백작의 발언을 거북하게 여긴 이들은 많지만,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레몽 코파만 해도 현재 유럽 축구의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이었으니까.

다들 못마땅한 기색을 보일 때, 준영이 입을 열었다.

“쥐스트 퐁텐도 뛰어난 선수라 알고 있는데요?”

“오, 퐁텐을 알고 있나? 하지만 그 친구는 아직 어려. 재능은 있지만, 현재 대표팀 주전감은 못 되지.”

‘그 주전감도 못 된다는 어린 선수가 내년 월드컵에 13골을 넣고 득점왕이 되지요.’

이는 게르트 뮐러나 브라질의 호나우두도 깨지 못한 불멸의 대기록이다.

준영이 가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알버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프랑스가 좋은 팀인 건 인정하네. 하지만 매직 마자르가 있지 않나?”

“아뇨. 헝가리는 예전 같지 않아요.”

벌써 징조도 보였다.

지난 6월 12일, 헝가리는 월드컵 예선 노르웨이 원정에서 패했기 때문.

거기다 불가리아 원정에서도 2-1 신승을 거두면서 어려운 경기를 했다.

“매직 마자르는 더 이상 위협이 안 됩니다. 그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데 100만 파운드를 걸 수 있소.”

보그 백작의 장담에 다들 준영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전문가니까 반박을 좀 해 봐라.

모두의 바람과 다르게 준영은 보그에게 동의하는 말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헝가리는 전성기가 끝났습니다. 푸스카스를 비롯한 주축 선수들이 망명하면서 전력이 크게 떨어졌죠.”

“역시, 축구 선수가 잘 아는구만! 하하핫!”

보그 백작이 으스댈 때, 준영이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우승은 어렵다고 봅니다.”

“응? 어째서지?”

“남미의 강호 브라질이 칼을 갈고 있으니까요.”

준영의 단언에 보그는 풋 웃음을 지었다.

“브라질? 하하핫! 지난 월드컵 때 헝가리랑 베른에서 난투를 벌였던 한심한 팀이 아닌가? 그들이 우승을?”

8년 전 자국에서 벌어진 대회에서도 옆 나라에 우승컵을 빼앗긴 바보들.

보그 백작이 보는 브라질은 그랬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작년에 잉글랜드에게도 4 대 2로 패한 브라질이다.

아무리 남미의 강호라 해도 감히 유럽에서 우승을 할 수 있을까?

“그 한심한 팀에 굉장한 선수가 있습니다. 현재 브라질 명문 산토스 FC에서 뛰고 있죠.”

“그래? 이름이 뭔가?”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입니다.”

“으음… 들어 본 적이 없군. 그렇게 대단한가?”

“충격과 공포죠.”

올해 겨우 1군에 데뷔한 16세의 유망주.

하지만 그는 데뷔 첫해에 득점왕을 차지하고,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브라질에 첫 번째 우승컵을 안겨 주며 자신의 이명(異名)을 만방에 떨치게 된다.

흑진주 펠레.

축구 황제라 추앙받는 사상 최강의 공격수.

대서양 너머에 있는 이 시대 축구의 진짜 끝판왕이었다.

***

펠레, 지코, 호나우두… 브라질엔 정말 전설적인 선수들이 많이 나왔죠. 지금은 네이마르가 유명합니다만, 그의 선배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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