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56화 (56/400)

Round 56. 초대장

“진짜?”

“물론이지. 나중에 존 아저씨보다 존 오빠라고 불리는 게 백배 천배 더 나으니까.”

준영의 넉살에 리즈는 물론 앤지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말 카린의 오빠야가 되는 거야. 무르기 없기!”

“너나 나중에 싫다고 하지 마라, 이 말괄량이 녀석아.”

곧장 준영과 의남매 사이가 된 카린은 옆자리에 있는 앤지를 바라보았다.

“카린이 존 오빠의 동생이 되었으니까, 작은언니도 이제 오빠의 동생이야.”

“난 딱히 오빠라고 부를 생각 없는데.”

차가운 앤지의 반응에 차 안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주 잠깐 동안만.

“전기로 된 책 속에 있다는 미래의 영화를 보여 준다면 형부라 불러 줄 수 있어.”

“앤지 너……!”

미래 영화에 언니를 팔다니!

짓궂은 동생의 언행에 펄쩍 뛰던 리즈는 준영의 대답에 더 깜짝 놀랐다.

“그럼 오늘 밤에 반지의 제왕이라도 볼까?”

“네? 그게 영화로 만들어졌어요?”

충격적인 이야기에 리즈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3부작으로 제작됐지.”

“정말이요? 언제요?”

“그러니까, 첫 편이 2001년이었나?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지.”

“세상에! 어쩜! 이럴 수가!”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리즈의 반응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무 좋은 나머지 자신이 미래 영화에 팔린(?) 것도 잊은 것 같았다.

***

세 자매를 태운 준영의 라곤다가 위딩톤 여학교 앞에 멈춰 섰다.

“그럼 다녀올게, 오빠~”

“그래, 카린.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준영이 손을 흔들며 세 자매를 배웅하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릉!

갑자기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나 학교로 들어가는 세 자매 앞에 딱 멈춰 섰다.

“Bonjour, Mignon Chats(안녕, 귀여운 고양이들).”

오토바이에 탄 청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준영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얼굴이나 차림새가 꽤 낯익었으니까.

‘지난번에 올드 트래퍼드에서 봤던 프랑스 녀석이잖아.’

리즈나 자매들의 반응을 봐선 아는 사이 같았다.

괜히 신경이 쓰였던 준영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앙리 아저씨.”

“오, 꼬마 아가씨. 사나이 가슴에 못을 박는 호칭은 피해 주지 않으련?”

“알았어, 아저씨. 다신 안 그럴게, 아저씨.”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청년, 아니 앙리는 장난기 가득한 카린에게서 리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동안 잘 지냈소, 마드모아젤?”

“한동안 뜸하셨네요.”

“후후후, 못 보니 섭섭하던가? 나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어. 신사라면 보다 넓은 세계를 보고 안목과 기개를 키워야…….”

딱히 섭섭하지 않았는데.

심드렁한 표정의 리즈 앞에서 한동안 주절주절 떠들던 앙리는 선물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그대에게 바칠 소소한 선물이지. 일본의 옛 도읍, 그곳의 전통 있는 상점에서 구한 진귀한 기념품이오.”

앙리는 으스대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까만 생머리에 빨간 기모노가 입혀진 인형이 들어 있었다.

“예쁘긴 한데…….”

“어쩐지 음산해 보여.”

“이상한 냄새도 나.”

세 자매의 반응에 이어 슬쩍 다가왔던 준영이 마침표를 찍었다.

“이거 저주의 인형 같은데.”

“저주받은 거라고요?”

“그러니까 놔두면 몰래 움직인다든가, 저절로 인형의 머리가 자란다든가…….”

“히익!”

앤지와 카린이 기겁하며 물러났고, 리즈도 인형 상자에서 냉큼 떨어졌다.

“아니야. 이 인형은 저주받지 않았어!”

부정하는 앙리는 탐탁잖은 눈길로 준영을 쏘아보았다.

“실망이군, 당신. 축구 따위를 해도 좀 배운 게 있는 신사라고 생각했건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하는 건가!”

“아니, 난 그런 게 있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간단히 확인도 가능하다고 하던데?”

“확인? 어떤 식으로?”

“그러니까 인형이 입고 있는 옷 안쪽에 하얀 수의가 입혀져 있다고 들었어.”

“흥, 그럴 리가…….”

코웃음을 친 앙리는 바로 증명을 해 보겠다는 듯, 인형의 기모노를 벗겼다.

그러자 누렇게 뜬 수의가 그대로 드러났다.

“진짜잖아!”

“히익, 곰팡이도 폈어!”

“저기 붉은 얼룩은 설마 피?”

“꺄아아아악!”

세 자매들뿐만 아니라 뭔가 싶어서 다가와 구경하던 여학생들도 질겁하고 도망쳤다.

‘지, 진짜 저주의 인형이었나?’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앙리는 내색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신사라면, 고귀한 푸른 피를 이은 자라면 그런 허무맹랑한 미신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의연하게 행동해야 한다.

신사답게, 귀족답게!

앙리는 보란 듯이 인형을 들고 흔들었다.

“후후후, 저주 같은 건 그저 괴담일 뿐…….”

딸깍!

갑자기 인형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기괴하고 공허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앙리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성은 순식간에 증발.

그리고 원초적인 공포가 그의 몸을 장악했다.

“히에에에엑!”

손에 든 인형을 내던진 앙리는 오토바이도 내팽개친 채 허둥지둥 달아났다.

‘왜 저래? 귀신이라도 봤나?’

멀어지는 앙리를 바라보던 준영은 뒤늦게 자매들에게 물음을 건넸다.

“방금 저 녀석, 누구야?”

“앙리 드 보그라고, 프랑스 귀족 가문의 장남이에요.”

“치마만 둘렀으면 들이대는 저질.”

“그냥 바보 아저씨야.”

리즈가 추가로 알려 준 바에 따르면 앙리의 부친이 알버트와 같이 사업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보그(Vogue)라……. 어째 잡지 이름 같군.”

“프랑스에서 유명한 가문이래요. 보그 백작님은 예전부터 영국에 자주 왕래했었는데, 덩캐르트 철수 때 자유 프랑스군을 따라온 후로 완전히 정착했죠.”

들어 보니 꽤 있는 집 자제.

그런데 왜 폭주족 비슷한 꼬락서니를 하고 다니는 걸까?

“요즘 있는 집 애들이 로큰롤 같은 미국 문화에 빠져서 저러고 다니는 경우가 늘고 있대.”

앤지의 설명에 준영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종의 일탈 같은 거로군.”

“저런 거 좋아하는 여자애들 많으니까, 언니도 좋아할 줄 알았나 봐.”

그러고 보니 리즈에게 들이미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정작 리즈는 별로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그런데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왜? 신경 쓰여?”

“그야…….”

갑자기 준영이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왜 그래요, 준?”

리즈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준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지각하기 전에 빨리 들어가는 게 좋겠어.”

준영은 서둘러 세 자매를 교내로 들여보냈다.

보그가 내던지고 간 저주 인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

준영은 약속을 지켰다.

저녁에 리즈와 앤지에게 반지의 제왕 1편, 반지 원정대를 보여 주기로 한 것.

알버트 남작도 호기심을 보이며 이 영화 관람에 끼어들었다.

“치, 왜 카린만 따돌리는 거야?”

준영은 뽀로통한 표정을 짓는 카린을 달랬다.

“첫째, 애들은 잘 시간이야. 둘째, 이거 상영 등급은 12세 이상이지. 셋째, 대신 일요일에 진짜 재밌는 만화 영화를 보여 줄게.”

“정말?”

앞의 두 가지 이유를 들을 때만 해도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던 카린.

하지만 마지막 제안을 듣고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제목이 뭔데, 오빠?”

“겨울 왕국.”

“우와! 제목부터 뭔가 근사해 보여!”

준영은 내일을 기대하는 카린을 돌려보낸 후, 저택 도서관 문을 닫고 불을 껐다.

그러곤 노트북에 저장된 영화 파일을 재생했다.

그러자 노트북에 연결되어 있던 미니 빔 프로젝터가 한쪽 벽에 걸린 하얀 천을 향해 빛을 뿜었다.

“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한 리즈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지만 알버트와 앤지는 그녀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21세기의 기술과 그것이 보여 주는 영화에 압도되었기 때문.

「…모든 것은 힘의 반지들이 만들어지며 시작되었다. 세 반지는 요정들에게, 그들은 영생을 누렸으며…….」

“굉장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실 내용 자체는 원작을 편집하고 압축해 놓았다.

거기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설정도 바꿔 놓기도 했다.

하지만 웅장한 전투 신과 생생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이 그런 문제들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렇게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리즈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정말 대단해! 준, 21세기 영화는 다 이 정도예요?”

“아니, 그렇진 않고 이게 넘사벽급으로 명작일 뿐이지. 저 영화가 만들어지고 2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저걸 능가하는 판타지 영화는 나오지 않았어.”

“과연!”

준영은 문득 호기심이 들어 알버트에게 물음을 건넸다.

“톨킨 선생님이 이걸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

“글쎄, 원작을 훼손한 점은 심히 불만스러워 하겠지만, 영상으로 이 정도까지 만든 건 가상하게 봐 줄 것 같군.”

톨킨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럼 초대해서 한번 보여 주는 건 어떨까?

하지만 준영은 그 생각을 이내 접었다.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불필요하게 늘릴 필요는 없으니까.

“아 참, 존. 자네에게 전할 게 있네만.”

알버트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준영에게 건네주었다.

“초대장이군요.”

“그래, 나와 친분이 있는 사교계의 인사들이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더군.”

“사교계에서요? 의외로군요.”

준영이 이 시대에 와서 알게 된 건 축구는 서민 스포츠라는 사실이다.

중산층이나 상류 사회에서는 럭비와 크리켓을 더 선호했다.

그 때문에 축구와 크리켓 리그에서 모두 활동하는 선수들도 제법 있을 정도.

“그런 분류는 지나친 편견에 지나지 않아. 축구 같은 서민 문화를 좋아하는 소탈한 이들도 많아.”

“하긴 어르신도 축구를 좋아하시죠.”

“그렇지. 여왕 폐하께서도 아스날 FC의 팬이시지. 선왕께서도 그러셨고.”

그렇기에 축구에 관심 있는 상류 인사들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강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동양의 선수가 축구계를 주름잡고 있는 상황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스탠리 매튜스와 빌리 라이트를 상대로 이겼다고 하지 않는가.

“꼭 불러 달라고 나에게 당부를 하더군. 기왕이면 던컨 에드워즈도 같이 와 줬으면 하더라고.”

“알겠습니다. 던에게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거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배경에 의존하는 건 나쁘지만, 높으신 분들을 뒷배로 둬서 손해 될 게 없으니까.

앞으로 영국에서 자리 잡고 축구 외에 다른 일, 그것도 유전 개발 같은 큰 사업을 할 것을 생각하면 인맥은 반드시 만들어 두어야 했다.

***

10월 4일 저녁.

아스톤 빌라전을 대비한 최종 훈련을 마친 준영은 알버트와 함께 맨체스터의 사교계 모임이 열리는 고급 클럽에 당도했다.

“던컨은 같이 오지 않은 겐가?”

“예. 그 녀석, 사교계 같은 데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딱 잘라 거절하더군요.”

현재 영국 최고의 축구 아이돌이었지만, 던컨은 스타라고 과시하거나 으스대고 다니지 않았다.

화려한 유흥도 싫어해서 친구들과 어울려 하는 카드놀이나 자전거 하이킹, 낚시 등을 더 좋아했다.

“아쉽지만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제 슈트 어떻습니까? 21세기에서 입던 건데 혹시 튀어 보이진 않습니까?”

“아니, 딱 좋네.”

재킷은 물론 와이셔츠와 넥타이, 모자와 장갑까지 모두 올 블랙이었지만, 준영의 큰 체격에 아주 잘 어울렸다.

무게 있고 강한 느낌이 드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스타일이었던 것.

‘자, 그럼 어디 가 볼까?’

과연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

저 시절 미국 문화에 물든 유럽 청년들을 코카콜라 세대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그만큼 2차 대전 후에 미국 문화의 영향력이 상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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