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55화 (55/400)

Round 55. 의남매

방과 후.

프레드로 가문의 세 자매가 다니는 위딩톤 여학교 테니스 코트로 학생들이 몰렸다.

위딩톤의 테니스부가 가까이 있는 맨체스터 여학원과 친선 시합을 하기 때문.

“지면 안 돼!”

“힘내요, 선배!”

거리가 가깝다 보니 맨체스터 여학원 학생들도 많이 와서 응원했다.

두 학교 학생들의 응원전이 뜨겁게 벌어지는 가운데, 코트에서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오늘 단식전 선수로 출전한 리즈는 맨체스터 여학원 테니스부 주장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전세가 리즈 쪽으로 기울었다.

“승리에 대한 집념이 굉장한 학생이네요.”

“끈기나 집중력이 대단해. 몸놀림도 상당히 가볍고…….”

상대 팀 코치들도 칭찬을 할 정도로 리즈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결국 1세트와 2세트 연달아 6 대 1로 이기면서 세트 스코어 2 대 0으로 승리했다.

“대단해요, 선배! 상대 팀 주장을 이기다니!”

“다음번 지역 대회 우승은 따 놓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멋지다며 꺅꺅 비명을 질러 대는 후배들의 반응에 리즈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대체 비결이 뭐예요? 앤지 말대로 마법사에게 신비한 동방의 마법을 익힌 거예요?”

“마법사? 준을 말하는 거니?”

리즈의 물음에 후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키 큰 사람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마법사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Magic, Sorcery, Wizard.

준영이 경기에서 보여 주는 화려하고 신기한 개인기, 그리고 빼어난 활약 때문에 신문 기사마다 이 단어들이 빠지지 않았다.

별명도 오리엔트 특급이니 골리앗이니 하다가 울버햄프턴 원정 경기 승리 후, 마법사 리틀 존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사람, 정말 마법사예요?”

“그건 아니지만, 준이 알려 준 대로 하니까 정말 마법처럼 실력이 늘어나긴 했어.”

준영에게 훈련받은 지 한 달.

그리 긴 시간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르게 성과가 나타났다.

예전보다 힘과 스피드도 늘어났고, 덕분에 훨씬 여유롭게 경기를 할 수 있었다.

“역시 동양의 신비한 힘인가?”

“그 사람, 사실은 왕자래. 수백 년 왕가에서 전승된 비술 같은 걸 알고 있는 건지 모르지.”

“말도 안 돼. 왕자가 뭐 하러 축구 같은 걸 해?”

“서민 취향인 거겠지. 원래 뼈대 있는 집안은 체면이나 위신 같은 데 연연하지 않는대. 굳이 따지지 않아도 고결하니까.”

“맞아. 나도 들은 건데 페르시아의 왕도 축구를 굉장히 좋아한대. 직접 선수들과 공을 찰 정도라던가?”

헛소문이라도 사람들의 귀에 솔깃한 이야기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미스터리나 로맨스에 빠져 있는 소녀들은 더욱 그랬다.

“왕자라서 동양인치고 키도 크고 늠름한 거구나.”

“거기다 굉장한 부자래. 저번에 봤는데 고급 차를 몰고 다니고 옷도 영화배우처럼 입더라.”

참새처럼 재잘대던 소녀들은 리즈를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 그 마법사 왕자님이랑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냐니?”

“사귀고 있는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왕가의 비술을 배운 거겠죠.”

사귄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마음이 없지 않았던 리즈는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가깝게 지내는 건 맞아.”

“오, 역시……!”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지만, 일부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선배, 괜찮은 거예요, 그거?”

“뭐가?”

“보그 백작가의 공자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보그? 앙리 드 보그 말이야?”

어이없어하던 리즈는 이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 사람이랑 아무런 사이도 아닌걸.”

“그쪽은 그리 여기지 않는 것 같던데…….”

리즈는 후배의 우려를 무시해 버렸다.

오랫동안 연락도 없고, 한동안 잊고 있던 사람.

이제 와서 나타난다고 신경 써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

10월 2일 저녁 7시 30분.

유러피언 컵 예선 2차전 경기가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렸다.

이미 더블린 원정에서 대승을 거둔 맨유는 오늘 경기 출전 멤버를 여유롭게 구성해서 출전시켰다.

“빅 던크(* 던컨 에드워즈의 별명)는 오늘 안 나오는 건가?”

“마법사 리틀 존도 빠졌네.”

“주말의 리그 경기를 대비하려나 봐.”

준영과 던컨은 관중석에서 경기를 구경했다.

그냥 보면 재미없다 싶었기에 내기도 하면서.

“누가 선제골을 넣을 것 같아?”

“그야 당연히 데니스지!”

“그럼 난 토미 쪽에 걸까?”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출전 멤버라 해도 기존의 주전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샴록 로버스 전력으로는 그들을 막아 내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전반 5분에 데니스 바이올렛이 선제골을 터트리며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거봐, 존. 내가 데니스라고 했지?”

“토미의 어시스트 덕분이라고.”

15분 후에는 데이비드 펙이 추가 골을 기록하며 점수는 2 대 0으로 벌어졌다.

이른 시간에 점수가 벌어지면서, 승리를 낙관한 관중들은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덕분에 준영이 손해(?)를 봤다.

“리 선수, 사인 좀 해 줘요!”

“나도! 나도!”

애, 어른 할 거 없이 준영에게 몰려들어 수첩을 내밀었다.

스탠리 매튜스에 이어 빌리 라이트까지 꺾어 버린 필드의 마법사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한 덕분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반응이 상상 이상으로 폭발적이군.’

아무래도 동양인 선수니까 인정하지 않거나 깎아내리지 않을까?

물론 일부 보수적인 매체들은 그랬다.

하지만 대다수 신문과 방송에선 사실 그대로 보도하고, 오히려 격찬하기까지 했다.

특히 황색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은 더욱 그랬다.

축구 종가의 대표 선수들을 쓰러트리는 동양의 거인은 구독자들을 자극하기 매우 좋은 소재였으니까.

물론 황색언론답게 이전에 보도한 과장과 허무맹랑한 헛소문도 덧붙었다.

‘사실이 아니라도 대중은 그걸 믿죠. 왜냐하면 스스로 납득하고 싶은 까닭을 찾고 싶어 하니까.’

울버햄프턴전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단독 인터뷰를 하러 찾아왔던 맨체스터 가디언의 도니 데이비스 기자가 한 말이다.

알 수 없는 동양의 비술을 쓴다더라, 백인 혼혈이라더라, 실은 동양의 왕족이라 하더라, 등등.

이런 루머가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이렇게 비범한 녀석이니, 우리나라 유명 선수를 꺾을 수 있었던 거다!’

라고 언론이나 대중이 납득할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인종주의적인 관점이 살아 있다 보니 그런 거겠지?’

그런 것과 별개로 대다수 맨유 팬들이 보이는 반응은 순수했다.

그들에겐 이미 피부색은 뒷전이 되었다.

어떻든 간에 공 잘 차고 팀에 승리만 안겨 주면 좋은 선수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느긋하게 경기나 보려고 했는데…….’

사실 이러지 않을까 생각해서 남들과 비슷한 차림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키와 용모가 너무 눈에 띄었으므로.

나만 당할 수 없지!

준영은 이런 이기적인 마음에 옆을 바라봤지만, 슈퍼 스타플레이어 던컨 에드워즈는 어느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얍삽한 녀석!’

준영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을 때였다.

“Excusez-moi, Êtes-vous le magicien des rumeurs?”

‘응? 프랑스 사람인가?’

사람들을 밀치고 나와 불쑥 불어로 말을 건네는 포마드의 청년.

제법 키도 크고 체격도 좋다.

거기다 남들과 다르게 가죽 재킷에 청바지 차림.

그런데 그런 것보다 준영의 눈길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닮았잖아. 신부님이랑…….’

은사이자 부모와 같은 윌리엄 터너 신부.

바로 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꽤 닮아 있었다.

“Tu n’as pas entendu ce que j’ai dit(내 말을 못 들었나)?”

“Non. J’ai bien entendu(아뇨. 확실히 들었어요).”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청년은 준영이 바로 대꾸하자 표정이 변했다.

“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군.”

“어느 정도까지는.”

21세기 AS 모나코에 있으면서 익혔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3시즌을 있다 보니 일상 회화 정도는 하게 되었다.

“귀한 신분이란 게 헛소문은 아니었나 보군. 유별난 존재이니 확실히 끌릴 만하겠지.”

“끌리다니? 누가요?”

“훗, 모르는 척하긴.”

준영의 물음에 청년은 가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À bientôt.”

‘또 보자고?’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혹시 터너 신부님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진짜 젊은 시절 터너 신부님인 걸까?

의아해하는 준영은 청년이 군중들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준영은 리즈와 앤지, 카린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다.

요즘 그는 자처해서 자매들의 등교를 맡고 있었다.

“이런 일은 체트리에게 맡기면 되는데… 귀찮지 않아요?”

“전혀.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뭐.”

뭐가 좋은지 리즈는 딱히 묻지 않았다.

충분히 알 만했으니까.

“아 참, 이번 토요일 홈경기 상대가 아스톤 빌라죠?”

“응, 지금 하위권이지만 지난 시즌 FA컵 우승을 한 저력 있는 팀이지.”

“이번엔 응원 갈게요.”

예전보다 훨씬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준영과 리즈를 바라보던 꼬맹이 카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두 사람, 언제 결혼해?”

끼기긱!

카린이 날린 돌직구에 라곤다가 한순간 비틀거렸다.

준영이 애써 운전에 집중하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린 리즈가 카린에게 호통쳤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큰언니랑 존이랑 서로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혹시 카린이 잘못 본 거야?”

“아니, 그렇진 않지만…….”

리즈가 우물거리고 있을 때, 직격탄이 날아들었다.

“저번에 존이 큰언니한테 뽀뽀해 주는 걸 봤어.”

“나도.”

앤지까지 봤었단 말인가!

정말 몰랐다.

그땐 준영의 아픈 과거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그를 격려해 줄 것만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야.”

준영의 말에 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순서?”

“그래. 밀가루 반죽을 하지 않고 과자를 구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순서가 있는 거지.”

설명이 먹혔는지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큰언니도 학교부터 졸업해야 하겠네. 아쉽지만 좀 더 기다려야 하나?”

“기다리다니, 뭘?”

준영의 물음에 카린은 동경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있지, 카린은 언니들뿐이라서 오빠야가 있는 애들이 부러웠어. 책도 읽어 주고, 숙제하는 것도 도와주고…….”

그래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나타날 리는 만무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저택 고용인들이나 이웃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럴 때 준영이 나타났다.

닭벼슬처럼 좀 이상하게 생긴 머리를 했지만, 일단 듬직한 겉모습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잘 어울려 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미래인이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신기한 존재가 아니던가!

“카린은 큰언니랑 존이 친한 게 기뻐. 둘이 결혼하면 존이 오빠야가 되는 거잖아.”

“그건 전문적인 용어로 형부라고 하는 거야.”

앤지가 가볍게 핀잔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막내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런 바람을 가졌을 때가 있었으므로.

“이미 말했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어. 금방은 안 된다고.”

준영의 대답에 카린은 시무룩한 기색을 짓다가 바로 이어지는 말에 반색을 지었다.

“하지만 카린이 오빠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되어 줄게.”

***

샴록 로버스는 유러피언 컵 예선 2차전 맨체스터 원정에서 3-2로 졌습니다. 1차전 홈에서 대패한 걸 생각하면 상당히 선전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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