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54화 (54/400)

Round 54. 모자란 놈의 행운

“우리가 잘못한 거야. 좀 더 신경을 써 줬어야 했는데.”

“맞아요. 그냥 신기한 녀석, 대단한 놈으로밖에 생각 안 했으니까.”

동양인이라고 깔볼 수 없는 위압적인 체격과 영국 최고 선수들을 눌러 버릴 정도의 축구 실력.

거기다 출신이 좋은지 남작가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으며 지낸다.

또한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오만하지 않고 붙임성이 좋았다.

간혹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지만, 통이 크고 노래도 잘 부르는 멋진 녀석이다.

“아무튼 그래서 허더스필드에 있을 때도 고참 선수들이 함부로 녀석을 건드리지 못했대.”

“하긴 우리 팀은 감독님 덕에 덜하지만, 다른 팀에선 신입이나 후배 선수들 갈굼(Hazing)이 심하다면서요?”

“휴, 말도 마라. 정말 별의별 짓을 다 시킨다니까.”

이적생 출신인 토미 테일러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도 귀족 백은 있었으면 좋겠더라고.”

“바라지만 말고 어디 양갓집 아가씨라도 꼬셔 보지 그래요?”

“에이, 그런 건 영화에서나 가능할 일이지.”

바비의 말에 토미는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숀이 바로 반박을 하고 나섰다.

“뭘 모르는군. 처칠 총리 둘째 사위도 배우에 서커스 단원이었어.”

“지금은 이혼했잖아요.”

“아무튼 윗동네 아가씨들을 사귀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란 거지. 이런 노래도 있고 말이야.”

“노래?”

토미의 물음에 숀은 문제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Uptown girl~ She’s been living in her uptown world~ I bet she never had a back street guy~”

가만히 노래 가사에 귀를 기울이던 토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처음 듣는 곡인데요. 대체 누가 부른 거죠?”

“나도 몰라. 같이 차이나타운에서 밥 먹은 다음 날에 리틀 존이 흥얼거리기에 배운 거야.”

멜로디가 흥겹고 가사도 재밌는 게 무슨 뮤지컬에 나오는 곡 같았다.

아무튼 숀은 그 곡이 맘에 들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외워 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As long as anyone with hot blood can이란 대목이 제일 와닿더군.”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 가능하다.

의지만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단 뜻이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 서민이라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고, 작위도 받는 세상이지. 혹시 알아? 여기 있는 사람 중에도 Sir가 붙는 분이 나올지?”

숀의 말에 바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축구 잘한다고 훈장을 주겠어요?”

“등산 잘하는 사람도 받는데 축구 잘한다고 안 주겠어?”

4년 전 에베레스트 정상을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는 훈장과 기사 작위를 받았다.

숀의 말대로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축구도 유러피언 컵이나 월드컵 등 국가의 명예를 드높일 대회가 있으니까.

“그나저나 숀은 좀 변한 것 같네요. 많이 밝아졌다고 할까?”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축구 선수로도, 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하고 정체하기만 해서 하루하루 한숨과 주름만 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녀석은 꽤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다 리틀 존 그 녀석 덕분이지,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부디 훌쩍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어.”

“그래요. 존을 위해 건배하죠.”

“그래, 리틀 존을 위하여!”

다들 술잔을 높이 들었다.

진심으로 준영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

이른 새벽.

준영의 방문 앞으로 온 리즈는 노크를 하려다 망설이고 말았다.

‘괜찮을까?’

어제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심한 부상을 당한 줄 알았다.

체트리의 차를 타고 돌아온 준영은 다행히 어디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안색이 심하게 좋지 않았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을 때랑 비슷했어.’

어제 경기도 이겼다고 하던데, 도대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의아해하던 리즈는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자 화들짝 놀랐다.

“응? 무슨 일이에요?”

“그게… 걱정이 되세요.”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

방문을 열고 나온 준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안도하는 리즈의 모습에 준영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괜한 걱정을 끼친 모양이네. 이제 괜찮으니까 안심해도 돼요.”

“네, 다행이네요.”

준영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리즈의 훈련을 지도해 주었다.

단순하고 효율적인 기초 체력 단련부터 시작해서 순발력을 키우는 제자리멀리뛰기와 민첩성을 향상시키는 사다리 훈련 등등.

“근데 순발력과 민첩성은 똑같은 거 아닌가요? 잽싸게 움직여야 하는 거니까…….”

“다르죠. 순발력은 순간적으로 최대한 빠르고 강하게 치고 나갈 수 있게 하는 거고, 민첩성은 상황에 따라 방향을 전환하거나 자세를 바꾸게 하는 거니까.”

“아하, 자동차가 직선 도로에서 질주하는 거랑 복잡한 도로를 꼬불꼬불하게 달리는 것의 차이인 거군요.”

“네, 바로 그거…….”

빠앙-

저 멀리 철로에서 기차가 요란스레 달려갔다.

모즐리역을 통과하는 아침 통근 열차.

늘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열차였지만, 오늘은 유달리 거슬렸다.

마치 바로 등 뒤에서 쫓아오는 듯한 오싹한 느낌.

“…준! 준, 내 말 들리지 않아요?”

뒤늦게 리즈의 외침을 들은 준영.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원래 자리에서 한참 물러섰음을 깨달았다.

다시 떠오른 악몽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또 안 좋은 건가요?”

“그냥 좀 거북하고 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나 보네요.”

준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곁을 따라가는 리즈는 물끄러미 준영을 바라보았다.

염려스러운 눈길 너머에는 무언가 알고 싶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의지가 맴돌고 있었다.

그 상냥한 눈길 때문일까.

발걸음을 멈춘 준영은 저도 모르게 말문을 열었다.

“7살 때 여름이었어요. 그때 처음 장난감이 아닌 진짜 기차를 봤죠.”

예전부터 기차놀이를 좋아했고, 한 번 기차를 타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비행기를 더 많이 타 봤을 정도.

“그러다 드디어 기회가 왔죠. 폭우와 안개로 예약한 비행기가 결항되었거든요.”

부모님이 고속버스 티켓을 끊으려 했지만, 준영은 졸랐다.

고속버스 말고 기차를 타자고.

“한 번도 안 탔으니까 꼭 타고 싶었죠.”

“그 마음 이해해요. 저도 어릴 때 비행기 타고 싶어서 조른 적이 있었으니까.”

“네, 뭐 어릴 때는 다들 비슷비슷할 테니까. 아무튼, 아버지도 흔쾌히 허락하셔서 기차를 타러 역으로 갔어요. 거기서 진짜 기차를 탔어요.”

장난감으로 봤던 기차와 생김새는 달랐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고속철 명함을 달고 있는 기차는 굉장히 빨랐다.

철로 옆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따위는 전혀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난 잔뜩 신이 나서 다음에도 기차를 타자고 말하려 했죠. 그런데 그때 열차가 갑작스럽게 요동치더니…….”

급정거한다 싶더니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눈앞의 세상이 사납게 뒤흔들리며 객차 안에 사람과 가방이 아무렇게나 날아다녔다.

두꺼운 차창 유리가 부서지면서 객차는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굉장히 길게 느껴졌죠.”

“…….”

잠시 후 요동을 멈췄을 때, 객차 안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울리고, 붉은 피가 깨진 유리와 찌그러진 철판 위로 흘러내렸다.

“세상에…….”

“정말 끔찍한 사고였지만, 난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요. 사고가 나는 순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 감싸 안아 준 덕분에.”

하지만 그 기적은 공짜가 아니었다.

준영은 살아남았지만, 혼자가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날 폭우 때문에 산사태가 나서 기차가 탈선해 버린 거였어요.”

“…….”

“그 뒤로 기차도, 기차놀이도 좋아하지 않게 됐죠.”

그냥 바라보는 정도는 괜찮지만, 도저히 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철없이 조르지만 않았더라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사고에 휘말리지 않았을 텐데…….”

“그건 아니에요!”

리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불의의 사고였잖아요. 자책하지 말아요. 그건 돌아가신 분들도 원치 않을 테니까.”

말을 끝맺은 순간, 리즈는 준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방금 전과 다르게 우물쭈물했다.

“미안해요. 제가 멋대로 말해 버린 것 같네요.”

“괜찮아요. 그냥 예전에 꾸지람 들은 게 생각나서 그런 거니까.”

어릴 때 신부님도 리즈처럼 호통을 쳤다.

자책하지 말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힘차게 살아가라고.

그게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바라는 거라고.

‘나도 아직 모자란 놈이구나.’

신부님께 꾸중을 들은 뒤에도, 성인이 된 후에도, 아직도 그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신부님처럼 마음을 열어 주고 다그쳐 주는 좋은 사람을 만났다.

“모자란 놈이 운은 참 좋군.”

“What did you just say?”

준영이 한국어로 혼잣말을 한 게 리즈는 궁금했던 모양이다.

딱히 숨기거나 얼버무릴 것도 아니라 준영은 바로 알려 주었다.

“리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요.”

“네? 아니죠. 다행인 건 오히려 난데…….”

리즈의 말문이 뚝 멈췄다.

슬쩍 허리를 숙인 준영이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으므로.

순식간에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리즈에게 준영은 웃음을 지으며 크게 박수를 쳤다.

“자,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훈련하죠.”

“아… 네, 알겠습니다, 교관님!”

당황하는 건 잠시.

힘찬 외침과 함께 미소 짓는 리즈의 등 뒤로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쳤다.

그 따스한 햇살 덕분에 준영은 마음속의 어둑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있었다.

***

런던 팔리아멘트 스퀘어.

신문을 든 청년들이 스포츠 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나이티드가 또 승리했군.”

“거기 있는 키다리 동양인이 정말 굉장한 놈이래.”

“스탠리 매튜스를 잡더니 이번엔 빌리 라이트까지……!”

수행원을 거느리고 산책하던 노신사는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둥그런 얼굴에 무쇠 같은 완고함을 담은 그는 혀를 찼다.

“제국에 드리워진 황혼이 그라운드까지 번진 모양이군.”

해가 지지 않는 제국.

그가 평생 지키려고 애썼던 조국은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쇠락하는 조국을 지켜봐야 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명색이 축구 종주국인데 외국인 따위가 설치게 놔두다니…….”

그는 딱히 축구에 열광하진 않았다.

폴로를 더 좋아했고, 축구는 그냥 국가대표 경기나 FA컵 결승 정도에 관심을 두는 정도다.

그래도 알 만하거나 좀 친분이 있는 스타 선수들이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녀석에게 당했다니!

“어떤 놈인지 낯짝 한번 보고 싶구만.”

시가를 물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사자.

사상 최대의 대전쟁에서 영국을 구한 전직 총리의 날카로운 눈빛이 멀리 북쪽을 향했다.

***

2차 대전 영국 총리 하면 누군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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