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53. 트라우마
빠르게 드로잉을 처리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공격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다들 활발히 움직이는 가운데, 골을 넣은 숀 코너리는 그 전보다 더 왕성하게 뛰어다니며 울버햄프턴 수비진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다 토미 테일러가 밀어 준 패스를 받아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렸다.
퍼엉-
마치 빨랫줄처럼 쭉 뻗어 간 그 슈팅을 골키퍼가 황급히 펀칭으로 쳐 냈다.
“아깝군!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쉬워하긴 했지만, 숀에겐 낙담하거나 비관적인 기미가 전혀 없었다.
아까 넣었던 선제골이 그에게 놀랄 만한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
그와 달리 빌리 라이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쳇,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군.’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동점 골은커녕 추가 골을 내줄 뻔했다.
더구나 지금 코너킥도 위험하다.
지금까지 걱정거리도 되지 않았던 멀대 녀석까지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
그래도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동료들을 다그쳤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골문 안에서 마크해야 할 상대를 절대 놓치지 마!”
고개를 끄덕인 울버햄프턴 선수들은 자신이 마크할 대상을 살펴보는 동시에 코너킥에 집중했다.
‘높게 올까, 낮게 올까?’
‘유나이티드에는 장신 플레이어들이 있으니…….’
모두 긴장한 가운데 데이비드 펙이 코너킥을 올렸다.
늑대들의 예상과 다르게 코너킥은 낮고 빠르게 날아왔다.
페널티 박스 외곽에 있던 던컨은 떨어지는 공에 다가가 절묘한 터치로 볼의 방향을 틀어 놓았다.
“엇! 저, 저거!”
모두가 예상치 못한 공의 궤적을 따라잡은 선수는 둘뿐이었다.
늑대의 수장 빌리 라이트, 그리고 버스비의 이단아 이준영!
그들의 일대일이 또다시 펼쳐졌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
‘깔끔하게 제쳐 주지!’
공을 잡기 직전, 준영은 찰나의 순간 고민에 잠겼다.
여기서 무슨 기술을 쓰면 빌리 라이트를 확실히 제칠 수 있을까?
스텝 오버? 백숏?
‘그래, 그거다!’
선택과 동시에 그의 발에 공이 걸렸다.
바싹 붙어 인터셉트를 시도하던 빌리는 준영의 개인기를 보고 흠칫했다.
‘이건 푸스카스 그놈의……!’
드래그 백.
그것을 본 순간 웸블리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리고 분노와 함께 이성이 깡그리 증발했다.
‘또다시 당할 것 같으냐!’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
하지만 준영이 쓴 기술은 단순한 드래그 백이 아니라 드래그 촙.
발바닥으로 긁어낸 공을 방향을 바꿈과 동시에 발끝으로 띄워 올렸다.
당연히 공이 지면으로 굴러갈 거라 생각하고 마크했던 빌리 라이트는 완전히 농락당하고 말았다.
웸블리에서 푸스카스에게 당했을 때처럼!
“성공했… 우아앗!”
빌리 라이트를 제치고 슛을 시도하던 준영이 벌렁 자빠졌다.
마지막에 손을 뻗은 늑대 대장에게 발목을 잡힌 것이다.
“이건 반칙이라고요.”
“알아.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
빌리 라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처럼 당할 수 없다는 마음에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졌지만, 결과는 페널티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로군.’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은 골키퍼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붙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준영이 얻어 낸 페널티킥은 토미 테일러가 깔끔히 성공시켰다.
2 대 0으로 앞서간 맨유는 추가 실점 없이 경기를 끝냈고, 원정에서 귀중한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은 우리가 졌다. 하지만 다음엔 결과가 다를 거야.”
“네, 스코어만 다를 겁니다.”
빌리 라이트와 다음을 기약하며 필드에서 나온 준영.
시원하게 샤워를 끝내고 라커룸을 나온 그에게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리 선수, 오늘 경기 소감 좀 말씀해 주시죠!”
“빌리 라이트와 상대해 본 기분이 어떻습니까?”
“두 번째 골의 단초가 된 드리블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인가요?”
질문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카메라 플래시가 연방 펑펑 터졌다.
기자들의 관심과 취재 열기는 일전에 블랙풀의 스탠리 매튜스와 맞붙었을 때보다 훨씬 더했다.
잉글랜드 최고의 수비수, 그것도 현역 대표팀 주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
그만큼 이슈가 되었기에 답변도 제대로 할 필요가 있었다.
“힘든 시합이었습니다. 울버햄프턴 선수들은 노련하고 끈질긴 근성이 있었으니까요. 빌리 라이트 선수는 듣던 대로 대단했어요. 그가 잉글랜드의 캡틴인 이유를 알겠더군요.”
경기 후 인터뷰는 제법 오래 진행되었다.
준영 말고도 오늘 승리의 수훈자인 숀 코너리와 바비 찰튼 등도 많은 주목을 받으며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경기하는 것보다 인터뷰가 더 어렵구만.”
“지고 난 다음에 인터뷰하는 게 훨씬 곤욕이라고요.”
다행히 오늘 경기는 이겼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두었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면 된다.
“돌아가면 한잔하자고.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우와! 정말이에요, 숀?”
“물론이지. 오늘 내 인생에서 정말 뜻깊은 일을 해냈으니까!”
여전히 들뜬 숀 코너리를 보고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사실 선제골 어시스트는 정말 잘못 맞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숀에게로 제대로 굴러갔고, 그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근데 이러다 초대 제임스 본드가 바뀌는 거 아냐?’
부르릉- 끼익!
갑자기 버스가 요동치면서 멈췄다.
난데없는 사태에 모두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기름이 떨어진 건가?”
“아냐. 보닛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혹시 몰라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허둥지둥 차에서 내리고, 운전기사는 보닛을 열어 차량 상태를 살펴보았다.
한동안 이리저리 살펴보던 운전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엔진이 퍼진 것 같아요. 바로 정비소로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수리하는 데 오래 걸리나?”
“물론이죠.”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들은 버스비 감독은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 경기를 잡았다 싶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군. 할 수 없지. 맨체스터까진 기차를 타고 갈 수밖에.”
“기, 기차요?”
준영이 화들짝 놀라자, 버스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준영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던컨이 놀려 댔다.
“혹시 기차를 한 번도 안 타 본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이걸 이야기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준영의 머릿속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다시는 기차를 타지 않았다.
딱히 탈 필요가 없기도 했고.
“존, 뭔가 불편한 게 있으면 기차를 타지 않아도 돼. 맨체스터로 가는 방법이 기차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뇨. 저 혼자 특별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기차, 같이 타고 가죠.”
버스비의 친절한 배려에 준영은 사양했다.
꺼려진다고 해서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도 아니고…….’
이참에 트라우마를 극복하자.
그리 결심한 그는 모두와 함께 기차역으로 향했다.
***
치익- 폭폭-
요란스럽게 달려온 증기기관차가 조심스럽게 플랫폼에 멈춰 섰다.
‘어릴 때 장난감이랑 비슷하게 생겼군.’
잠시 기차를 바라보던 준영은 동료들과 함께 객차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저길 봐. 던컨 에드워즈다!”
“토미 테일러도 있어!”
“저 큰 녀석은 이번에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는 동양인이지?”
승객들이 선수들을 알아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버스비의 아이들.
영국 축구의 아이돌인 그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문이나 TV는 물론, 영화관의 뉴스에서도 그들의 활약이 소개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승객들은 죄다 몰려와서 악수를 청하거나 사인을 요청해 왔다.
아직은 무명인 숀과 동양인인 준영도 승객들, 특히 아가씨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키도 크고 체격도 늠름한 데다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왜 하나 싶다가도 이 맛에 축구를 계속하게 된다니까.”
“대중은 스타를 동경하니까요.”
정작 동경받는 스타플레이어 던컨 에드워즈는 사람들의 관심에 그리 큰 흥미가 없었다.
적당히 악수해 주고, 대강 사인해 준 다음, 역 앞에서 산 주전부리를 먹는 데 열중했다.
“이 열차는 곧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모두 착석해 주십시오.”
차장과 열차 승무원들의 만류에 돌발 사인회는 중지되었다.
그리고 기차는 연기를 토하고 기적을 울리며 천천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속도가 높아지고 덜컹임이 잦아지자, 준영의 낯빛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젠장, 괜찮다 싶더니…….’
아까 기차에 탈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금방 문제가 벌어졌다.
“이봐, 존, 괜찮아?”
“멀미가 오면 귀 뒤쪽을 만져 주면 좋은데…….”
콰르르릉!
뿌옇게 흐려진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비가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투명한 창문에 비친 준영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기차와 소나기.
지우고 싶던 어린 시절의 악몽에 그의 심장이 오래된 철로를 달리는 증기기관차처럼 요동쳤다.
‘제길, 안 돼…….’
준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흔들리는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두워진 눈앞으로 오래전 악몽과 같은 기억이 괴물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으으윽…….”
“존, 왜 그래? 어이! 존!”
도망쳤다. 다급한 동료들의 외침을 뒤로하고서.
하지만 끔찍한 기억 속과 똑같은 상자 속에서는 달아날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
올드 트래퍼드 부근의 클럽.
흥겹게 울리는 재즈와 달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그다지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숀 코너리가 시즌 첫 골 기념으로 쏜 술도 아직 넘기지 못한 이가 있을 정도.
“존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쯤이면 무사히 집에 갔겠지. 저택 고용인이 데리러 갔을 테니까.”
“가서도 괜찮은 건지…….”
준영은 맨체스터까지 오지 못했다.
중간에 들른 역에서 내렸고, 녀석이 걱정되었던 던컨도 같이 내렸다.
프레드로 저택에 전화를 해서 이곳으로 존을 데리러 오라고 연락하겠다면서.
“내내 진땀을 쏟고, 안절부절못하다 화장실에서 몇 번이나 토하고……. 경기는 멀쩡하게 뛴 녀석이 왜 그랬던 걸까?”
토미 테일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술을 홀짝였다.
“기차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모양이지.”
숀은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 주변에도 사이렌이나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잖아. 전쟁 때 독일 놈들 폭격 탓에 말이야.”
젊은 세대일수록 전쟁 트라우마가 적다.
전쟁 기간 중에 어린아이들은 안전한 시골 지역이나, 바다 건너 미국에 피난 보내졌으니까.
그렇다고 전쟁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없는 건 아니다.
돌아오니 집은 불타거나 무너졌고,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경우도 있었으니까.
전후의 가난과 지긋지긋한 배급도 한몫했다.
“리틀 존도 어릴 때 전쟁을 겪었을걸. 혹시 모르지. 타고 가던 기차에 쪽바리들(Japs)이 폭탄을 떨어트렸는지.”
“어쩌면 기차를 타고 안 좋은 곳에 끌려갔던 걸지도 몰라요.”
바비 찰튼은 군 복무 중에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독일 강제 수용소에 있던 유대인들의 참상을 기록한 기록 영화.
그것은 정말 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존은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왔다고 하잖아요. 듣자 하니 빨갱이들도 정치범들을 수용소로 보낸다던데…….”
“생각해 보니 우린 그 녀석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군.”
존은 달랐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자신들을 대했다.
같이 잘 어울리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주고.
당장 숀만 해도 존의 격려를 받았고, 그 덕분에 오늘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큰 빚을 졌는데, 지금 녀석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군.”
숀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처럼 술이 쓴 적이 없었다.
***
저도 오래전에 안 좋은 사고를 겪은 적이 있는데, 그 뒤로 근처도 가기 싫더군요. 이런 경험은 저만 그런 건 아닐 거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