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51.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경기의 향방이 걸린 판정.
그래서일까.
심판은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며 위치를 살폈다.
과연 안인가, 밖인가.
파울이 일어난 곳의 잔디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던 끝에…….
“프리킥이다!”
“휴우, 다행이다!”
울버햄프턴 팬의 안도의 한숨과 맨유 응원단의 아쉬운 탄식이 교차했다.
“아깝군. 좀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면…….”
“괜찮아요, 숀. 이것만 해도 충분히 소득이에요.”
준영은 아쉬워하는 숀을 위로했다.
“그보다 발목은 괜찮아요?”
“뛰는 덴 문제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약간 섭섭하긴 했지만, 맨유 입장에서도 나쁘진 않았다.
골대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잡은 찬스니까.
“누가 찰까? 던컨이랑 리틀 존이 같이 서 있는데?”
“당연히 리틀 존이지!”
“맞아. 저 녀석 슈팅은 기가 막히다고!”
“하지만 던컨도 그에 못지않다고!”
원정석의 맨유 팬들이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가운데, 준영은 던컨과 프리킥 처리를 놓고 논의하고 있었다.
“훈련했던 대로 하면 되는 거지?”
“그래, 분명히 저 노땅 아저씨가 앞으로 튀어나올 거야. 그때를 노리면 돼.”
던컨은 차는 척하고 빠지고, 준영이 마무리를 지을 계획이었다.
자근자근 발을 구르던 던컨은 공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흥, 던컨 녀석 쓸데없는 동작으로 시선을 끄는군. 네가 안 찰 거라는 건 알고 있…….’
뻐엉-!
호쾌한 폭음과 함께 던컨이 날린 슈팅이 빌리 라이트의 귀 옆을 스치며 날아갔다.
깜짝 놀란 골키퍼가 몸을 날렸지만, 무회전으로 날아간 슈팅은 그가 손 닿을 수 없는 위치로 궤적을 틀었다.
터엉!
“아, 이런 C발!”
던컨은 골대를 맞고 공이 나가 버리자 펄펄 뛰었다.
들어갔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아까웠던지, 준영이 훈련이나 시합 때 종종 내뱉던 한국어가 튀어나올 정도.
정말이지 이 상황에서 그 단어보다 더 찰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이 자식이…….’
준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한 대로 안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 너 언제 무회전 익혔냐?”
“그거? 네가 차는 거 보고 좀 연습했지.”
이게 좀 연습해서 된다니.
학창 시절부터 연습해서 감과 요령을 익혀 온 준영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천재라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미안. 실전에서 써 보는 건 처음이라서. 다음엔 꼭 성공시킬게.”
준영이 뭐 때문에 짜증을 내는지도 모르고, 던컨은 찡긋 미소를 지었다.
웃는 낯에 차마 침을 뱉을 수 없었던 준영은 쥐어박는 걸로 대신했다.
***
전반전이 끝났다.
양 팀 모두 득점을 올리지 못했지만, 골대를 두 번이나 맞힌 유나이티드의 아쉬움이 더 컸다.
“다시 생각해도 아깝단 말이야. 골대만 맞지 않았더라도…….”
“그러게 말이에요.”
동병상련인 토미와 던컨이 라커룸에서 연방 아쉬움을 토했다.
버스비 감독은 그들을 다독이며 위로했다.
“이미 지난 거니 잊어버리도록. 아직 후반전이 남아 있으니까.”
후반전에서 결판을 낸다!
이를 위해 그는 전반에는 아껴 두었던 자원을 활용하기로 했다.
“존, 후반전에 공격적으로 전진하도록 해.”
“그럼 수비가 좀 불안해지는데요?”
전반전에 준영이 경합해 본 바에 따르면 울버햄프턴 공격수들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침착하고 노련했으며 연계도 뛰어났다.
전반에 섣불리 전진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이 앞으로 나갔을 때, 그들의 역습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까?
“그 공백은 바비가 메워 줄 거야. 순간 판단력이 좋고 수비 능력도 괜찮으니까.”
‘바비 찰튼 경이라면 확실하겠군.’
오늘 경기 하프백으로 나와서도 수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미리 울버햄프턴의 패스를 끊어 냈다.
또 수비하기 좋은 지점에 미리 자리를 잡고 상대가 섣불리 나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오늘 우리 팀에서 제일 부지런하게 뛰었죠.”
준영의 칭찬에 바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친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게 후반전도 문제없어 보였다.
“확실히 세트 플레이 때 장신 플레이어 둘이 서 있으면 볼만하겠군요.”
“울버햄프턴 쪽에서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겠지.”
머피 코치와 버스비 감독의 생각을 준영은 내심 회의적으로 보았다.
‘피지컬만으로 상대 문전을 공략하긴 힘들어.’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빌리 라이트는 굉장한 파이팅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가 보여 주는 활약에 울버햄프턴 선수들도 덩달아 투지가 올라서 몸싸움이 쉽지 않았다.
이건 이미 전반전에 있었던 세트 플레이에서도 경험해 봤다.
그때 준영은 빌리 라이트와 어깨싸움을 벌여 보면서 확실히 알았다.
‘그 아저씨 근육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필드에서 수없이 단맛, 쓴맛 다 보면서 만들어진 실전형 근육이었지.’
그야말로 축구에 최적화된 몸.
마치 근섬유 한 가닥마다 연륜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전반의 세트 플레이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건 그 때문.
다른 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단지 키와 등빨로 밀어붙이거나, 주눅 들게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군.’
테크닉.
푸스카스가 최초로 썼던 드래그 백처럼, 빌리 라이트의 투지 있는 수비를 벗겨 낼 수 있는 번득이는 개인기가 필요할 것이다.
얼마 후, 하프타임이 끝났다.
다시 양 팀 선수들이 필드로 나와 포진하고, 심판의 휘슬이 울리며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큰 원숭이가 앞으로 나오는데?”
“공격적으로 써먹겠다 이거군.”
울버햄프턴 선수들의 예상대로 미드필드 지역까지 전진한 준영은 던컨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울버햄프턴 선수들의 강한 마크를 받았다.
차징과 태클은 물론이고 발목을 밟거나, 정강이를 노리고 걷어차는 등 위협적인 플레이도 서슴지 않았다.
“흥, 여기 와도 네가 먹을 바나나는 없는…….”
준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빈정대던 상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공을 두고 양다리를 휘젓는다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따돌려 버렸으므로.
‘빌어먹을!’
준영의 헛다리 짚기를 본 빌리 라이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정체불명의 개인기.
그걸 본 순간 자신에게 굴욕을 줬던 매직 마자르의 마법사가 떠올랐다.
‘너도 그 자식과 같은 부류냐!’
미래에서 온 마법사를 노려보는 검투사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
“와, 방금 봤어?”
“저런 기술도 있었구나!”
준영이 펼친 헛다리 짚기를 처음 본 관중들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한순간 서커스 묘기라도 본 것 같았으니까.
시선을 빼앗긴 건 관중들뿐만이 아니다.
필드에 있는 울버햄프턴 선수들도 깜짝 놀랐다.
“신기하냐? 또 한 번 보여 줘?”
준영은 연속해서 헛다리 짚기를 펼치며 마크하는 선수를 따올렸다.
“우와아!”
관중석에서 나온 놀란 환호성.
그 환호성이 높은 만큼 울버햄프턴 선수들의 얼굴도 붉어졌다.
“젠장, 원숭이 재롱 따위에 농락당하다니!”
“뭐 하고 있어! 그 꺽다리 녀석 발목을 날려 버리라고!”
독이 오른 늑대들이 펄펄 뛰었을 때, 날아든 태클을 피한 준영은 기습적으로 문전에 패스를 찔러 넣었다.
“나이스 어시스트!”
공은 울버햄프턴 골대로 달려가 있던 던컨의 앞으로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완전 노마크로군.’
당황하는 상대 골키퍼를 보며 미소 지은 던컨은 곧바로 슈팅을 날렸다.
뻐엉, 퉁-!
“아, 젠장……!”
슛은 골대가 아닌 영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마지막에 빌리 라이트가 육탄 방어로 막아 냈기 때문.
“이 머저리들이! 정신 안 차릴 거냐?”
대장 늑대의 호통에 필드에 있던 늑대 군단 전원이 진땀을 쏟았다.
동양인이 보여 주는 개인기에 낚여서 요주의 대상인 던컨이 파고들어 온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깝군요. 좋은 기회였는데.”
“그래도 효과를 보이고 있지 않나.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있으니 말이야.”
아쉬워하는 머피 코치와 달리 버스비는 만족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프타임 때 머피가 피지컬을 언급했지만, 그는 피지컬만으로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리틀 존은 피지컬만큼이나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지.’
허더스필드의 빌 섕클리 감독이 말했다.
리틀 존의 개인기는 매직 마자르의 플레이어들보다 뛰어나다고.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 빼어난 테크닉이 피지컬과 더불어 상대에게 부담이 되겠지.’
방금 보여 주었던 것처럼, 준영이 상대 진영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그가 시선을 끌고, 상대 수비를 유인하는 만큼 이쪽은 골을 넣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득점에 능한 플레이어들이 있지.’
토미 테일러와 던컨 에드워즈, 데이비드 펙.
후반전엔 수비에 더 치중하고 있지만, 바비 찰튼 역시 공격 능력이 좋은 플레이어다.
이런 영재들을 상대로 백전노장 빌리 라이트가 과연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두드리라. 그럼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의 한 구절.
버스비는 그 말을 믿었다.
축구 역시 골문을 계속 두드리다 보면 결국 골이 터지기 마련이니까.
***
준영의 화려한 개인기로 후반전을 시작한 맨유는 이후에도 공세를 그치지 않았다.
어찌나 공세가 거센지, 울버햄프턴 쪽에서는 역습은커녕 중앙선을 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완전히 가둬 놓고 패는군.”
“젠장, 왜 이렇게 얻어맞고만 있는 거야?”
“공을 뺏어야 역습을 하든가 하지.”
몇몇 관중들의 푸념처럼, 울버햄프턴은 리바운드 볼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페널티 박스 밖으로 나간 공은 대부분 맨유 쪽에서 선점했고, 그나마 확보한 공도 성급하게 공격진에게 건네다 차단당하곤 했다.
‘뭐 하나 풀리는 게 없군.’
그야말로 발에 땀나게 쏘다니며 수비하는 빌리 라이트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좀 전에 질책을 했음에도 팀원들은 동양인이 보이는 개인기에 현혹되어 제대로 상대 선수를 마크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던컨을 비롯해 맨유에서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들이 마음껏 헤집고 다녔다.
당연히 수비는 서둘러 막거나 걷어 내기에 급급할 뿐.
공격이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우와아아아!”
관중석에서 또다시 큰 환호성이 일었다.
공을 잡고 있던 준영이 또 한 번 절묘한 개인기로 상대를 제쳐 버린 것.
그런데 이번 개인기는 정말 놀라운 묘기였다.
발뒤꿈치로 공을 뺀다 싶더니, 발을 꼰 상태에서 공을 앞으로 교묘히 빼내 치고 나갔다.
자세히 보지 못했다면 대체 어떻게 공을 갖고 나갔는지도 모를 정도.
‘맙소사, 발에 공 붙이는 자석이라도 달고 있는 놈인가?’
발바닥으로 공을 긁는 기술 하나로 자신을 농락했던 푸스카스 이상의 수준!
하지만 지금은 놀랄 틈이 없었다.
묘기 같은 개인기로 마크맨을 떨쳐 낸 동양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저건… 슈팅이다!’
확신한 빌리 라이트는 만사 제쳐 놓고 준영이 날리는 슈팅 코스로 몸을 던졌다.
뻐어엉-!
마치 대포를 쏘는 듯한 요란한 폭음과 함께 허공에 하얀 궤적이 그어졌다.
‘늦었다!’
빌리가 건드릴 틈도 없이 슈팅은 그의 앞을 지나쳐 골대를 향해 벼락같이 날아갔다.
터어엉-!
“또 골대다!”
“젠장, 오늘 대체 몇 번째야!”
오늘 행운의 여신은 울버햄프턴의 편인가.
코앞에서 준영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가는 광경을 본 숀 코너리는 분한 나머지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빌어먹을! 좀 작작하란… 아니?”
삐거걱- 우지끈!
준영의 슈팅을 맞은 오른쪽 골포스트가 휘청인다 싶더니 쓰러져 버렸다.
***
헛다리 짚기 자체는 이미 1920년대쯤에 나왔습니다. 다만 그 당시 축구 환경이 화려한 개인기를 쓸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90년대에 와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