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45. 더블린 참사
역전을 만들어 낸 맨유는 경기 막판에 토미 테일러의 추가 골까지 만들어 냈다.
최종 스코어는 4 대 2.
최근 연패 사슬을 끊어 냄과 동시에 1위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달콤한 승리를 거둔 선수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러피언 컵 예선을 준비할 수 있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뮌헨 비행기 참사의 원인이 되었던 1957-1958 유러피언 컵 원정.
그렇기에 준영은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를 모르는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은 준영의 긴장을 풀어 주려 애썼다.
“걱정 마, 리틀 존. 샴록 로버스는 우리 상대가 되지 않는 팀이야.”
“더블린 원정은 전혀 걱정할 게 없다고.”
“에이, 전혀는 아니지.”
사실 맨유 쪽에선 경기 외적인 문제로 더블린 원정을 우려하고 있었다.
바로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국민감정.
아일랜드는 오랜 세월 영국의 식민지로 수탈당하고, 19세기 대기근 때 200만 이상이 아사하거나 해외 이민을 떠났다.
이렇다 보니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악감정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더구나 북아일랜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 IRA(* 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주도한 무장 투쟁 단체)의 활동도 여전했다.
“지난 7월만 해도 더블린의 피닉스 파크에서 폭탄이 터졌어. 8월에 리머릭에선 1차 대전 영국군 참전자 기념관이 박살 났고.”
“재수 없으면 경기 중에 총알이나 폭탄이 날아올 수 있다는 거야?”
“에이, 설마 자기 나라 선수가 뛰는 팀에 그러겠어?”
“걔들 입장에선 리암은 배신자로 보일지도?”
“그런 걸로 따지면 북아일랜드 출신인 재키가 제일 위험하지.”
훈련 중에 동료들이 두런두런 떠드는 이야기에 준영도 괜히 긴장되었다.
‘뮌헨이 아니라 더블린에서 사고가 터지는 거 아냐?’
맨유가 더블린에서 무슨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미 역사는 바뀌고 있다.
맨유에 입단한 최초의 한국인이 박치성이 아닌 이준영 본인이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런 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비 효과라는 것도 있으니까…….’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부른다는 이론이지만, 반드시 그리된다는 보장은 없다.
거기다 폭풍이 아닌 순풍이 불어올지 누가 아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걱정이 많으면 마음이 무거워지니까.’
뭔가 부담거리가 있으면 몸도 가볍게 움직이지 못하는 법.
이에 준영은 근심을 접어 두고 훈련에만 집중했다.
***
2026년 9월 25일.
창밖에 비치는 런던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던 손님들은 방금 호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이에게 눈길을 모았다.
“손웅민이잖아!”
“오, 토트넘의 레전드 소니!”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영국과 유럽을 주름잡는 슈퍼스타.
그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40대 중년의 신사에게 다가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그래, 그동안 잘 지냈냐?”
슈퍼스타 손웅민을 반갑게 맞은 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앰버서더 박치성.
이번에 대한축구협회에서 전략 본부장을 맡게 된 박치성은 유럽파 선수들을 직접 체크하기 위해 영국부터 들렀다.
“요즘 프리미어에 있는 젊은 애들은 어떠냐?”
“열심히 하긴 하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애들은…….”
박치성은 손웅민이 중간에 말을 흐리자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왜 그래? 말하기 힘든 거라도 있어?”
“그게 좀…….”
망설이던 웅민은 궁금한 기색을 보이는 선배에게 물음을 건넸다.
“선배님, 혹시 이준영이라고 아세요?”
“누군데? 혹시 영국에서 뛰고 있는 애야?”
“역시 모르고 계시네. 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되다니? 대체 뭔데?”
“그게 말입니다…….”
손웅민은 최근에 겪은 기이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북미 월드컵이 끝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국가대표 후배 이준영.
두 달 전 녀석이 갑자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실종되었다.
웅민은 녀석의 행방을 찾느라 틈만 나면 맨체스터 근방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준영이요? 그게 누굽니까?’
녀석을 애타게 찾던 맨유 관계자들도, 심지어 녀석의 에이전트인 앙드레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행방불명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이나 언론도 마찬가지.
분명 사고 현장을 수색한다고 설쳐 놓고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태도에 손웅민은 격분했다.
사람이 실종되었는데 찾을 생각은 않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다니!
‘기가 막힌 건 진짜 사라져 버렸다는 거다.’
자신의 폰에 저장된 사진에서 녀석이 있던 부분만 귀신같이 사라졌다.
월드컵에서 녀석이 넣은 골도 다른 선수가 기록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 전에 대표팀 엔트리에 올라가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국내외에 있던 녀석의 기록 자체도 사라졌더라고요.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존재가 사라졌다고 할까.”
손웅민의 말을 들은 박치성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웅민아, 너 혹시 약 하냐?”
“예? 아니, 선배님! 제가 그럴 놈으로 보입니까?”
웅민이 억울한 표정으로 버럭 역정을 냈다.
치성은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는 건 아는데, 워낙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니 그렇지. 혹시 피곤해서 한바탕 꿈이라도 꾼 거 아냐?”
“꿈이요?”
“그래, 꿈이 너무 생생해서 실제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잖아.”
“꿈은 아닙니다. 그 녀석은 진짜…….”
그때 묘한 이채가 사방을 쓸고 지나갔다.
아무도 그 빛을 보지 못했지만, 손웅민만은 뭔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방금 뭐였지?’
그보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상당히 열을 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저기, 선배님,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죠?”
“이상한 꿈 이야기. 현실과 구분이 안 돼서 난감했다며?”
“그랬습니까?”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웅민이 어리둥절해할 때, 테이블에 올려 둔 박치성의 휴대폰에서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누가 보냈나 살펴보던 치성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허, 이런 사진이 있었네.”
“뭔데요?”
“맨유 쪽에서 옛날 기록을 뒤지다가 찾은 거래.”
치성은 메신저와 동봉된 사진 파일을 띄워 올렸다.
오래된 사진에는 키가 큰 동양인이 과거 버스비의 아이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57년 9월 25일 유러피언 컵 예선전 직전에 찍은 거라고.
“존 Y. 리…….”
“그래, 아시아 최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지.”
20여 년 전, 박치성이 맨유에 입단하면서 세상에 다시 알려진 전설의 코리안리거.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군.’
아니, 그걸 넘어서 친근한 느낌마저 드는 건 어째서일까?
손웅민은 한참 동안 낡은 사진 속의 인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더블린 북쪽에 위치한 델리마운트 파크.
곧 있으면 이곳에서 샴록 로버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러피언 컵 예선 1차전이 열린다.
“자, 그대로 자세 잡고… 됐습니다.”
경기 시작 직전, 준영은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의 표정은 밝았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더블린의 치안은 나쁘지 않았다.
과격분자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아일랜드 정부에서 여러모로 신경을 쓴 덕분이다.
선수들에 대한 경호도 좋았다.
지금 이 경기장에도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중이다.
그래도 막을 수 없는 건 있었다.
“우우우- 우우우우우-!”
4만 5천여 명의 관중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야유와 욕설을 쏟아 냈다.
“꺼져라, 해적 새끼들!”
“공 찰 놈들이 전쟁 때 다 뒤져서 중국 놈을 불러왔냐?”
“원숭이는 동물원으로 가!”
준영은 여기서도 화젯거리였다.
동양인 선수, 그것도 웬만한 백인보다 체격이 큰 선수였으니까.
다만 아직 실력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했다.
‘하긴, 지금은 21세기처럼 인터넷으로 빠르게 정보가 오가는 때가 아니니까.’
아무튼 준영은 관중들의 야유와 욕설에 덤덤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들긴 해도 21세기의 악랄한 패드립과 욕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
삐익-
벨기에 출신 주심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홈 관중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샴록 로버스는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때릴 때마다 관중석에선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잘한다, Hoops(* 샴록 로버스의 별칭)!”
“영국 쥐새끼들을 작살 내 버려!”
이렇게 열성적인 홈 관중들의 환호성은 30분이 넘게 이어졌다.
그러다 전반 36분,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샴록 진영을 파고든 던컨의 패스를 받은 토미 테일러가 선제골을 터트린 것이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준영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원정 경기라 맨유가 신중하게 플레이를 한 점도 있지만, 샴록은 홈 이점만 믿고 너무 전진해 왔다.
거기다 공수 간격도 지나치게 넓어서 던컨이 마음껏 활개 치기 딱 좋았다.
“괜찮아. 이제 전반이라고!”
“후반전에 승부를 내면 돼!”
전반을 1 대 0으로 원정 팀 맨유가 앞서가기 시작했지만, 샴록 선수들과 홈 관중들은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하지만 후반 들어 그들의 표정은 급격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후반 6분과 12분에 리암 휄란이 연속 골을 터트리며 스코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야 인마! 너도 아일랜드인이잖아!”
“배신자 같으니!”
관중들이 리암에 대한 원성을 터트리는 사이, 샴록 선수들은 만회 골을 만들어 내려고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역습은 깨알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공격수들을 향해 빠르게 넘겨준 패스나 크로스가 중간에서 다 끊겨 버렸음으로.
그 공격 차단의 8할 이상이 준영의 작품이었다.
샴록 공격수들은 공을 차지하기 위해 준영과 매번 부딪쳤지만, 번번이 몸싸움에서 밀리거나 공중전에서 압도당했다.
“맙소사, 꿈쩍도 안 하잖아.”
“저거 혹시 영국 놈들이 만든 로봇 아냐?”
“인조인간이겠지. 거 영국 놈들 소설도 있잖아. 프랑켄슈타인인가 뭔가.”
이렇게 샴록의 공격이 좌절되는 사이, 맨유는 연거푸 득점을 올렸다.
후반 18분에는 선제골을 터트린 토미 테일러가 다시 한 번 던컨의 패스를 받아 추가 골을 터트렸다.
여기에 26분엔 윙어인 조니 베리가 다섯 번째 골을 터트렸고, 이후 1분도 안 되어 데이비드 펙의 골이 터졌다.
6 대 0.
너무 크게 벌어진 격차에 샴록 선수들의 전의는 바닥에 떨어졌고, 관중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순식간에 스코어가 벌어지면서 경기는 거칠어질 틈도 없었고, 갈수록 실력 차가 드러나면서 야유조차 힘을 잃었다.
이 와중에 21세기에서 온 인조인간(?)이 양민 학살의 정점을 찍었다.
미드필드 지역에서 가로챈 공을 직접 드리블해 들어가 수비수들을 모두 제치고, 뛰어나온 골키퍼를 로빙슛으로 농락해 버린 것.
화려한 21세기의 테크닉에 선수고 관중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맙소사! 뭐 저런 게 다 있냐.”
”오늘 이길 수 있다고 한 놈이 누구야?”
“그냥 집에 있을걸.”
폭동을 우려해서 모인 경찰과 군인들이 무안하게도, 관중들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맥없이 자리를 떠났다.
준영이 혹시나 우려했던 더블린 참사는 없었다.
아니, 샴록 로버스 팀 역사에서는 더블린 참사라고 남을 만했다.
***
샴록 로버스는 아일랜드 리그와 FA컵에서 최다 우승을 거둔 아일랜드 최강팀입니다. 동네북 수준이긴 한데, 2011년 유로파 리그에선 세르비아의 FK파르티잔을 잡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