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43화 (43/400)

Round 43. 여왕의 팀

9월 21일 오후 3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중요한 9라운드 아스날 FC전이 시작되었다.

“힘내라, 유나이티드!”

“오늘은 반드시 이겨야 돼!”

시작부터 열띤 응원을 보내는 홈팬들의 시선은 필드로 돌아온 거인에게 쏠려 있었다.

던컨과 나란히 하프백으로 출전한 존 Y. 리.

다들 데뷔전 때 보여 줬던 활약을 다시 보여 주기를 기대했다.

그렇게 기대하는 사람 중에는 알버트 남작과 그의 손녀들, 그리고 준영과 절친한 이억관도 있었다.

“달려라, 대한의 건아야!”

“你是亞洲的骄傲!”

“がんばれ, ゾーン!”

태극기를 힘차게 휘날리던 이억관은 낯선 응원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히 둘러보니, 주변에 동양인들이 몇몇 보였다.

차이나타운에서 본 낯익은 이웃도 있고, 일본인 유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도 있었다.

다들 국적도 다르고 직업과 나이도 제각각이지만, 준영이 선전하기를 기대하는 바람은 같았다.

서양인들보다 월등한 체격을 가진 동양 청년의 빼어난 활약은 그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으므로.

“하하, 이 군이 정말 큰일을 해냈구만.”

왠지 어깨가 으쓱한 기분이 든 억관은 더욱 힘차게 태극기를 휘둘렀다.

때마침 준영이 아스날의 공격수 데이비드 허드에게서 태클로 공을 가로챘다.

“이건 파울이야!”

쓰러진 허드가 강하게 어필했지만, 심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준영이 먼저 태클로 공을 끊어 냈고, 허드는 이후에 걸려 넘어졌을 뿐이니까.

“젠장, 분명히 파울인데…….”

“투덜대지 말고 수비를 해!”

아스날의 주장 데니스 에반스가 수비수들을 다그쳤다.

허드에게서 공을 빼앗은 동양의 거인이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덩치도 큰 놈이 뭐가 저리 빠르담!’

아차 하는 사이 중앙선을 넘어왔다.

얼마나 빨리 치고 올라가는지 전방에 있던 맨유 공격수들, 리암 휄란이나 데니스 바이올렛, 토미 테일러가 다소 허둥댈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허둥대고 있다고 해서 안도할 수 없었다.

하나, 둘, 셋…….

준영은 하프백부터 접근하는 수비수들까지 스피드로 차례차례 따돌렸다.

심지어 좁혀 나오는 골키퍼까지 제쳐 버리고는 빈 골대에 공을 가볍게 밀어 넣었다.

“골?”

“이런 세상에……!”

“도대체 몇 야드를 치고 달린 거지?”

보란 듯이 골 세리머니를 펼치는 준영.

그를 바라보는 관중들의 심정은 단 하나의 단어로 함축할 수 있었다.

경악.

지금 올드 트래퍼드에 있는 누구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와아아아아아아!”

뒤늦은 환호성이 올드 트래퍼드에 울려 퍼졌다.

중계하던 BBC 맨체스터 라디오 캐스터도 골이 터진 순간 말을 잃었다가, 관중들의 환호성에 정신을 차렸다.

「미, 믿기 힘든 슛이 나왔습니다. 유나이티드의 5번 존 Y. 리, 홀로 70야드가 넘게 공을 몰고 가 골을 성공시켰습니다!」

캐스터가 침을 튀기는 가운데, 준영은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오, 리틀 존! 이 미친 자식!”

”하하핫! 제대로 저질렀구만!”

“오늘 맥주는 네가 쏘는 거다?”

흥분한 맨유 선수들과 달리 아스날 쪽은 스턴 상태에 빠졌다.

선제골을 너무 말도 안 되게 먹었다. 더구나 그것도 공격수가 아닌 하프백에게!

“이런 얼간이들! 수비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가 이 꼴을 보려고 맨체스터까지 온 줄 알아!”

충격에서 깨어난 아스날의 원정 팬, 거너스는 뒤늦게 울분을 토했다.

아스날의 감독 잭 크레이스턴은 분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빨랐어. 너무 빨랐다고!”

주장인 에반스나 다른 수비수들이 제대로 대응할 틈이 없었다.

놈은 조금도 멈칫하거나 망설이지 않았으니까.

동료 공격수들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 스피드를 올려 수비수를 문자 그대로 탈탈 털었다.

“럭비 선수만큼 좋은 체격에 빠른 스피드, 더구나 양발잡이에 뛰어난 개인기까지……. 정말 불공평한 스펙을 가진 놈이야.”

준영을 바라보는 크레이스턴 감독의 억울한 시선에는 부러움과 탐욕도 섞여 있었다.

사실 크레이스턴은 준영이 허더스필드에서 활약할 때부터 관심을 두고 지켜봤다.

하지만 영입은 실패했다.

동양인 선수라고 하니 구단 이사들은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선수가 낫지 않느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

‘애초에 영입도 안 할 놈들이!’

재정난을 핑계로 임원들은 우수한 선수 영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52-1953시즌 우승을 마지막으로 아스날이 고만고만한 팀으로 전락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여왕 폐하의 응원을 받는 팀이다. 절대 맥없이 쓰러지지 않아!”

전의를 불태우는 건 크레이스턴 감독만이 아니었다.

수치스러운 선제골에 잠시 충격에 빠졌던 선수들도 눈을 벌겋게 뜨고 부지런히 공을 쫓아다녔다.

그들의 뜨거운 의욕은 과감하고 적극적인 플레이로 이어졌다.

깊은 태클과 거칠기 짝이 없는 차징.

이 시대 영국 축구가 상당히 거친 편이었지만, 아스날은 그 이상이었다.

거기다 최전방 공격수에게 공을 전달하기 위해 길고 단순한 롱 패스를 뻥뻥 올려 댔다.

‘이게 아스날 축구라고? 전형적인 잉글랜드 뻥축에 소림 축구잖아!’

재미있고 아름다운 축구.

21세기 아스날에 뿌리내린 프랑스식 아트 사커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에 준영은 당혹한 느낌마저 들었다.

‘뱅거 감독이 이 꼴을 본다면 뭐라고 하려나? 아, 그 할배, 지금은 코흘리개 꼬마인가.’

문제는 이 와일드한 아스날의 축구가 통한다는 점이다.

거의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거친 볼 다툼에 맨유의 젊은 선수들은 연방 쓰러지고 나뒹굴었다.

준영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유니폼을 잡아당기는 건 예사이고, 정강이를 노리고 들어오는 높은 태클에 걷어차일 뻔했다.

“흥, 덩치도 큰 놈이 계집애처럼 몸을 사리긴.”

태클을 날린 에반스의 빈정거림에 준영은 낯빛을 굳혔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쪽은 몸을 안 사리셔서 골을 처먹으셨나?”

“큭, 이게…….”

“진작 잘했어야지. 처맞은 뒤에 잘하면 누가 칭찬해 준대?”

에반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변했다.

부들부들 떨지 말고 주먹 한번 휘둘러 보시길.

하지만 준영의 기대와 달리 에반스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쳇, 주장 완장을 놀음으로 따진 않았구만.’

문제는 상대 주장에게 무안을 주었다고 경기 흐름이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는 점.

리드해 가고 있지만, 왠지 불길한 기분에 준영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

전반전은 준영의 원더골로 맨유가 1 대 0 앞선 상태로 끝났다.

하지만 경기의 주도권은 아스날에게 넘어가 버렸고, 그것은 후반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 아저씨들, 마치 싸우러 나온 것 같아.”

축구를 잘 모르는 카린도 그렇게 볼 정도로 아스날의 플레이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할아버지, 축구는 신사의 스포츠 아니었어요?”

“신사적으로 해야 하는 스포츠지.”

막내 손녀의 물음에 알버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상스러운 노동자들에게 신사적으로 하라고 권장한 게 축구, 이와 달리 점잖은 신사들이 갑갑한 규범에서 벗어나 무식하게 치고받는 게 럭비라고.

“아무튼 존 씨가 고생이네요.”

앤지는 아스날 선수들에게 거칠게 견제받는 준영을 바라보다 옆의 언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즈는 선제골이 터진 뒤부터 조마조마하게 경기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자칫 준영이 심하게 다치는 건 아닐까.

애를 태우던 그녀는 원망 어린 눈길로 심판을 쏘아보았다.

“너무해! 저렇게 경기가 거친데 주의조차 없다니!”

“몸싸움에 관대한 거겠지.”

앤지의 말대로 심판은 그 점에 있어서는 공평했다.

아스날의 거친 플레이는 물론, 맨유 선수들의 험한 맞대응도 묵인하고 있었다.

“아악!”

페널티 박스 안으로 떨어지는 공중볼을 처리하던 빌 포크스.

그는 달려들던 아스날 공격수 데이비드 허드와 머리가 부딪쳤다.

쓰러진 포크스와 달리, 허드는 비틀거리는 와중에서도 집중력을 발휘, 떨어지는 공을 발리로 때려 넣었다.

“우와아아아!”

허드가 터트린 동점 골.

간절하게 지켜보던 거너스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맨유 입장에서는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크윽, 허드 저 개자식……!”

“이봐요, 빌. 괜찮아요?”

준영은 빌 포크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뇌진탕 증세는 없다.

하지만 왼쪽 눈두덩이가 찢어져 피가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꿰매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은 경기 중이야. 한가하게 꿰매고 있을 틈이 어딨어?”

포크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러내리는 피를 슥 닦아 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교체도, 다친 선수는 치료한 후 재투입한다는 규정도 없다.

선수를 보호한다는 개념이 없는 이 시대의 현실에 혀를 차던 준영도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후반 이른 시간에 동점 골을 만들어 낸 아스날의 기세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으니까.

***

준영의 예상대로 동점 골 이후 아스날은 제대로 흐름을 탔다.

그들은 이참에 역전 골을 넣어 보자는 심산으로 더욱 거칠게 공세를 가해 왔다.

“젠장,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렇게 들이받고 싶으면 럭비나 하러 가!”

던컨을 비롯한 대다수 맨유 선수들은 아스날의 거친 공세에 기죽지 않았다.

다만 젊은 혈기에 지나치게 맞대응하다 정작 플레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다 쓸데없이 파울을 내면서 좋은 흐름을 탈 기회를 뚝뚝 끊어 먹곤 했다.

문제는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불필요한 파울을 낸다는 점이다.

삐익-!

후반 25분, 빌 포크스가 페널티 박스 왼쪽 외곽에서 볼 다툼을 벌이다 데이비드 허드를 거칠게 쓰러트렸다.

“돌아서지 못하게 하면 됐지, 발목은 왜 걷어차요?”

“저 개자식이 팔로 내 옆구리를 쳤다고!”

허드가 고의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보복 행위를 하는 건 옳지 않다.

21세기라면 자칫 퇴장까지 당할 수 있다.

‘아까 피를 봐서 그런가? 너무 흥분해선 좋지 않은데.’

무엇보다 파울을 한 위치도 썩 좋지 않았다.

아스날에 뛰어난 키커가 있다면 직접 꽂아 넣을 수 있는 위치였다.

뻐엉-!

아스날의 윙어 마이크 티디가 찬 슛이 기막힌 곡선을 그리며 골대로 날아갔다.

맨유 골키퍼 레이 우드가 몸을 날렸지만, 정확히 모서리로 떨어지는 슛을 막아 내지 못했다.

‘아이고, 불안한 예감은 어째 틀린 적이 없냐.’

준영이 질끈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아스날 진영은 광란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환호성을 지르며 들판의 똥개처럼 방방 뛰면서 세리머니를 펼치는 아스날 선수들.

거너스도 그야말로 포성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역전 골이다!”

“내가 이 골을 보려고 맨체스터까지 왔구나!”

Ta ra ra boom De Ay~

Ta ra ra boom De Ay~

The Arsenal’s won today~

원정석 여기저기서 승리의 응원가가 흘러나왔다.

그 고전적 멜로디는 준영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대기에 충분했다.

오기가 불끈 치솟은 것과 동시에 전의가 확 타올랐다.

“흥, 설레발치긴 일러.”

복귀전을 이대로 망칠쏘냐.

전반에 터트린 원더골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질 수 없었다!

***

Ta-Ra-Ra Boom-De-Ay는 영국의 가수 겸 댄서인 로티 콜린스가 1892년에 발표한 노래입니다. 원작자는 따로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분명하지 않습니다.

20세기 초에는 꽤 유명한 노래라서 아이들 동요, 군가, 응원가로 가사가 바뀌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