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42화 (42/400)

Round 42. 작은 소란

바닥에 작은 매트가 깔렸다.

간편한 차림으로 그 위에 선 리즈는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상태로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등을 펴서 숙였던 상체를 다시 들어 올렸다.

큰언니의 방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본 앤지가 말을 건넸다.

“그것도 운동이야?”

“응. 존, 아니 준이 가르쳐 준 거야. 몸의 중심축을 튼튼하게 해 준대.”

아침마다 운동 배운다고 어울리더니 저런 걸 배운 건가.

그냥 허리 좀 굽혔다가 일어나거나, 팔뚝으로 중심을 잡고 잠시 엎드려 있거나, 누웠다가 허리와 힙을 들어 올리는 게 고작이지 않은가.

“그게 무슨 운동이야?”

“모르니까 그리 말하지. 이거 보기보다 힘들어.”

그 단순한 동작들이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다고.

코웃음을 친 앤지는 리즈가 했던 동작들을 따라 해 봤다.

그리고 1분도 안 되어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진땀이 나는 마법을 경험했다.

“어때? 보기와는 딴판이지?”

“과연… 소련 스파이가 할 만한 훈련법이네.”

“너 아직도 그 소리니?”

앤지와 카린은 아직도 준영의 정체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름대로 감시를 하는 중이었다.

“준은 말이지. 좀 멀리서 온 사람일 뿐이야. 스파이도, 외계인도 아니라고.”

“준이라……. 그렇게 느끼하게 불러 줄 정도로 가까워졌구나.”

“느끼하긴. 그게 원래 그의 이름인걸.”

“글쎄, 굳이 원래 이름으로 공들여 불러 주려는 이유가 뭘까?”

앤지는 자신의 추궁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언니를 보며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애써 대답을 피하고 있지만, 반응은 정직했다.

“큰일이네. 언니가 소련 스파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다니.”

“그러니까 스파이가 아니래도!”

자매가 아웅다웅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하녀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들, 카린 아가씨 못 보셨어요? 조금 전에 침실을 들렀는데 안 보여서요.”

“카린이 안 보인다고요?”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간 걸까.

말다툼을 그만둔 둘은 곧바로 막내를 찾아 나섰다.

***

“집에 무슨 일 있나?”

저택으로 돌아온 준영은 부산하게 쏘다니는 프레드로 저택 사람들을 보았다.

“리즈, 무슨 일이죠?”

“카린이 갑자기 없어졌어요.”

하녀가 9시에 잠드는 걸 봤는데, 좀 전에 가 보니 없어졌다고.

“혹시 유괴인 건…….”

몸값을 노린 악한들이 몰래 저택에 들어와 납치해 간 건 아닌지?

‘아냐. 그 정도로 치안이 나쁘진 않은데?’

1950년대의 영국 치안은 21세기보다 훨씬 나았다.

전쟁의 영향으로 공권력이 여전히 강한 감도 있지만, 사람들이 순박하고 때 묻지 않은 원인도 있었다.

리즈도 유괴 같은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분명히 그 개구쟁이가 심심해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게 틀림없어요. 예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에 허전한 구석이 있어 그런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어머니는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할아버지나 언니들, 그리고 저택 고용인들이 신경 쓰며 보살펴 주고 있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터.

‘확실히 그럴 만해. 내가 있던 보육원에도 비슷한 녀석들이 있었으니까.’

장난이 빈번하거나, 툭하면 가출을 하거나.

평범한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관심을 갈구하곤 했다.

“나도 숨바꼭질 놀이에 동참해 봐야겠군요.”

“후후후, 잡으면 볼기라도 때려 주세요.”

“어휴, 그럴 수 있나요. 꼬맹이라도 여자앤데.”

21세기라면 아동 성추행으로 쇠고랑을 차고 말리라.

하지만 이 시대는 이전엔 활발했던 여권 운동이 주춤한 상태였다.

전쟁의 영향으로 젊은 남자들이 귀해지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제 문화가 대두되었기 때문.

“잘못했을 땐 따끔하게 꾸짖어 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버릇이 나빠지니까.”

“알았어요. 딱밤 정도는 먹여 주도록 하죠.”

준영은 저택 사람들과 함께 이곳저곳 뒤지며 카린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디에도 개구쟁이 꼬마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 참, 어딜 간 건지…….”

“나리, 경찰에 일단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체트리의 건의에 알버트 남작은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막내 손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늦장을 부렸다간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저택을 전부 살펴본 게 틀림없지?”

“예, 나리. 다 둘러봤습니다.”

‘아냐. 아직 안 본 곳이 있어.’

체트리가 틀렸다고 생각한 준영은 번득 떠오른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은 바로 자신의 방.

외출했을 땐 항상 열쇠로 잠가 두기 때문에 살펴보지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헉!’

“아앗!”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준영은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 방이 어지럽혀져 있고, 자신의 소지품도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으므로.

눈앞에 있던 범인은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하지만 침대 밑으로 숨어들기 전에 준영에게 덜미를 잡혔다.

“이봐, 꼬마 아가씨,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창문 열고 담쟁이덩굴 타고.”

“이야, 미래의 클라이밍 챔피언이 여기 있네.”

하하하, 이 녀석, 하하하.

실소를 흘리던 준영은 다시 자신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카린을 쏘아보았다.

“왜 들어왔냐?”

“그, 그게… 작은언니가 자꾸 존을 소련 스파이라고 우기잖아!”

“그래서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고 있었던 거다?”

준영의 물음에 카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외계인이란 증거를 찾고 싶었어. 카린은 존이 외계인이라 생각하거든. 외계인 맞지? 그치? 금성(Venus)에서 온 거지?”

“아니, 내 고향은 화성이야.”

사실 화성(Mars)이 아니라 경기도 화성이지만.

준영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문 쪽에서 날카로운 호통이 들려왔다.

“카린! 너 왜 여기에 있니!”

“크, 큰언니, 그게…….”

“맙소사!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멋대로 남의 방에 들어와서 어지럽혀 놓다니!”

리즈는 냉큼 카린을 무르팍에 엎어 놓고 거침없이 손바닥으로 볼기를 펑펑 후려쳤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섭고 엄한 그녀의 모습에 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으앙! 아파! 아프다고!”

“그러게 맞을 짓을 왜 하니? 갑자기 없어져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우엥!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카린의 울음소리에 다들 몰려들었다.

알버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좀 전에 경찰에 했던 신고 전화를 취소하러 돌아갔다.

원흉(?)인 앤지는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정리해 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철부지 동생이 폐를 끼쳤네요.”

“아뇨. 한창 호기심이 강할 나이니까. 근데 정리는 내가 해도 되는데요.”

“아뇨. 저도 책임은 있으니까요.”

준영은 앤지와 함께 방을 정리했다.

태블릿이나 노트북 같은 21세기의 물건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잠금장치가 있는 캐리어 속에 있어 개구쟁이 꼬마 아가씨가 열 수 없었다.

‘거참, 스파이나 외계인이라는 의심을 받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로 경각심이 생겼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일단 호기심이 왕성한 아가씨들부터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군.’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 했다.

준영은 결심을 굳혔다.

***

프레드로 저택의 서재.

카린 소동이 잠잠해진 후, 이곳으로 준영과 알버트, 그리고 그의 세 손녀들이 모였다.

“미래에서 왔다고요?”

“진짜?”

이미 알고 있는 알버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던 리즈.

이 두 사람과 달리 앤지와 카린은 눈이 동그래졌다.

“미래에서 왔다고요? 목적이 뭐죠?”

“예? 목적이라니요?”

“그러니까 누굴 암살한다든가, 역사를 바꾸려 한다든가.”

“나 참, 내가 무슨 터미네이터인 줄 알아요?”

“터미네이터?”

“미래에 개봉할 유명 SF 영화에 나오는 암살자 로봇이에요.”

앤지는 스파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진 못한 모양.

아무튼 준영은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이런저런 증거들을 꺼내 보였다.

“시, 실마릴리온……!”

“아직 출간이 안 된 책이라 하더군요.”

그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잡지들과 사진과 영상이 나오는 폴더블 스마트폰, 노트북까지.

“우와, 까만 거울에서 요정이 나왔어!”

“홀로그램이라고 하는 거야. 영화와 다르게 3차원 입체 영상이지.”

21세기 패션 잡지를 보던 앤지는 좀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옷은 지금이랑 그다지 차이가 없네.”

“왜? 21세기라면 다들 우주복이나 고무로 된 슈트 같은 걸 입고 있을 줄 알았어요?”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지 앤지는 나름 추리를 해 나갔다.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인류 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걸까?”

“아냐. 분명히 외계인이 침공해 왔기 때문일 거야.”

여전히 외계인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카린이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사실 이거 다 외계인의 기술인 거지? 그렇지?”

“정부나 대기업에서 외계인을 잡아 고문해서 기술을 뽑아낸다는 소문은 있어.”

“역시!”

‘이 녀석아, 그냥 드립이라고!’

인디펜던스데이 같은 영화를 보여 주면 카린은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믿어 버릴 기세였다.

“참고로 일러두자면 존은 미래에 이 저택의 집주인이란다.”

알버트의 말에 세 자매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 팔린 거야?”

“혹시 존은 우리 가문과 혈연이 있는 건가요? 부모나 조부모 중에 누군가 우리나 우리 아이들과 이어졌다거나…….”

앤지의 물음에 리즈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그렇다면 어쩌지?

다행히 준영의 해명으로 금방 안도할 수 있었다.

“난 100퍼센트 한국인인걸. 영국에 오기 전까지 프레드로 가문을 전혀 몰랐죠.”

“그랬군요. 그런데 준은 어쩌다 우리 시대에 온 거죠?”

“그게…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할까요.”

준영은 타임 슬립을 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 런던에서 루이스 대령의 유령을 보았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당연하지만 자매들은 놀랐다가 이내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가족의 불행을 막아 주길 바랐던 것 같았어요.”

“아버지께서…….”

리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워지려 하자, 알버트가 나섰다.

“자, 여기까지 들었으면 알겠지만, 존은 우리에게 귀한 손님이다. 그런 손님에게 폐가 되는 언행은 하지 않도록 하렴.”

“알았어요. 비밀은 지킬게요.”

고개를 끄덕인 앤지는 동생 카린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카린은 남의 비밀 같은 거 함부로 말 안 해.”

“내일 당장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한다는 데 5펜스를 걸 수 있어.”

“우씨! 카린을 믿으라구!”

앤지는 동생이 염려스러운 모양이지만, 준영은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듣는다고 해도 그냥 공상과학을 좋아하는 꼬마의 망상이라고 여길 테니까.

‘그래도 모르니까 이런 미래 물건들은 절대 유출 안 되게 잘 관리해야겠군.’

그리 마음먹었지만, 보안은 초반부터 위기를 맞이했다.

“저기요, 준. 이 실마릴리온 잠시 빌려 보면 안 될까요? 저 톨킨 선생님 소설을 매우 좋아하거든요.”

“언니 다음에 나도 좀…….”

톨킨과 대학 동창인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

준영은 리즈와 앤지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마치 절대 반지의 유혹에 빠진 것 같구만.’

덕분에 모르도르까지 반지를 운반하며 이 꼴, 저 꼴 다 봤던 프로도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다.

***

무림에선 노인과 여자와 꼬마를 조심하란 말이 있습니다.

살아 보면서 느꼈는데, 딱히 무림만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