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41화 (41/400)

Round 41. 이건 반드시 해야 돼

9월의 세 번째 토요일 저녁.

올드 트래퍼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블랙풀 간의 8라운드 경기가 열렸다.

1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준영은 오늘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 동양인 녀석이 잘하는 건 사실이지만, 빠져도 큰 문제는 없을걸.”

“맞아. 기존 멤버만 해도 충분히 강하다고.”

지난 6라운드 원정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다들 맨유의 우세를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뚜껑이 열리자,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블랙풀의 전술은 6라운드 때와 똑같았다.

간판 공격수 스탠리 매튜스를 선봉으로 내세워 맨유 측면을 흔들어 댄 것.

빠르고 과감한 이 백전노장을 막기 위해 맨유는 던컨 에드워즈를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다.

그리고 던컨은 준영이 했던 것처럼 스탠리의 그림자인 양 쫓아다니며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역시 던컨이야. 스탠리가 맥을 못 추고 있잖아.”

“수비면 수비, 공격이면 공격. 못하는 게 없다니까!”

감탄하는 관중들과 달리, 본부석 부근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준영은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무래도 낚인 것 같은데?’

겉으론 똑같아 보이지만, 오늘 블랙풀의 전술에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6라운드 때는 스탠리 매튜스를 주공으로 활용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던컨이 마크를 붙은 스탠리 쪽은 그냥 두고 중앙과 왼쪽에서 많은 공격 시도를 전개했다.

그리고 맨유는 그것을 적절히 차단하지 못했다.

‘역시, 스탠리 매튜스를 미끼로 쓴 게 맞아!’

현재 맨유에서 공수 조율을 가장 잘해 주고 있는 선수는 던컨이다.

6라운드 때도 준영이 스탠리에 대한 전담 마크를 수행하면서 던컨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그렇지 못했다.

전담 마크로 빠진 던컨의 역할을 에디 콜먼에게 맡겼는데, 그리 원만하지 않았던 것.

그 결과 블랙풀이 중앙과 왼쪽에서 활발한 공격 전개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저대로 두면 큰일인데…….’

버스비 감독도 눈치를 챘다.

그는 곧장 재키 블란치플라워에게 수비 가담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게 효과를 보이기 전에 사고가 터졌다.

빌 페리의 패스를 받은 재키 머디가 선제골을 터트린 것.

“씁! 결국 먹었군.”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블랙풀의 선제골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추격해야 하는 맨유는 공격에 치중했지만, 골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수비 뒷공간이 많아지면서 발 빠르고 과감한 스탠리 매튜스가 연거푸 이쪽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던컨의 마크로 그의 공격은 막아 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수비 라인은 강풍에 휘청이는 나무처럼 흔들렸다.

그렇게 스탠리가 흔들어 놓은 맨유 수비진에 절묘하게 파고든 재키 머디가 두 번째 골을 터트렸다.

‘아, 망했네.’

제대로 블랙풀에 당했다.

카운터 두 방을 얻어맞은 버스비의 아이들은 완전히 얼이 빠져 버렸다.

다행히 아이들의 아버지는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

“다들 침착하게 해! 만회 골을 서두를 필요 없어!”

버스비 감독은 조급함을 느끼는 선수들을 억눌러 가면서 흔들리는 수비진부터 정비했다.

그 덕에 전반은 더 이상의 실점 없이 마쳤다.

그리고 후반 초반에 던컨의 만회 골로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뒤로는 맨유의 맹공.

동점 골을 넣으려는 그들을 상대로 블랙풀은 우주 방어 태세로 맞섰다.

“꼬마들에게 밀리지 마라!”

“아무렴! 홈에서의 참패를 갚아 줘야죠!”

스탠리 매튜스의 독려에 블랙풀 선수들은 똘똘 뭉쳐 맨유의 맹공을 막아 냈다.

강슛 앞에 거침없이 몸을 던지고, 다리 경련이 와서 절뚝거리면서도 마크맨을 놓치지 않았다.

그 투지와 저력은 블랙풀의 골대 앞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냈다.

‘힘들겠군. 저러면 들어갈 것도 안 들어가.’

준영의 예상대로 동점 골은 터지지 않았다.

결국 데니스 바이올렛의 슈팅이 골대를 넘어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경기는 블랙풀의 2 대 1 승리로 끝났다.

마지막까지 역전을 기대했던 홈팬들은 맥없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말았다.

“쩝, 2연패라니……. 이거 1위 수성이 위험한걸.”

준영이 알기로 현재 맨유는 5승 1무 2패로 2위인 노팅엄 포레스트와 3위 에버튼과 공동 1위.

아니, 유러피언 컵 때문에 한 경기를 더 치른 상태이기 때문에 그 두 팀보다 불리하다 할 수 있다.

‘다음 경기는 아스날 FC, 지금은 평범한 중상위권 팀이라지만 얕봐선 안 되겠지.’

오늘 상대인 블랙풀만 해도 현재 리그 16위다.

방심하다간 3연패의 수렁에 빠지고 말리라.

‘그나저나, 너무들 쳐다보는군.’

경기장을 나가던 준영은 자신을 향한 팬들의 시선을 보았다.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고 하더니만,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나니 생각이 좀 달라진 모양이다.

‘아쉬운 만큼 소중함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다음 경기에선 제대로 활약을 보여 주리라.

그래야 저들의 마음속에 이준영이란 선수가 보다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 테니까.

***

준영이 경기장을 나왔을 때.

웬 정장 차림의 젊은이들이 그에게 달려왔다.

“맨유의 존 Y. 리 선수 맞죠?”

“예, 뉘신지?”

혹시 기자들인가?

볼턴전 이후로 취재하겠다며 찾아오는 기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눈앞에 나타난 둘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싶었다.

“제대로 찾았네요! 전 제프리 포스터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생 조셉 포스터라고 하고요.”

조셉 포스터?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 같았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준영은 내심 탄성을 터트렸다.

‘아! Ree복 창업주잖아!’

영국의 대표적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Ree복.

준영이 21세기에 있을 때 후원 계약을 맺은 업체라 대강은 알고 있었다.

사실 21세기에서 Ree복은 축구 선수 후원에서는 뒤처진 기업이었다.

실제로 준영은 더 좋은 업체에서 오퍼가 왔었다.

하지만 보육원 동생들의 장학금도 지원해 준다고 해서 Ree복과 계약했다.

그런데 그 인연이 이 시대에까지 이어질 줄이야!

“형이랑 저는 볼턴에 있는 JW 포스터&손스라는 제화 업체에서 일하고 있어요.”

JW 포스터&손스는 포스터 형제의 조부가 세운 회사로, 훗날 Ree복의 모체가 되었다.

“제화 업체면 혹시 거기 운동화나 축구화 같은 것도 만들고 있습니까?”

“물론이죠. 저희 할아버지는 육상 선수 출신이거든요.”

“올림픽 육상 챔피언인 헤롤드 아브라함도 우리 할아버지가 만든 운동화를 신고 금메달을 땄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운동화까지 만들어 줄 정도라니!

과연 후대 글로벌 브랜드답다 싶었다.

그런데 이들이 찾아온 이유가 뭘까?

“일단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예, 그럼 저 건너편에 카페가 있으니 그리로 가죠.”

카페로 자리를 옮긴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제프리는 준영을 찾아오게 된 이유를 밝혔다.

“얼마 전에 기술자를 구하러 허더스필드에 갔는데, 거기서 만난 제화공에게서 신기한 샘플을 봤어요.”

준영은 제프리가 가방에서 꺼내 보인 신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그건 내 건데.”

“역시 리 선수의 축구화였군요.”

21세기에서 가져온 축구화.

준영은 허더스필드에 있을 때 갖고 있던 축구화 중 한 컬레를 섕클리가 소개해 준 제화공에게 맡겼다.

이 시대의 축구화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복제를 해 보려고 했던 것.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준영도 맨유 이적에 몰두하면서 거의 잊고 있었다.

“그 제화공이 말하길, 키 큰 동양인 축구 선수가 맡긴 거라고 했어요. 누군지 알 만했죠. 그런 사람은 지금 한 명뿐이니까.”

“하하하, 현재까진 유일하긴 하죠.”

자신의 실력으론 무리라 생각했던 제화공은 마침 찾아온 형제에게 축구화를 넘겼다.

그리고 형제는 이 샘플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렇게 가볍고 착용감이 좋게 만들어진 축구화는 처음 봤어요. 거기다 밑창과 스터드… 이거 플라스틱으로 된 신소재죠?”

“가죽은 부드러운 질감이나 무게를 보면 쇠가죽이 아니라 송아지나 캥거루 가죽 같고요.”

“예, 뭐… 따로 특별히 신기술과 신소재를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

준영은 축구화의 상세한 소재나 기술은 모르기에 형제의 물음에 대충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그쪽으로는 자기보다 이들이 더 전문가처럼 보였으니까.

‘이거 잘하면 비슷하게 복제도 가능하겠는걸?’

장비는 소모되기 마련.

하지만 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21세기의 축구 장비들을 이 시대에서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했다.

준영은 과학자나 장인이 아니라 축구 선수였으므로.

“저희도 볼턴과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보러 갔어요. 신기한 축구화를 가진 화제의 선수가 어떤 플레이를 하는가 보려고 했는데…….”

“그 경기 이야기는 하지 말죠.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아, 실례했습니다.”

제프리와 조셉은 다시 축구화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무튼 형태 자체는 아D다스에서 만든 신형 축구화와 비슷하더군요.”

“하지만 그보다 착용감은 더 좋아 보였어요. 복제만 할 수 있다면 좋은 상품이 될 거라 생각했죠.”

조셉은 야망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현재 JW 포스터&손스는 여러 대학과 프로 구단에 납품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더 이상 성장을 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수적인 임원들이 도전과 혁신을 꺼렸기 때문.

이에 형제는 독립해서 새로운 스포츠 용품 회사를 차리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온 것이 준영의 축구화였다.

“앞서 말씀하신 대로 상당히 뛰어난 기술과 소재가 적용된 것 같더군요. 이런 축구화를 신다가 영국의 투박한 축구화를 신으면 많이 불편할 수밖에 없겠군요.”

“예, 안 그래도 어떻게 복제가 안 될까 싶어 맡긴 거였어요.”

“불편한 건 축구화뿐만이 아니죠?”

“예, 유니폼이나 정강이 보호대 같은 것도……. 아예 없는 물건들도 있고요.”

“그것들도 복제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마음은 있었지만, 준영은 잠시 승낙을 미뤘다.

이 형제가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지 듣고 싶었으므로.

“연구 샘플을 제공해 주면 저희가 리 선수의 장비를 지원하겠습니다. 아, 물론 충분한 대가도 지불할 거고요.”

“우리랑 같이 사업을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 할아버지도 선수지만 훌륭한 경영인이 되셨죠.”

스포츠 용품 사업이라.

괜찮아 보였다.

요즘 잡지 같은 걸 보면 스포츠나 피트니스 쪽으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관심이 많으면 관련 산업도 성장한다는 소리.

실제 이후 아D다스나 나2키 같은 브랜드들도 폭풍 성장을 했다.

‘더구나 이름값에 있어선 오일 머니와는 비교도 안 되지.’

일반인들은 석유 회사 이름보다 스포츠 의류 브랜드 이름을 더 잘 알고 있다.

이런 인지도는 돈을 뿌린다고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혹시 알아? 농구의 조단 시리즈같이 준영 시리즈 축구화가 나올지.’

새로운 전설의 브랜드를 만들어 보자!

이건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 Ree복이라는 브랜드를 성공시킨 사람들이 협력을 요청하고 있으니까.

‘이건 반드시 사야, 아니 해야 돼!’

브랜드라는 새로운 야심이 부풀어 오른 준영은 포스터 형제가 내민 손을 잡았다.

***

Ree복의 후원을 받은 유명 축구 선수로 라이언 긱스가 있습니다. 실제 축구 선수로서 의류 브랜드를 만든 선수도 있는데, 바로 스웨덴의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이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헤롤드 아브라함은 영화 ‘불의 전차’로 유명한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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