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40화 (40/400)

Round 40. 선수면 선수답게

다들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심판이 퇴장 사유를 늘어놓았다.

“판정 불복에, 고의적인 시간 지연 행위와 경기 진행 방해까지……. 비신사적인 행위로 경기를 망치는 야만인은 필드에 설 자격이 없어!”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던컨이 격분해서 달려들었다.

퇴장의 당사자인 준영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진짜 심판에게 손찌검을 했을지 모른다.

“말리지 마, 존!”

“그만둬. 잘못하면 너도 퇴장당한다고!”

“바보야, 넌 이 상황이 분하지 않냐?”

“당연히 열 받지! 그렇다고 난동이 벌어져서 하나도 좋을 게 없어!”

지금 맨유 측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필드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버스비 감독과 코치들도 펄펄 뛰었고, 맨유 팬들도 사납게 야유를 쏟아 냈다.

금방이라도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격앙된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필드에서 난투극이라도 일어나면 정말 큰 사고로 이어지고 말 거야.’

어쩌면 10여 년 전에 33명이 죽은 참사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억울해도 그런 사고는 피하는 게 낫다.

‘그런 건 절대 보고 싶지 않아!’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때 사건과 같은,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풍경은 절대로!

“판정에 따라야지. 필드에선 심판에게 절대복종해야 하는 게 원칙이니…….”

준영은 필드에서 나왔다.

분노를 억누르고 담담하게 물러나는 그의 모습을 동료들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노골적인 일이 벌어질 줄이야!

버스비 감독은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나 고민하다 한숨과 함께 힘겹게 토해 냈다.

“힘이 되지 못해 미안하네.”

“아뇨. 절 이 자리까지 보내 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힘을 써 주신 겁니다.”

라커룸으로 향하는 준영의 뒤로 몇몇 기자들이 따라왔다.

그들 중에는 낯익은 노(老)기자도 있었다.

“맨체스터 가디언의 헨리 기자님이셨던가요?”

“맞아요. 헨리 도널드 데이비스입니다. 보통 다들 도니라고 하죠.”

모자를 벗은 도니 데이비스는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물음을 건넸다.

“리 선수, 실례되는 건 알지만, 지금 심정에 대해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심정이 어떻긴.

뻔한 물음에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인터뷰를 대충 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부당한 판정에 맞서려면 언론을 한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으니까.

“뭐, 당연히 기분이야 나쁘죠. 하지만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물론이죠. 나는 선수니까, 선수면 선수답게 행동해야죠.”

나는 선수다. 스포츠맨이다.

준영의 그 말이 도니와 기자들의 수첩에 또렷하게 쓰였다.

***

준영이 퇴장당한 후.

맨유는 무려 4골을 허용하며 볼턴에게 참패했다.

수적인 열세도 있지만, 편파 판정에 흥분한 맨유 선수들이 경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맨유가 참패한 건 전반 초반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판정, 취소된 선제골과 손에 닿지 않은 핸드볼 파울 페널티킥, 그리고 준영의 퇴장 때문이니까.

오심에 대한 증거는 분명히 있었다.

상대 선수의 증언뿐만 아니라, 준영이 뒷짐을 지고 공을 막아 내는 장면도 사진으로 찍혔던 것.

그 사진이 신문에 커다랗게 박히면서 판정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볼턴은 의도치 않은 목표를 달성했다. 애덤 스미스도 이 경기를 봤다면 혀를 내둘렀을 게 틀림없다.>

도니 데이비스 기자는 다음 날 신문에 ‘Invisible Hand’이라는 제목으로 심판의 판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렇게 심판을 비판하는 이들은 언론뿐만이 아니었다.

“퇴장 사유가 비신사적인 행위 때문이라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할 것이지!”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 레스 맥도웰은 어제 맨유 경기 기사를 보며 분개했다.

그는 스카이블루를 선택하지 않은 준영을 섭섭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을 두고 꼴좋다고 비웃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런 불의는 결코 용납되어선 안 되니까.

“야만인 언급까지 했으면 명백한 인종 차별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데도 발뺌을 해?”

문제를 일으킨 심판은 사과는커녕, 판정에 불복했던 준영이나 맨유 선수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판정을 존중해야 신사적인 경기를 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뻔뻔하기 짝이 없군!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하고도 자신이 신사에 문명인이라 생각하는 건가?”

“스스로 문명인이라, 우월하다 여기는 이들이 더 비열하고 잔인한 짓을 하죠.”

맨시티의 주전 골키퍼 버트 트라우트만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제가 경험해 봐서 잘 압니다.”

지난 전쟁 때 그 역시 나치에 동조하고, 그들의 장기말이 되어 나가 싸웠다.

그러면서 손에 피도 묻히고, 끔찍한 일들도 많이 봤다.

돌이켜 보면 정말 후회스러운 시절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유나이티드에서는 이의를 신청할 것 같군요.”

“이미 협회에 이의를 신청했어. 다른 건 몰라도 존 Y. 리의 퇴장 징계는 취소해 달라는 모양이군.”

“과연 취소해 줄까요?”

“안 한다는 데 5실링 걸지.”

권위를 중시하는 협회가 맨유의 요청을 들어줄 리 없다.

징계를 취소하면 판정이 잘못되었음을, 그리고 자신들이 형편없는 심판을 기용하였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대신 징계를 감면해 주는 아량은 베풀겠지. 그 정도 아량이 없으면 권위와 체면을 지키기도 힘들 테니까.”

맥도웰이 볼 때 준영의 징계가 그리 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심에 항의하긴 했어도 난동이 일어날 상황을 만류하기도 했고, 퇴장에는 순순히 응했으므로.

“대단한 친구야. 그런 억울한 상황에서 참아 내기도 쉽지 않은데.”

“그러게요. 그 대단한 녀석이 우리 팀에 왔으면 좋았을걸.”

“어쩔 수 없지. 본인이 그렇게 선택한 걸 어쩌겠나.”

1957년의 마지막 토요일.

그날 맨체스터 더비가 벌어진다.

맥도웰은 인내심 강한 거인과 다시 만날 그날이 기대되었다.

***

“완전히 미친놈이야! 그런 쓰레기 같은 판정을 하다니!”

섕클리 감독은 원샷으로 들이켠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는 곁에 있는 준영에게 호통을 쳤다.

“이놈아, 화도 안 나던? 내가 너였다면 그 망할 심판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을 거다!”

“그러다 정말 큰일 나게요.”

만약 손찌검을 했으면 엄청 무거운 징계를 받았을 것이다.

아마 영구 출전 정지 같은 중징계를 받지 않았을까?

‘어쩌면 망할 심판이 그걸 유도했을지 모르지.’

하늘이 무너져도 심판에겐 절대 손대지 마라.

21세기 때 배웠던 가르침은 이번 사태 때 준영을 슬기롭게 살아남게 해 주었다.

“이봐, 존. 저 아저씨, 네 예전 팀 감독 맞지?”

“네, 허더스필드의 감독이시죠.”

숀 코너리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맨유 선수들은 좀 어이가 없었다.

섕클리가 갑자기 자기네 단골 클럽에 불쑥 찾아와서는 소속 팀 스태프인 양 끼어들었으므로.

“네놈이 던컨이지? 왜 한 잔도 안 마시는 거냐? 내가 있으니 불편한 게냐?”

“아뇨. 전 원래 술 안 마시는데요.”

금욕주의 성향인 던컨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다.

이런 때 묻지 않은 청년을 섕클리는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선수로서 바람직한 놈이로군. 이봐, 존. 이놈이랑 가까이 지내라. 너랑 죽이 잘 맞을 것 같다.”

“이미 친해요.”

“그래? 아무튼 경기를 할 때 콤비가 중요해. 눈빛만 봐도 딱 맞출 수 있는 콤비가. 나 때는 말이지…….”

섕클리가 자신의 현역 시절 일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20살 때 단숨에 1군 자리를 꿰찼다는 둥, 피터 도허티(* 북아일랜드의 감독. 훗날 리버풀의 스카우터로 케빈 키건을 발굴해 냄)의 맨체스터 시티 데뷔전을 밟아 줬다는 둥.

다들 지루해할 무렵, 버스비 감독이 나타났다.

“빌 아닌가? 여기는 웬일이야?”

“오, 형제여. 쓰레기 심판에게 당한 옛 제자를 위로하러 왔다오.”

“고맙군. 거기 좁은 데 있지 말고 여기로 오게.”

상석으로 자리를 옮긴 섕클리는 버스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되었어? 협회에 이의를 신청했다면서?”

“리틀 존의 징계 말인가? 이렇게 결정 내려 주더군.”

버스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하나 펼쳐 들었다.

“뭐? 한 달이라고?”

“말도 안 돼요!”

섕클리에 이어, 깜짝 놀란 준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부러 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런데 무려 한 달이나 출전 정지를 시킨단 말인가?

“이건 지나치잖아!”

“망할 협회 꼰대들 같으니!”

“양심조차 양키들에게 팔아 치운 건가?”

준영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납득하지 못했다.

이런 격한 반응에 버스비 감독은 당황했다.

“한 달이라니? 고작 1경기라고.”

“그래요? 다행이네요.”

안도하던 준영은 섕클리를 째려보았다.

“왜 사람을 놀라게 하세요?”

“착각해서 말이야. 내 현역 시절은 상당히 엄했거든. 거기다 맷이 곤란한 얼굴을 하니까…….”

섕클리에 이어 버스비가 말했다.

“곤란한 건 사실이야. 다음 경기가 블랙풀전이니까.”

“블랙풀이라면……. 아, 수모를 당했던 영웅이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겠군요.”

블랙풀의 초핵심 선수이자, 영국 축구의 영웅 스탠리 매튜스.

지난 블룸필드 로드 원정에서 준영은 강력한 압박과 전담 마크로 그의 발을 묶었고, 팀은 4-1 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엔 준영이 결장한다.

“확실히 곤란하겠군. 유나이티드엔 재능 있는 놈들은 많지만, 스탠리 매튜스를 막을 만한 실력자는 드무니까.”

섕클리의 평가에 몇몇 맨유 선수들이 발끈했지만, 대놓고 항의하진 못했다.

스탠리 매튜스를 막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너는 어때, 던컨?”

“스탠 아저씨를 막는 거? 막으라면 막겠지만, 리틀 존처럼 경기 내내 달라붙기는 힘들죠.”

“역시 그런가…….”

선수들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섕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굳이 너희들만은 아니지. 풋볼 리그 선수들 대부분이 반성할 필요가 있어. 그 골동품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걸 버거워해야 하는 현실을.”

올해 42살인 스탠리 매튜스.

그럼에도 왕성한 체력과 뛰어난 테크닉으로 영국 최고 선수로 군림하고 있다.

스탠리 본인이 대단한 것도 있지만, 선수들이 못 따라가는 문제도 없지 않았다.

“너희는 아무렇지 않게 술, 담배를 하지만, 그 골동품은 그러지 않거든. 심지어 그 친구는 식사도 가려서 할 정도야.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건 하지 않는다더군.”

‘그 아저씨, 그 정도로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었나?’

준영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기에도 자기 관리에 실패해 망가지는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이 방탕하고 와일드한 시대에 그렇게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니!

“알겠냐, 버스비의 꼬마들아. 선수면 선수답게 스스로를 관리하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섕클리는 떠났다.

준영은 그 훈계를 마음에 새겼다.

‘나도 주의해야겠군.’

이 시대 선수들과 어울리다 보니 좀 느슨해졌다.

담배는 몰라도 주량이 조금씩 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전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해서 전설이 되는 건 아니야.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가야 해.’

관찰자로 끝날 생각은 없다.

이 시대의 주인공,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알 전설이 되어야지!

다시 한 번 준영은 긴장의 끈을 바싹 조였다.

***

빌 섕클리는 종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찾아와서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했다고 합니다. ^^; 마치 자기가 맨유 코칭스태프나 되는 것처럼요.

그만큼 맷 버스비와 사이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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