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9화 (39/400)

Round 39. 검은 휘슬

“요리가 다 됐습니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음식들이 들어왔다.

가벼운 샐러드부터 시작해서 피에로기 같은 폴란드식 만두와 커틀릿 등등.

그러다 이억관이 만든 요리가 홀로 들어왔다.

잔치 국수를 떠올리고 있었던 준영은 낯익으면서도 생소한 국물과 면발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삼계탕 냄새가 나네요?”

“삼계탕은 아니지만, 닭고기 육수를 쓴 건 맞지. 아무래도 자네만 대접할 게 아니라서.”

멸치나 다시다 등 해산물을 쓴 육수는 서양인들에게 낯설기 마련.

이에 억관은 동서양 사람들 모두 즐겨 먹는 닭고기로 국물을 내고, 후추와 생강 등으로 맛을 냈다.

“음, 치킨 수프에 파스타를 넣은 건가?”

“이거 맛있는데요?”

“속이 든든해지는 것 같아.”

다들 호평했지만, 섕클리 감독이나 선수들은 더욱 좋아했다.

치킨 수프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보양식으로 즐겨 먹는 음식.

거기에 배를 채워 주는 면까지 곁들어 있으니, 격한 훈련으로 지친 몸이 반기는 게 당연했다.

준영도 맛있게 먹었다.

‘예전에 먹었던 닭고기 칼국수랑 비슷하군.’

그러다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나서 억관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아저씨, 라면이라고 아세요?”

“라면? 혹시 라몐 말인가?”

“맞아요. 그게 원조라고 들었어요. 진하고 매콤한 국물에 면을 넣어 간단하게 끓여 먹는 거죠.”

준영의 설명에 이억관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거 탕면이잖아. 오늘 먹은 것도 탕면인데?”

“아뇨. 제가 말하는 건 인스턴트, 그러니까 공장에서 만드는 즉석식품 같은 건데, 미리 튀겨 놓은 면과 수프를 만들 분말 가루를 동봉해서…….”

준영이 라면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에서 나온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이 오늘 먹은 국수처럼 닭을 재료로 쓴 치킨 라멘이었기 때문.

정확한 출시 시점은 몰랐지만, 50년대 말에 인스턴트 라면이 나왔다는 건 기억했다.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란 거야.’

장차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되는 글로벌 푸드.

잘하면 그 거대한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오늘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은 억관의 실력이라면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맛의 라면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을 터!

“그러니까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공장에서 싸게 대량으로 만들어 떼돈을 벌어 보자는 거군.”

“네, 바로 그겁니다.”

억관이 듣기에도 준영의 설명은 그럴듯했다.

실제 차이나타운의 일부 음식점들이 면을 튀겨 보관하는 걸 봤다.

그러면 좀 더 오래갈 뿐만 아니라 맛을 보전할 수 있다고.

거기다 튀긴 면은 일반 면과 다른 독특한 식감까지 있었다.

“분말 차나 커피도 있으니 가루를 풀어 만드는 탕국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근데 갑자기 이런 건 왜?”

“그야 돈이 필요하니까요. 장차 큰일을 하자면 큰돈이 필요해요.”

미래에 석유 재벌 구단주로 군림하자면 자본금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준영은 라면 사업을 생각한 것이다.

사실 라면 말고도 생각해 둔 식품들이 몇 가지 있었다.

예를 들어 샐러드드레싱 같은 것만 해도 아직 이 시대에는 없었다.

“큰일이라……. 혹시 나중에 조국에도 보탬이 되는 일인가?”

“그야 물론이죠.”

나중에 한국에 오일 쇼크가 터지면, 석유 재벌이 된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겠지.

준영은 그런 뜻에서 확답한 것이지만, 억관이 상상하는 건 달랐다.

‘그래, 가난한 조국의 동포들을 돕자면 큰돈이 필요하겠지. 그 라면이란 싸고 간단한 먹거리도 보릿고개 때 도움이 될 테고.’

그는 의욕이 불타는 눈빛을 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그 즉석식품이란 거 한번 만들어 보지.”

“네, 부탁드립니다.”

생각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

<버스비의 이단아, 그 실력은 진짜였다!>

<동양의 거인, 블랙풀을 제압!>

<오리엔트 특급의 질주, 퍼스트 디비전에서도 계속된다!>

데뷔전의 멋진 활약으로 맨유의 대승을 이끌어 낸 준영은 다음 날 스포츠 뉴스 1면을 장식했다.

당연히 인기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동양인에 2부 리그 선수라며 애써 외면했던 사람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탠리 매튜스를 꽁꽁 묶었다고? 거기다 1골 1어시스트?”

“입단 이틀 만에 출전했는데도 주전들이랑 발이 잘 맞더군.”

“운이 좋았겠지.”

“모르는 소리! 운도 실력이야.”

“아무튼 보통 녀석이 아닌 건 분명해.”

다음 라운드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는 어떨까?

사람들이 호기심과 기대를 피워 올리는 가운데, 닷새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여기가 번든 파크로군요.”

“그래.”

어째 버스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이 경기장에선 별로 이기지 못한 겁니까? 아님 크게 진 일이라도……?”

“아냐. 그런 건 아니고, 10여 년 전에 여기서 끔찍한 일이 있었지.”

버스비는 준영에게 1946년 3월에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 최대 수용 인원 7만을 훨씬 넘긴 85,000여 명이 몰렸지.”

경기장 관리팀에서 개찰구를 닫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담과 경기장 출입문을 넘어 들어왔다.

결국 필드의 터치라인 앞까지 관중이 들어찼을 정도라고.

“그러다 결국 사고가 터졌어. 피치로 밀고 들어오는 관중들을 경찰이 밀어내다 수천 명이 넘어지고 깔려 버렸지.”

“맙소사…….”

사상자가 무려 400명에 달했다. 그중 사망자만 33명이라고.

어이없는 건 사건 직후에 경기가 그대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뭐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모인 거죠?”

“그때 볼턴과 경기했던 스토크 시티에 스탠리 매튜스가 있었거든.”

영국 최고 인기 스타플레이어를 보려다 그 지경이 되었다는 것.

그 뒤로 경기장 시설 관리가 대폭 강화되고, 관중 입장도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그게 철저히 관리되는 거라고?’

준영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도 경기장 면적에 비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입장시키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입석 관중도 상당히 많았다.

이러니 나중에 힐스버러 참사 같은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니겠는가.

“비록 우리 팀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축구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선 참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사건이었지.”

“예, 충분히 그렇겠네요.”

“아무튼 앞으로 절대 그런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

‘그래요. 힐스버러 참사 같은 건 없어야죠.’

하지만 준영에겐 30년 후의 사건보다 내년 2월에 뮌헨에서 터질 사고가 더 신경 쓰였다.

그 사고를 막을 확실한 방법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는 게 우선이야.’

부동의 주전으로 신뢰를 쌓는다면, 모두를 만류하거나 해서 미래에 터질 사건을 피하는 방법도 가능할 테니까.

준영은 오늘 경기도 최선을 다해 뛰기로 했다.

***

버스비 감독은 블랙풀 전에 뛰었던 멤버를 그대로 출전시켰다.

그날 대승을 거둔 데다, 데뷔전을 치른 준영의 활약도 눈부셨으니까.

그러니 오늘 경기도 잘해 주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에 부응하듯, 준영은 전반 6분 코너킥에서 강력한 헤딩 골을 박아 넣었다.

“우와! 동양인이 선제골을 넣었어!”

“수비가 전혀 힘을 못 쓰는군!”

“저런 거인을 누가 막겠어?”

선제골이 터지자 원정 응원을 온 맨유 팬들은 신이 났다.

하지만 그들의 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심판이 방금 전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 왜 골이 아닌 건데!”

“푸싱 파울이라는 모양이야.”

“뭐가 푸싱인데? 볼턴 수비수 놈이 허수아비처럼 밀린 거잖아!”

맨유 팬들의 원성과 야유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제일 불만인 사람은 골이 취소당한 준영이었다.

‘쳇, 깐깐하구만.’

이제까지 만났던 심판들은 몸싸움에 비교적 관대했고, 준영도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다를 모양이다.

‘수비할 때도 조심해야겠군.’

위험한 데서 파울을 했다간 큰일 날 수 있다.

볼턴에는 스탠리 매튜스 같은 레전드급 선수는 없다.

하지만 ‘비엔나의 사자’라 불리는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가 있다.

그는 잉글랜드 현역 국가대표 공격수로, 결정력이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선수였다.

‘거기다 던컨의 사촌도 있지.’

안 그래도 그 던컨의 사촌 형인 데니스 스티븐슨이 공을 몰고 맨유 진영을 돌파해 오고 있었다.

천재 플레이어의 사촌 형도 꽤 발재간이 좋은 선수였다.

측면의 마크를 제쳐 버리고 들어온 그는 페널티 박스 우측으로 들어와 낮게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그가 올린 공은 잽싸게 마크에 나선 준영의 몸을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갔다.

“나이스 컷, 리틀 존!”

“멋진 수비였어!”

던컨과 동료들이 박수를 쳐 줄 때 심판의 호각이 날카롭게 울렸다.

“뭐? 페널티킥?”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일 황당한 사람은 준영이었다.

그는 곧장 심판에게 항의했다.

“나는 공에 손댄 적 없어요. 파울이 아니라고요!”

“…….”

심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준영의 항의를 무시하는 그에게 크로스를 올린 장본인인 데니스 스티븐슨이 해명에 나섰다.

“저기, 내가 크로스 올릴 때 저 친구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요?”

“진짜야, 데니스 형?”

던컨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언제 아닌 걸 맞는다고 하는 거 봤냐?”

데니스 스티븐슨은 사촌 동생네 팀과의 시합을 기대해 왔다.

그랬던 만큼 경기를 오심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유나이티드의 선제골도 석연찮은 이유로 취소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정직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심판은 페널티킥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아, 이 망할 꼰대 같으니!’

무시로 일관하는 심판의 태도에 준영은 이를 악물었다.

한 번쯤은 편파 판정을 겪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당해 보니 기분이 한없이 더러웠다.

***

심판의 판정은 선수들뿐만 아니라 관중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심판은 손에 맞았다고 하는데, 실제론 안 그런가 봐.”

“맞은 거야? 안 맞은 거야?”

“확실히 크로스 올라올 때 뒷짐을 지고 있었지.”

“시끄러! 심판이 맞는다면 맞는 거지!”

볼턴 홈팬들은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맨유 원정 팬들에게선 심판에 대한 야유가 쏟아졌다.

“눈이 삐었냐, 심판!”

“볼턴 승리에 전 재산이라도 걸었냐, 이 돼지 새끼야!”

선제골을 석연찮게 취소시킨 것도 짜증 나는데, 상대에게 페널티킥까지 주다니!

이런 가운데 준영이 재차 항의에 나섰다.

“방금 이 사람 말 못 들었어요? 손에 안 맞았다고 하잖아요!”

좀 더 거칠어진 그의 목소리에 심판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준영을 쏘아보는 두 눈은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지금 판정에 불복하는 건가?”

“불복하겠다는 게 아니라, 올바른 판정을 바라는 겁니다!”

“흥, 올바른 판정? 좋아, 올바른 판정을 내려 주지.”

가늘게 비웃음을 지은 심판은 새로운 판정을 내렸다.

“유나이티드 5번 존 Y. 리, 퇴장!”

“뭐,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판정이란 말인가!

***

중국에 헤이샤오(黑哨)라는 말이 있습니다. 검은 호루라기라는 뜻인데, 매수되거나 의도적으로 편파 판정을 하는 심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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