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8화 (38/400)

Round 38. 영웅의 진면목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블랙풀의 전술은 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준영도 계속 스탠리를 쫓아다니며 본의 아니게 노인 학대를 하게 되었다.

스탠리도 포기했던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경기 끝난 뒤에도 쫓아오려는 건 아니겠지?”

“초대해 주신다면 자택까지 찾아가 보죠.”

“거참, 뻔뻔한 녀석이로군.”

하지만 스탠리는 이런 준영이 싫지 않았다.

이렇게 집요하게 마크하는 것 자체가 그만큼 자신을 대단하게 여긴다는 증거였으므로.

‘더구나 실력도 뛰어나고 말이지.’

처음엔 덩치만 믿고 덤비는 줄 알았는데, 볼 다루는 기술이나 체력도 매우 뛰어났다.

또 거칠게 수비를 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 집중력이 좋고, 시야도 넓었다.

‘나만 마크하는 게 아니라 늘 내 동료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어.’

이렇게 감탄하는 것은 스탠리뿐만이 아니었다.

블랙풀의 조 스미스 감독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진짜 괴물 같은 놈이군. 저러니 버스비가 선수 2명을 주고 웃돈까지 얹어서 데려왔지.”

그 대단한 놈은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도 잘했다.

맨유가 공격을 할 때는 냉큼 공을 가진 선수 주변으로 달려가 패스를 받아 주고, 빈 공간으로 들어가는 공격수에게 공을 건네주었다.

프리킥이나 코너킥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가세한 건 물론이다.

“저놈은 체력이 남아도나.”

“플레이 방식을 보면 던컨 에드워즈랑 꽤 흡사해.”

그래서일까.

첫 공식 경기임에도 미드필드에서 준영과 던컨은 죽이 잘 맞았다.

수비 상황에선 센터백들의 지원을 잘해 주었고, 공격에선 전진해서 포워드들의 볼 배급을 담당했다.

사실 준영이 스탠리를 꽁꽁 묶을 수 있었던 것도 던컨의 공이 컸다.

그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상대편 선수들을 견제하고, 전체적인 조율을 잘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 필드에서 무얼 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있어.’

준영도 던컨의 플레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던컨은 상황에 따라 자신이 어떤 플레이를 해야 좋은지 파악해서 곧바로 수행해 나갔다.

마치 21세기의 플레이메이커들처럼.

‘미드필드가 그리 중시되지 않는 이 시대에 저런 플레이를 스스로 할 줄 알다니…….’

역시 듣던 대로 천재.

거기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플레이를 해낼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스피드도 갖추고 있었다.

“우와아아!”

그 천재가 직접 공을 몰고 블랙풀 진영으로 치고 들어갔다.

동료 공격수들의 위치를 살피고 있던 그에게 블랙풀 선수들이 곧장 달려들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그의 발끝을 떠났다.

예상 밖에도 그 패스는 리암 휄란이나 토미 테일러,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향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내준 그 패스를 받은 선수는 이준영.

번개같이 공격에 가세한 그에게 던컨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때려 넣어!’

‘오케이.’

발끝에 스피드와 체중을 담은 준영은 30여 미터 밖에 있는 골대를 향해 강슛을 날렸다.

뻐엉-!

‘정면이다!’

골키퍼 조지 팜은 날아오는 슛의 방향을 파악했다.

하지만 무회전으로 날아왔던 슈팅은 마지막에 방향이 슬쩍 꺾여 버렸다.

깜짝 놀란 그가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라인을 넘어 버린 공은 그물을 세차게 흔들었다.

“우어어어어!”

관중석에서 동시에 큰 탄성이 터졌다.

준영을 야유하던 블랙풀 팬들도 방금 골에는 탄성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어느 틈에…….”

“으아! 왜 하필! 왜 저놈에게 골을 먹은 거야.”

탄성 뒤에는 울분.

블랙풀 팬들의 눈에 가슴을 쭉 펼쳐 보이며 으스대는 준영의 모습이 비쳤다.

봐라, 내가 이 정도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골 셀레브레이션은 엄청나게 짜증 나면서도 멋져 보였다.

“하하핫, 이 자식, 진짜 저질러 버렸구만!”

“경기 끝나면 한턱 쏘라고!”

동료들에게 축하를 받은 준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3 대 0.

경기 종료까지 아직 30분 정도 남아 있었지만, 슬슬 승리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

3골 차까지 벌어지자, 블랙풀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 FA컵 결승전 때의 대역전을 떠올리며 기대감을 품은 이들이 있었다.

문제는 정작 그날 기적을 만들어 낸 스탠리 매튜스가 여전히 꽁꽁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제쳤다!’

‘어림없어요, 아저씨!’

준영은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하는 스탠리를 강하게 밀쳐 내며 공을 빼앗았다.

그러곤 냉큼 공을 동료에게 패스해 버리곤 쓰러진 스탠리를 일으켜 세웠다.

“이젠 좀 지치지 않아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멈출 순 없지.”

스탠리는 준영의 어깨를 툭 치곤 다시 공을 빼앗으러 달려갔다.

준영은 그를 쫓아가며 혀를 내둘렀다.

후반 30분이 넘어가는 시점.

흔히들 말하는 이 마(魔)의 구간에선 젊은 선수들도 발이 느려진다.

그런데 저 42살의 아저씨는 여전히 잘 뛰어다녔다.

그것도 블랙풀 선수들 중에서 제일 활발하게!

‘정말 대단한 선수야. 내가 저 나이 때까지 뛸 수 있을까?’

준영이 스탠리의 활력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또 한 번 함성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던컨의 어시스트를 받은 데니스 바이올렛이 네 번째 골을 성공시켰던 것.

4 대 0, 경기 시간은 이제 1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틀렸어. 이제 꿈도, 희망도 없어.”

“이렇게 박살 날 줄은…….”

시무룩해진 블랙풀 팬들은 야유할 의욕마저 잃었다.

벌써 자리를 뜨는 관중들도 있었다.

이 경기는 글렀어.

블랙풀 선수들도 전의가 꺾였는지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제 그들이 바라는 건 더 실점하지 않고 경기가 끝나는 것뿐.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선수도 있었다.

“주저앉지 마!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

기적의 장본인은 연방 박수를 치고 호령을 하며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끝날 때까지 포기해선 안 돼! 그럼 최후의 기회까지 잃게 되는 거야!”

영국 축구의 영웅.

포기하지 않고 계속 뛰는 백전노장의 일갈에 블랙풀 선수들의 눈빛이 다시 돌아왔다.

그들의 지쳐 버린 몸에서 김처럼 빠져나간 활력이 다시 뜨겁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절망에 빠진 팀이 살아났다!

준영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대는 걸 느꼈다.

‘저게 살아 있는 전설, 진짜 리더의 힘인가.’

위대한 플레이어.

나이를 초월한 활력과 스피드, 걸출한 개인기?

아니, 그것은 그의 진짜 능력이 아니었다.

세월에 꺾이지 않는 도전과 투쟁심,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

그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좌절한 선수들조차 일으켜 세웠다.

심지어 낙담하고 떠나던 관중들도 다시 등을 돌려 박수와 함성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 능력이야말로 영국 축구의 영웅이 가진 진면목이었다!

‘왜 이 사람을 위대한 선수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어.’

남은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 안에 경기가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블랙풀을 응원하는 함성은 더욱 커졌다.

“힘내요, 스탠리!”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스탠리나 블랙풀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맨유의 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코어보드의 시계가 멈춘 그 순간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엇!”

패스를 건네받은 스탠리가 과감하게 페널티 박스로 돌파해 들어갔다.

그 끈질기고 적극적인 시도는 월등한 체격과 테크닉을 가진 21세기 플레이어를 마침내 뚫어 버렸다!

깜짝 놀란 준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스탠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날카롭게 휘슬이 울렸다.

삐빅-!

‘아, 마지막에 한 방 먹었네.’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은 영웅이 따낸 페널티킥.

블랙풀의 중앙 공격수 재키 머디는 이것을 깔끔하게 성공시켰다.

그리고 그 골을 마지막으로 경기는 끝났다.

아쉬움이 깃든 한숨을 내쉬었던 스탠리 매튜스는 준영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하네, 젊은 친구. 자네 팀이 이겼어.”

“감사합니다.”

스탠리와 악수를 나눈 준영은 그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하하하, 나도 마찬가지야. 다음에 또 붙어 보자고.”

영웅의 미소에 준영도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약속하듯 주먹을 부딪치는 그들의 모습이 카메라 렌즈에 커다랗게 들어왔다.

***

“축하하네, 존!”

“대단해요! 데뷔전에 1골 1어시스트라니!”

준영이 돌아오자, 프레드로 저택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데뷔전 축하 파티가 벌어졌다.

연락을 받았는지 허더스필드의 섕클리 감독이나 데니스 로, 레이 윌슨 등 예전 동료들도 찾아왔다.

또 보딩톤 맥주의 찰리 사장이나, 애S턴 마틴의 데이비드 브라운 같은 알버트의 지인들도 와서 축하를 해 주었다.

하지만 준영이 가장 반가웠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억관 아저씨도 오셨군요.”

“리즈 양이 연락해 줘서 바로 달려왔지.”

맨체스터의 한국인 이억관.

지난번에 만난 이후로 준영은 그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떨 때는 손수 만든 김치나 두부 같은 음식들을 가지고 준영을 찾아오곤 했다.

덕분에 준영은 음식 문제로 향수병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집에서 면 좀 뽑아서 왔네.”

“어이쿠, 힘드실 텐데 뭘 그런 걸 다…….”

“나야 장사하면서 맨날 뽑는데, 뭘. 잔칫상에 국수가 빠져서 되겠나.”

이억관은 바로 요리해 오겠다며 저택 주방으로 향했다.

그를 바라보던 준영은 알버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오늘 지고 왔으면 면목이 없을 뻔했네요.”

“그럼 위로 파티가 되는 거지.”

결과는 크게 상관없다.

한 발짝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알버트의 생각이었다.

“아 참, 찰리가 그러는데, 알루미늄 깡통을 쓰고 나서 맥주 판매가 몇 배나 늘었다고 하더군.”

“그래요?”

“깡통 덕도 봤지만, 경기장의 A보드 광고판의 효과도 꽤 있었다고 해.”

경기가 끝난 후엔 이전보다 판매량이 급증했다.

직접 맥주를 사 마신 사람들뿐만 아니라, 광고판을 보고 흥미를 느낀 이들도 매입에 나선 덕분이다.

이런 보딩톤의 성공을 본 데이비드 브라운도 관심이 들었는지, 찰리 사장에게 연방 질문을 건넸다.

“알루미늄 깡통이라……. 소재 자체가 구하기 힘들지 않소?”

“아뇨. 지난 전쟁 때 엄청나게 많은 항공기들을 만들었잖아요. 깡통 만들 고철은 고물상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하긴……. 그건 그렇고 그 경기장 광고 말인데, 우리 회사도 하고 싶소만?”

“브라운 사장님 회사요? 하지만 축구 경기장에 찾아오는 관중들은 대부분 서민들이라 고급 자동차를 사긴 힘들 텐데요?”

“난 자동차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 필요한 기계류나 트랙터 생산도 하고 있소.”

찰리와 달리 데이비드는 준영이 미래에서 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영이 특허를 등록했다는 알루미늄 깡통이나 A보드 광고판 등도 다 미래의 아이디어임을 금방 눈치챘다.

당연히 놓칠 수 없는 사업 아이템이었다.

“그 광고판 사업, 나도 끼고 싶은데? 축구장 말고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소? 예를 들어 경마장 같은 곳만 해도…….”

“오오! 과연 그렇군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준영은 저도 모르게 히죽 웃음을 지었다.

데뷔전을 멋지게 치른 데다, 통장 금액이 두둑해지는 소리도 들리고 있었으므로.

***

스탠리 매튜스는 정말 강한 멘탈의 소유자였습니다. 인성도 갑이라, 자신에게 고의적으로 살인 태클이나 거친 파울을 일삼는 선수들에게도 보복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선수들도 그를 무척이나 존경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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