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7. 집중 마크
준영의 킬 패스를 받은 리암.
듬직한 체격을 가진 이 아일랜드 공격수는 수비수 한 명을 제치며 블랙풀 골대에 공을 박아 넣었다.
“들어갔다!”
“하하핫! 해낼 줄 알았다고!”
환호하던 맨유 팬들은 리암의 어깨를 도닥이는 준영을 보았다.
방금 골은 그가 만들어 줬음을 모두들 확인했다.
“저 중국 놈, 실력은 있구만!”
“중국인이 아니라던데?”
“아무튼 쓸 만한 놈이면 된 거야!”
즐거운 맨유 응원단과 달리, 전반 8분 만에 일격을 당한 블랙풀 팬들은 낯이 굳어졌다.
그것은 필드에 있는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아.”
스탠리는 기가 죽은 블랙풀 선수들을 다독이며 공격을 선도해 나갔다.
전반 10분에는 직접 돌파로 페널티 박스 가까이 접근해 매서운 슈팅을 날렸다.
깡-!
“우와아…….”
탄식과 안도가 교차하는 사이, 준영은 골대에 맞고 나온 공을 가슴으로 받아 냈다.
그러곤 전방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그대로 롱 패스를 띄웠다.
하지만 그 패스는 전방에 있던 리암이나 토미 테일러를 훌쩍 넘어가 버렸다.
“이런, 너무 성급하잖…….”
“자, 잠깐! 저거 설마!”
마치 포탄처럼 큰 곡선을 그으며 날아간 공은 블랙풀 골대를 향해 떨어졌다.
블랙풀 골키퍼 조지 팜은 떨어지는 공의 궤적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설마? 아냐. 그럴 리가…….’
부정하면서도 그는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뒤로 몸을 날리며 황급히 손을 뻗은 그는 뚝 떨어지는 공을 가까스로 골대 너머로 쳐 냈다.
“맙소사, 슈팅이었다니!”
“도대체 몇 야드나 날아온 거야?”
“우, 우연이겠지?”
관중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스탠리는 방금 롱 패스, 아니 롱슛을 날린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아깝네.”
‘골키퍼가 전진한 걸 보고 찬 건가?’
한국말로 투덜대는 걸 알아듣진 못했다.
하지만 아쉬워하는 준영의 표정을 보면 충분히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골이 들어갈 뻔한 위기의 상황에서 침착하게 공을 컨트롤하고, 골키퍼의 위치까지 살핀 후에 골대를 노린 정확한 롱슛으로 역공을 한다?
그것도 단 몇 초 사이에!
‘이 녀석, 혹시 외계인 아닌가?’
버스비의 아이들.
영국 축구를 주름잡고 있는 그 무리에 합류한 이단아는 정말 굉장한 녀석이었다.
***
준영의 롱슛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것은 맨유의 코너킥 공격으로 이어졌다.
“젠장, 누굴 막아야 하는 거야?”
“위험한 녀석들투성이군.”
가공할 득점력을 가진 공격수 토미 테일러, 호시탐탐 득점을 노리는 던컨 에드워즈.
여기에 장신 공격수 리암 휄란과 그보다 더 큰 동양인 거인 존 Y. 리.
이들에게 신경 쓰던 블랙풀 선수들은 가장 위험한 선수를 놓치고 말았다.
바로 데니스 바이올렛.
맨유 사상 최고의 경기당 득점률을 자랑하는 이 공격수는 혼전 중에 흘러나온 공을 정확하게 블랙풀 골대에 때려 넣었다.
“역시 데니스라니까!”
“대단해! 2라운드부터 5연속 골이라고!”
전반 15분이 되기도 전에 2 대 0 리드.
그러나 홈팀 블랙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아직은 몰라!”
“맞아. 역전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초반부터 얻어터지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승리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의 불씨는 바로 스탠리 매튜스.
그는 1953년, 3 대 1로 뒤지던 FA컵 결승전에서 대역전승을 이뤄 낸 영웅이다.
그 위대한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아직은 애송이들에게 질 수 없지.”
미드필드 지역에서 패스를 건네받은 스탠리 매튜스.
그는 매섭게 맨유 측면 지역을 내달리며 크로스를 올렸다.
택배급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든 크로스는 중앙에 있는 재키 머디의 머리로 정확히 떨어졌다.
“그래, 헤딩… 아!”
“하필 정면이라니!”
헤딩슛은 맨유 골키퍼 레이 우드의 가슴에 안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 슈팅을 시작으로 블랙풀의 공격은 좀 더 활발해졌다.
전반 19분에는 빌 페리의 슈팅이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스쳐 나갔다.
3분 후에는 어니 테일러의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을 레이 우드가 가까스로 쳐 냈다.
이후 재키 머디가 수비수 둘을 제치고 페널티 지역으로 들어가다 준영에게 부딪쳐 쓰러졌다.
“페널티킥이다!”
“아냐. 그 전에 공을 먼저 가로챘다고!”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홈팬들의 성난 야유가 쏟아졌지만, 심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였군.”
“그래, 위험했지.”
던컨의 말에 동의하던 준영은 스탠리 매튜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공세에 시달리는 건 저 살아 있는 전설급 플레이어가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측면을 허물면서 날리는 크로스와 슈팅에 맨유의 수비진이 계속 흔들리고 있었던 것.
‘더 이상 설치게 두면 안 돼.’
이에 준영은 바로 스탠리에 대한 전담 마크에 나섰다.
어차피 잡기로 작정한 월척.
스코어뿐만 아니라, 일대일에서도 직접 눌러 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또 너냐.”
“이제 지긋지긋하게 볼 겁니다.”
준영은 로저를 제치고 온 스탠리를 막아섰다.
가늘게 웃음을 짓던 스탠리는 공을 살짝 툭 치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자석처럼 따라붙은 준영이 슈팅을 못하게 방해했다.
그 바람에 공은 그대로 골키퍼에게로 흘러가고 말았다.
이후에도 준영은 계속 스탠리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공이 있거나 없거나.
일정 거리를 유지해 있다가 조금이라도 공격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이면 가차 없이 마크에 나섰다.
이쯤 되니 처음엔 흥미로워하던 스탠리도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참, 동양에선 어른을 공경한다고 하던데…….”
“그건 은퇴한 경우에나 그렇죠.”
현역 플레이어인 이상 봐줄 이유가 없다.
그게 초대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현재에도 충분한 요주의 대상이라면 더더욱.
***
“리틀 존이 스탠리를 집중 마크하는데요?”
“그러는 게 옳다고 보는 거겠지.”
가만히 준영의 플레이를 지켜보던 버스비 감독은 바로 수비수들의 위치를 재조정했다.
준영이 마음껏 스탠리 매튜스를 묶어 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로저, 전진해서 올라가! 던컨은 상대 하프백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고…….”
여느 때처럼 즉흥적으로 대처하는 감독의 모습에 머피 코치가 바로 지적하고 나섰다.
“리틀 존이 뚫리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존이라면 분명 막아 낼 거야.”
수비력에 자신이 있지 않으면 저렇게 과감하게 덤벼들지 못했으리라.
실제로 준영이 나선 뒤부터 스탠리는 마음대로 맨유의 오른쪽 측면을 휘젓지 못했다.
당연히 그 루트를 이용해서 공격하던 블랙풀의 공세는 눈에 띄게 꺾여 버렸다.
지켜보는 홈팬들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저 망할 원숭이 자식, 아주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는군!”
“작작 좀 하라고! 작작 좀!”
“우! 우!”
분노 섞인 야유가 쏟아졌지만, 준영은 스탠리에 대한 전담 마크를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차징과 태클을 마다하지 않았다.
“헉!”
준영의 거친 태클에 걸린 스탠리가 필드에 크게 나동그라졌다.
격분한 홈팬들이 펄쩍 뛰며 고함을 질렀지만, 심판은 파울로 인정하지 않았다.
준영의 발이 먼저 공을 걷어 내는 걸 보았기 때문.
“오늘 경기 내내 쫓아다닐 셈인가?”
“우리 골대에 위협이 되신다면 당연히.”
준영은 투덜대는 레전드를 일으켜 세워 주며 씩 웃음을 지었다.
스탠리가 한숨을 푹 토하고 있을 때, 전반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맨유 선수들, 특히 준영을 향해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꺼져라, 원숭이!”
“경기 정말 더럽게 하네!”
“예의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이런저런 쓰레기가 날아드는 와중에, 누가 먹다 만 사과가 준영의 머리로 날아왔다.
그걸 잡아챈 준영은 입을 대지 않은 쪽으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됐어.”
“저, 저 망할 자식……!”
사과를 던졌던 관중의 얼굴이 사과만큼이나 빨개졌다.
부들부들 떠는 블랙풀 팬들의 머릿속에 준영의 존재가 강하게 새겨졌다.
***
“좀 지나쳤어.”
준영이 라커룸에서 목을 축이고 있을 때, 머피 코치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상황에서 스탠리 매튜스를 봉쇄한다는 결정은 좋았어. 그래도 적당히 했어야지. 상대는 영국 축구의 영웅이라고.”
“영웅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이거군요.”
“그런 셈이지.”
스탠리 매튜스는 악명 높은 하이버리 전투를 비롯해,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로 수많은 경기를 뛰었고, 부상도 여러 차례 당했다.
그렇게 국가를 위해 헌신을 다하는 한편, 리그나 FA컵에서도 수많은 명승부를 만들어 냈다.
당연히 영국 축구 팬들은 그를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그런데 그런 영웅에게 낯선 동양의 선수가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것도 모자라, 필드에 나뒹굴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적당히 예우해 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그 아저씨는 진짜 위험한 공격수란 말입니다.”
“그건… 인정하지.”
블랙풀의 공세 때 머피도 조마조마했었다.
한 골이라도 따라잡히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돌변할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스탠리 매튜스라는 승부사가 가만있을 리 없다.
경험과 냉정이 부족한 버스비의 아이들은 그 상황을 쉽게 헤쳐 나오지 못했으리라.
“뭐, 상대가 열 받은 만큼, 우린 원하는 대로 경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나도 존의 의견에 동감이에요.”
“지나치긴 했어도 스탠 아저씨는 보통 수단으론 막을 수 없으니까.”
맨유 선수들도 준영의 편을 들었다.
버스비도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머피 코치도 더 나무랄 수 없었다.
“후반전에도 쫓아다닐 거야?”
“블랙풀이 노인 학대 공격 전술을 계속한다면 어쩔 수 없죠.”
“노인 학대라……. 무슨 표현이 그래?”
너털웃음을 지은 머피는 잊은 것이 있다는 듯, 주머니 속에 있던 걸 꺼내 준영에게 건네주었다.
“아 참, 이거 경기 전에 맡기고 간 거.”
“예, 고맙습니다.”
머피가 맡고 있었던 물건은 준영의 스마트폰이었다.
아까 스탠리 매튜스와 함께 사진을 찍은 후, 전원을 꺼서 머피에게 맡겨 두었다.
“근데 그거 대체 뭐냐? 무슨 흑요석처럼 생겼던데.”
“동양의 재미난 마술 소품 같은 거라고 해 두죠.”
“마술?”
고개를 갸웃하던 머피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준영을 보았다.
‘저 녀석, 혹시 그걸로 스탠리에게 저주를 걸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머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중세도 아니고, 20세기도 절반이 넘었다.
비행기는 음속만큼 빨리 날아다니고, 밤에는 전깃불이 환하게 도시를 밝히고, 집집마다 TV 전파가 송출되고 있다.
저주 같은 건 말도 안 되는 미신에 불과했다.
‘하긴, 저주 같은 걸 할 줄 알면 뭐 하러 발에 땀나게 쫓아다니겠어.’
워낙에 특이한 녀석이다 보니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았다.
아무튼 동양의 마술사든 뭐든, 오늘 경기 승리를 낚아채기를.
머피는 단지 승리만을 바라기로 했다.
***
축구계 저주라고 하면 펠레가 유명합니다만, 실제 경기 중에 하는 짓도 있습니다.
상대 팀이 페널티킥을 얻어 냈을 때 부정 타라고 페널티 스팟을 밟고 가는 행동인데, 실제로 이런 행위를 하면 경고를 받습니다.
페널티 스팟을 밟아 놓으면 잔디와 지면이 눌리면서 공이 부정확하게 놓이게 되거든요. 그럼 키커의 발이 공에 제대로 얹히지 못해 슛이 빗나갈 확률도 높아집니다.
단순히 부정 타라는 저주가 아니라, 의도적인 계산이 있는 행위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