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6화 (36/400)

Round 36. 국보급 플레이어

1957년 9월 9일.

이틀 전 토요일에 리즈 유나이티드를 5-0으로 대파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틀 만에 6라운드 원정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경기 일정 한번 거지 같군.”

준영의 말에 던컨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어. 우리 팀은 유러피언 컵에 나가니까.”

“그래도 그렇지…….”

준영은 구겨진 미간을 쉽게 펴지 못했다.

배려 없는 빠듯한 일정.

영국축구협회의 이 병크도 뮌헨 참사가 일어난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으니까.

‘이제 와서 일정이 바뀌는 건 불가능하겠지.’

21세기도 마찬가지이지만, 높으신 분들은 웬만한 사건으로는 꿈쩍도 안 할 정도로 보수적이다.

그렇기에 일정 변경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차라리 유러피언 컵에 예선 탈락하면 참사를 피할 수 있을지도……? 근데 예선에서 탈락할 정도로 맨유가 약하지 않으니!’

복잡한 준영의 마음도 모르고, 던컨은 6라운드 원정 경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상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블랙풀 FC 말이지? 하긴 거긴 맨체스터와 가까운 휴양 도시에 있으니까.”

“지난 시즌 4위라는 게 좀 껄끄럽긴 하지만 말이야. 거기다 영국 축구의 국보가 뛰고 있기도 하고.”

“국보? 아아, 그 사람…….”

던컨과 떠들 때만 해도 준영은 6라운드 경기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비 감독이 출전 명단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달라져 버렸다.

“한 명 빼고 지난 경기와 동일하군요.”

“그래, 에디 대신 존에게 기회를 줘 보려고.”

미드필드에서 던컨과 콤비로 뛰던 에디 콜먼 대신에 기회를 얻은 선수 존.

“존이라면 존 도허티요?”

“아니, 새로 온 존 말이야. 리틀 존.”

코치와 선수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일제히 쏠렸다.

다들 놀랐지만, 진짜 놀란 사람은 준영이었다.

‘아니, 이 아저씨,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무 이르지 않은가!

토요일에 허더스필드에서 경기를 마치고 맨유로 왔다.

여기서 훈련한 지 고작 하루, 그것도 몇 시간밖에 안 되는데 바로 출전을 하라니!

수석 코치인 지미 머피도 이건 무리라고 여기고 만류하고 나섰다.

“맷, 이러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지나쳐요. 피로가 덜 풀린 주전들을 그대로 기용하는 것도 모자라 아직 팀에 적응도 안 된 친구를 투입한다니!”

“적응이야 실전에서 같이 공을 차다 보면 금방 되기 마련이지.”

“그래도…….”

“난 리틀 존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버스비는 단지 호기심에 준영을 출전시켜 보려는 게 아니었다.

어제 훈련에서 봤지만, 가까이서 본 준영의 실력이나 판단력은 상당히 우수했다.

거기다 코치들이 딱히 지적할 필요도 없이 좋은 움직임과 창의적인 플레이를 보여 줬다.

‘훈련 때 보여 준 수준이라면 실전에서도 충분히 팀원들과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을 거야.’

거기다 준영은 배짱도 좋아 보였다.

그러니 데뷔전이라고 벌벌 떨 것 같지 않았다.

“감독님의 믿음과 당사자의 심정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머피의 말에 버스비는 다시 준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면 되겠군.”

과연 존은 어떤 결정을 할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준영은 그리 오래 고민하거나 꾸물대지 않았다.

“해 보겠습니다.”

“이봐, 존! 경솔하게 굴지 마! 잘못하면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버리게 돼!”

머피의 만류에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서라도 이 경기에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부 구단 임원들이나 팬들은 여전히 자신의 입단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벤치를 데우며 그들의 불만과 의심을 키우느니, 초반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화끈하게 실력을 보여 주는 편이 나을 터!

‘안 그래도 블랙풀 FC에는 먹음직한 먹잇감도 있으니까.’

스탠리 매튜스.

초대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현재 영국 축구의 국보급 플레이어다.

준영은 그 레전드급 월척을 잡기로 마음을 굳혔다.

***

블룸필드 로드 원정 팀 라커룸.

빈티지한 스타일의 하얀 어웨이 셔츠를 입은 준영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이루어졌구나.’

터너 신부님에게 레전드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

언젠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로 필드를 누비고 말리라!

마침내 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엉뚱한 시대에 와서 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바람에 대선배 박치성의 한국인 최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기록도 빼앗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어쩔 수 없었어요.’

준영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대선배에게 사과를 하고 있을 때, 버스비 감독이 다가와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존,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두 가지만 명심하게.”

“두 가지요?”

“그래, 첫째로 공을 잡으면 붉은 저지에게로 패스해.”

“오늘 우린 흰색인데요?”

“아차, 그렇지. 아무튼 우리 편에게 패스할 것! 둘째는 필드에서 자네 존재를 드러내도록 노력해!”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명료하지만, 반드시 귀에 담아 두어야 할 사항들이었으므로.

“자, 그럼 다녀와!”

경기 시간이 가까워지자, 준영과 선수들은 라커룸을 나와 필드로 나가는 통로에 늘어섰다.

상대 팀인 블랙풀 FC 선수들도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을 풀려고 그러는지, 기도문을 외우거나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꽤 있었다.

또 친분이 있는 선수들끼리 잡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스탠 아저씨, 런던 원정은 어땠어요?”

“아스날전? 오랜만에 이겨서 기분은 좋았지.”

맨유에 있는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과 말을 주고받는 중년의 선수.

그가 바로 영국 축구의 전설이자 국보급 플레이어인 스탠리 매튜스였다.

“그런데 너희들, 꽤 재미있는 녀석을 데려왔구나.”

스탠리는 조금 전부터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젊은 선수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는 용모와 체격.

요새 축구계에 소문이 자자한 그 녀석이 틀림없었다.

“네가 존 Y. 리로군. 오늘 경기에 출전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위대한 플레이어랑 경기할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준영의 대꾸에 스탠리는 미소를 지었다.

“발재간이 좋다고 들었는데, 사람 낯간지럽게 만드는 재주도 좋구만.”

“뭐, 재주가 많단 이야기는 듣고 있어요.”

그렇게 말한 준영은 슬쩍 스탠리의 곁으로 다가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탠리는 스마트폰 표면에 자신과 준영의 얼굴이 비친 모습을 보았다.

“거울?”

“예, 머나먼 3개의 별에서 만들어진 은하의 마법 거울이죠.”

어째 거울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스탠리에게 준영이 다시 말을 건네 왔다.

“아 참, 미리 사과드릴게요. 오늘 경기, 골이랑 승점을 훔쳐 갈 예정이거든요.”

“허, 제법 건방진 구석도 있군.”

“맘에 안 드십니까?”

“말만 번드르르한 녀석들은 확실히 맘에 안 들지.”

과연 너는 어떨지?

진지한 눈길로 바라보는 스탠리에게 준영은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보여 드리죠.”

***

블룸필드 로드에는 3만 4천여 관중들이 몰려와 있었다.

토요일 아스날전에서 3연패를 탈출하는 승리를 거두었던 터라 블랙풀 팬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오늘 경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잡고 2연승을 거둔다면 완전히 분위기를 바꿀 수 있으니까.

“이겨라, Seasiders(* 블랙풀 FC의 별명)!”

“버스비의 애송이들을 박살 내 버려!”

양 팀 선수들이 입장하자 관중들의 함성은 훨씬 더 커졌다.

블랙풀 FC의 유니폼 컬러와 같은 오렌지색 손수건들이 아름답게 나부꼈다.

삑-!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홈팀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초반 5분간은 탐색전.

어느 정도 예열이 되자, 블랙풀이 선공에 나섰다.

블랙풀의 공격진 중앙에는 스코틀랜드 대표인 재키 머디, 왼쪽에는 패스가 좋은 빌 페리, 오른쪽에는 스탠리 매튜스가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1952-1953시즌 FA컵 우승의 주역들.

최종 수비에 앞서 이들을 저지하는 게 준영과 던컨의 역할이었다.

‘중앙보다는 측면이 낫겠지.’

맨유의 에이스 던컨이나 비범한 체격을 가진 동양인은 피하는 게 좋을 터.

이에 블랙풀의 하프백 휴 켈리는 오른쪽 측면으로 패스를 보냈다.

“스탠리에게 패스가 갔다!”

“돌파하지 못하게 막아!”

윙어의 시조.

후대 사람의 평가대로, 스탠리 매튜스는 패스를 받기 무섭게 곧장 오른쪽 측면을 내달렸다.

그 스피드는 42살이라는 나이를 무색케 하는 수준이었다.

‘스피드뿐만이 아니야! 드리블도 수준급이다!’

지켜보던 준영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 투박한 축구화를 신고 섬세하게 공을 다룰 수 있는 건지?

더구나 그냥 뛰어도 대단하다 싶은 화석급 노장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20대 청년들보다 더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괜히 국보급 플레이어라고 하는 게 아니군. 노땅이라 얕보다간 큰일 나겠어.’

그런데 이미 큰일이, 아찔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로저가 놓쳤어!”

스탠리의 마크를 붙었던 로저 바인이 가벼운 페인팅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아마 크로스를 올릴 거라 예상했던 모양인데, 스탠리가 선택한 건 돌파.

곧장 페널티 박스로 들어온 그는 슈팅을 시도했다.

“그렇겐 안 되지!”

슈팅이 터지기 직전, 잽싸게 수비 라인으로 내려온 준영이 공을 라인 밖으로 걷어 내 버렸다.

기대의 함성이 일던 관중석에선 탄식과 욕설이 쏟아졌다.

“크, 아깝다!”

“망할 칭크 자식! 감히 스탠리의 슛을……!”

“동물원으로 꺼져, 인마!”

야유와 욕설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준영에게 스탠리가 혀를 내둘렀다.

“발이 빠르군!”

“아저씨도 총알 같던데요?”

경기는 블랙풀의 코너킥으로 이어졌다.

코너킥을 맡은 스탠리는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벌이는 페널티 박스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큰 놈이 있으니 영 불편하군.’

190센티미터대의 장신인 준영이 신경 쓰였던 그는 낮고 빠르게 공을 날려 보냈다.

살짝 외곽으로 빠진 공은 같은 편인 어니 테일러의 발 앞에 떨어졌다.

하지만 때마침 몸을 날린 맨유의 던컨 에드워즈가 절묘한 태클로 공을 빼냈다.

‘우리 편은…….’

아직 일어나지 못한 상황에서도 던컨은 동료들의 위치를 먼저 살폈다.

그러다 허연 덩치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받아, 리틀 존!”

“OK, Go!”

역습 상황이 벌어지자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던 준영은 공을 잡고 달려갔다.

휴 켈리가 바로 마크를 시도했지만, 준영의 플립플랩에 속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터진 멋진 개인기에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멋지다!”

“저런 발놀림이 가능하다니!”

원정 온 맨유 팬들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였다.

전방을 주시하던 준영이 앞쪽으로 날카로운 스루 패스를 찔러 넣었다.

적당하게 역스핀이 걸린 그 패스는 맨유의 공격수 리암 휄란의 발 앞으로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

드리블의 마술사라 불린 스탠리 매튜스는 발롱도르 초대 수상자이자, 당시 잉글랜드 축구의 우상이었습니다. 어찌나 몸 관리를 성실하게 잘했는지 무려 50살까지 현역 선수로 뛰셨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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