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35. 입단&합류
다음 날 오전, 준영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식을 치렀다.
21세기 때처럼 거창하진 않았지만, 계약서에 서명하고 악수하며 사진 찍는 건 별 차이가 없었다.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은 3년, 주급은 허더스필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 노동부에서 정한 최대 상한선인 17파운드였다.
다만 보너스와 관련해서 변동이 있었고, 준영이 요청한 부분도 있었다.
“출전 보너스를 유소년 선수들에게 쓰고 싶다고?”
“예, 기왕이면 가정 사정이 어려운 애들이 혜택을 봤으면 합니다.”
하드먼 회장은 준영의 제안을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의아해했다.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려는 이유가 뭔가?”
“제가 좀 힘들게 큰 것도 있고… 무엇보다 인심을 쓰면 그만큼 호의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은 생각이군. 하지만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어.”
“역효과요?”
“동양인의 호의를 수치로 여기는 부류도 있다는 거지.”
축구는 서민들이 좋아하는 스포츠인 만큼 가난한 팬들이 많다.
그 가난한 사람들 중에 열등감 때문에, 타인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인종주의에 빠져드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준영의 실력이 좋다는 걸 알고도 입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팬들이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필드는 꿈의 무대거든. 자신들보다 2~3배 많은 급료를 받는 선수들은 동경의 대상이고 말이야.”
“절 보고 배 아파할 거란 말입니까?”
“그런 거지. 돈으로 살 수 있는 호의에는 한계가 있을 거야.”
하드먼의 이야기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오래 뛰고 싶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허더스필드에서 뛰면서 보고 겪었으니까.
“돈보다 활약이 중요하겠군요.”
“그래,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여야지.”
“알겠습니다. 3만 파운드에 왔으니 6만 파운드 이상의 활약을 보여 드리죠.”
준영의 넉살에 하드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버스비의 강렬한 요청 때문에 받아들인 이단아.
예상했던 대로 녀석은 이적해 온 것만으로 구단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소란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
입단식을 치른 후, 준영은 버스비와 함께 맨유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섕클리 감독에게 작별 인사는 제대로 했나?”
“안 받아 주시던데요. ‘영영 못 볼 것도 아닌데 작별은 개뿔.’이라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빌 그 친구 성격이면 확실히 그랬을 테지.”
잠시 대화를 주고받으며 걸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훈련장에 도착했다.
“여기가 훈련장입니까?”
“그래, 뭔가 문제라도 있나?”
버스비의 물음에 표정을 구기고 있던 준영이 대답했다.
“20세기인데 고대 로마 시대보다 못한 것 같아요.”
“응? 뭐가 못하다는 건가?”
“배수요. 빗물이 제대로 안 빠졌잖아요.”
비 온 뒤라 훈련장은 논두렁처럼 진득진득한 데다,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다.
참으로 극악인 1950년대 필드 환경.
이미 허더스필드 타운에 있을 때도 경험했지만, 1부 리그 팀도 이런 형편일 줄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비는 자주 오는 데다, 필드를 싹 뜯어고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자네 말대로 바꿔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연습하고 경기를 해야 선수들의 기량도 한층 성장할 텐데 말이야.”
답답한 것은 그렇게 시정해야 하는 문제들이 버스비 자신이나 유나이티드 구단의 노력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협회는 요지부동이고.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던 버스비는 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준영을 데려갔다.
간단하게 훈련을 시작하고 있던 선수들이 그들을 반겼다.
“감독님, 늦으셨네요.”
“리틀 존을 데려오느라고 말이지.”
새 별명이 들먹여지자, 준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산적의 이름에서 따오다니.
그래도 이들이 자기 나라 옛날이야기의 캐릭터만큼이나 친숙하게 여기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부터 정식으로 우리 팀원인 거지?”
“너무 기뻐하진 말아요. 난 주전 자리를 뺏어 갈 사람이니까.”
“하하핫! 이 녀석, 배짱 한번 좋구만.”
이미 안면을 익힌 선수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준영은 버스비의 소개로 코치들과 대면했다.
“이쪽은 내 오른팔인 짐, 그리고 여긴 코치 겸 유소년 팀 감독인 버트 월리야.”
‘짐? 아, 뮌헨 참사 이후로 감독 대행을 맡았다는 분이군.’
제임스 패트릭 지미 머피.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 코치를 맡으면서 웨일즈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다.
맨유에서 세부적인 전술을 전담했었고, 드래곤 군단을 스웨덴 월드컵으로 이끌었을 정도로 유능한 지도자였다.
“감독님께 들었다. 플레잉 코치 제의를 받았다며?”
지미 머피의 물음에 준영은 웃음을 지었다.
“제의에 그쳤죠. 그냥 일반 선수로 계약했습니다.”
“그랬군. 하긴 코치로 입단했으면 여론이 더 시끄러웠겠지.”
버스비도 자신의 제의를 거둬들였다.
지나친 여론의 질타에 자칫 준영이 큰 부담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거기다 코치가 아니더라도 훈련을 지도하거나 조언을 듣는 데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여긴 내 아들 샌디야. 우리 팀 전술 분석을 해 주고 있지.”
“전술 분석관치고는 젊군요.”
샌디 버스비는 사실 젊다기보다 어려 보였다. 이제 20살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샌디도 그 이유에 대해서 해명했다.
“정식은 아니고, 그냥 경기 보고 토요일 밤에 평가하는 정도죠.”
‘어쩐지…….’
혹시 감독 아들이라고 낙하산으로 들어왔나 했는데, 그냥 부친의 일을 거들어 주는 정도였다.
그때 근처에서 트래핑 훈련을 하던 던컨 에드워즈가 다가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샌디는 이중 스파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블랙번 로버스의 선수이기도 하거든.”
정체가 들통난 스파이(?)는 항변을 늘어놓았다.
“상관없잖아요. 유나이티드는 1부에, 블랙번은 2부에 있으니까.”
“FA컵에선 만날 수 있잖아.”
“으이구…….”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샌디는 준영을 보며 말했다.
“전 개인적으로 존이 유나이티드에 와서 기뻐요. 우리 팀이랑 경기할 일이 없어졌으니까.”
허더스필드만 빼고 2부 리그 팀들은 준영의 이적을 반겼다.
공격과 수비 모두 능한 190센티미터대의 괴물 장신 플레이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다들 전전긍긍하던 차였으므로.
그런데 이 괴물 녀석이 1부 리그로 떠난다고 하니 기쁠 수밖에.
“허, 이야기 들어 보니 좀 더 있다 올 걸 그랬군.”
“맞아, 그랬으면 계약금도 더 올랐을걸? 넌 바보짓을 한 거야, 리틀 존.”
던컨의 말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긴 내가 똑똑하게 처신했으면 넌 주전 자리 뺏길 걱정을 안 했겠구나.”
“무슨 소리야? 난 유나이티드의 에이스라고. 그런 걱정 따윈 하지 않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준영과 던컨의 모습에 버스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 벌써 친구가 되었나 보군.”
“친구라뇨. 제가 형입니다.”
“이봐, 존! 선배는 나라고!”
정색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버스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금방 이렇게 티격태격할 만큼 친해지는 걸 보니, 이 이단아 신참은 팀에 쉽게 녹아 들어갈 것 같았으니까.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훈련은 기본적으로 허더스필드와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속도와 정확성을 보다 강조한다는 점.
특히 지미 머피 코치는 보다 빠르고 간결한 플레이를 좋아했다.
“공을 잡고 패스하려 들면 늦어! 먼저 패스할 곳을 생각하고 곧장… 그래, 리틀 존. 잘했어. 바로 그거야!”
패스 훈련에서 준영이 논스톱으로 패스를 보내고 재빨리 움직이자 머피가 박수를 보냈다.
사실 준영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훈련 중에 보이는 움직임을 보니 녀석이 어느 정도 수준의 플레이어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감독님이 탐낼 만해!’
체격만 좋은 게 아니라 판단력과 움직임도 빼어났다.
거기다 자신이 선수들에게 지적하는 사항들은 마치 두뇌에 박아 놓은 것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딱히 알려 주지도 않은 것도 스스로 알아내서 해냈다.
그렇다 보니 안 그래도 좋은 체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들은 것 이상이군. 네 녀석 같은 선수가 11명이면 정말 좋을 텐데.”
첫 훈련이 끝난 후 들려온 머피 코치의 칭찬에, 준영은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굳이 11명까지는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다음 시합에서 주전 자리 하나 맡겨 주시면 기분 좋게 만들어 드리죠.”
“허! 벌써 주전 자리를 탐내는 거야? 중국인들은 겸손을 중시한다고 들었는데…….”
“전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입니다. 그리고 욕심도 많고요.”
준영의 말에 머피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녀석의 욕심에 대해 탓할 생각은 없었다.
욕망이 있어야 성취도도 강한 법이니까.
“글쎄, 출전은 감독님이 결정하는 거니까 내가 보장은 못하겠군. 지난번에 클럽에서 선수들과 만났을 때 바비도 봤지?”
“S… 바비 찰튼 말입니까? 물론이죠.”
하마터면 Sir를 붙일 뻔했던 준영은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생각보다 어리더라고요. 상당히 뛰어난 선수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맞아. 그 바비도 1군에 정식 출전하는 데 2년이 걸렸지. 바로 작년에 말이야.”
천하의 바비 찰튼도 2군 시절이 있었다니.
더구나 지금도 확실한 주전 선수는 아니었다.
그만큼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층이 두껍고 실력들이 쟁쟁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선발로 뽑힌다 하더라도 원래 네 포지션이 아닌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어.”
“그래요?”
“응, 감독님이 선수 기용에 있어 파격적이거나 즉흥적인 경우가 있거든.”
공격수 출신인 로저 바인이 풀백 혹은 센터백을 맡게 된 것이나, 수비수인 던컨이 하프백에 배치된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파격적인 포지션 변환은 팀이나 선수에게도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그만큼 안목이 좋으시다는 거지. 던컨의 경우엔 경기 중에 측면이나 최전방까지 돌아다니는데 딱히 지적하진 않으셔.”
“프리롤이란 말이군요.”
“프리? 그래, 던컨이 꽤 자유분방하게 뛰어다니긴 하지. 아무튼 감독님은 경기 중에 다른 선수들의 위치도 변경시키곤 하시지.”
하프백을 전진시키거나, 풀백을 윙어로 만들거나.
경기 상황에 따라 자주 변화를 준다고 했다.
‘즉흥적이라지만… 그건 21세기 축구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건데.’
21세기에도 밸런스가 무너질까 봐 유기적인 전술 변화를 꺼리는 감독들이 있었다.
그런 경우를 보면, 버스비는 이 시대 기준으로 상당히 진보적이고 도전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젊은 선수들을 즐겨 기용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아. 지시를 잘 따르고 체력도 왕성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준영에게 머피 코치가 말했다.
“아무튼 언제 나갈지 모르니까 준비를 철저히 해 두라고.”
“명심하죠.”
준영은 머피의 충고를 독려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벼락 출전을 하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
맷 버스비는 전술에 혁신적인 감독은 아니지만, 선수들의 역량을 파악하는 능력은 굉장히 좋았던 모양입니다.
거기다 인격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선수들은 감독의 뜬금없는 지시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려 노력했죠.
그리고 한 아버지 밑에 있는 형제들처럼 선수들끼리도 무척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 점을 볼 때 저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강한 건 단지 선수 기량이 좋거나, 지도자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뢰와 단결력이 그들의 가장 튼튼한 기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