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3화 (33/400)

Round 33. 신고식

“토마스는 여전히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지. 그래서 지금도 짬짬이 배우 일을 하고 있어. 정말 부지런한 친구지.”

주장인 로저 바인의 말에 숀 코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봤자 연극이나 뮤지컬의 단역, 영화 엑스트라 정도인걸. 축구 선수로도, 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한 어정쩡한 인생이지.”

데니스나 토미, 던컨 같은 녀석들 같은 스타플레이어로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 배우가 되지도 못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나이는 계속 먹고 있었다.

“이런 소리를 하면 다들 어이없어하더라고. 버스비 감독님의 눈에 띄는 게 쉬운 일이냐면서 말이야.”

“그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죠.”

이 시대 젊은 선수들에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선망 그 자체.

간택의 기회도 못 받은 이들의 입장에선 숀의 불만은 배부른 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만족하려 해도 채워지지가 않아. 마치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아무리 마셔도 계속 갈증이 느껴진다고.”

‘본드 형, 취하셨군요.’

이렇게 처음 보는 신참 앞에서 주절주절 신세 한탄을 늘어놓다니.

하지만 얼마나 답답하면 그럴까 이해도 되었다.

“주전 선수로 당당히 뛰기라도 하면 이런 미련이나 후회도 없을 텐데, 갈팡질팡하다 이도 저도 확실히 못했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어.”

“…….”

“종종 이렇게 생각하곤 해. 차라리 그때 깔끔하게 축구를 포기하고 에딘버러에서 배우 일에 전념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곁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버스비 감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토머스, 이런 말이 거북하겠지만… 자넨 그냥 축구나 열심히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나도 지난번에 자네가 나온 연극을 봤어. 긴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연기가 영 어색하더군.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버스비의 지적에 숀은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극장의 스태프들도 똑같은 지적을 했었기 때문.

밤늦게까지 대사를 외우고 유명 배우들이 했던 연기를 흉내 내 연습하기도 했지만,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정말 감독님 말대로 배우는 포기하는 게 나을까.

그런 회의감에 빠져 있을 때, 준영이 입을 열었다.

***

“왜 인생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해요? 나중에라도 성공할지 모르는데.”

숀 코너리는 나중에 유명 배우가 된다.

하지만 그의 연기력은 제임스 본드를 맡았던 젊은 시절보다, 나이를 먹고 완숙해진 뒤에 더 인정을 받았다.

“동양에는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어요. 큰 그릇을 만드는 데 오래 걸리는 것처럼,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죠.”

“내가 크게 될 사람이란 거야?”

“제가 아는 신부님이 그랬어요.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나 언제든 크게 될 수 있다고.”

준영은 숀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성공 사례를 이야기해 주었다.

“제가 재밌게 본 영화에 출연한 영국인 배우가 있어요. 그 사람도 숀처럼 고민한 적이 있었죠.”

“흠…….”

“그 배우는 재미난 액션 영화의 주인공을 보면서 ‘나는 언제 저런 멋진 역을 해 보나.’ 하고 부러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배우 생활을 계속했어요.”

“그러다 나중에 주연 배우가 되었고?”

“하, 그런 시시한 해피엔딩이면 애초에 이야기를 안 꺼냈죠.”

그럼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궁금해하는 숀에게 준영은 충격적인(?) 결말을 알려 주었다.

“몇 년 있다가 후속작에 악당으로 캐스팅되어서 동경했던 그 주인공 배우를 창밖으로 집어 던졌어요.”

“푸하핫! 그게 뭐야!”

숀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그런 식으로 성공했을 줄이야!

한결 표정이 밝아진 숀이 물었다.

“그 배우 이름을 알고 싶군.”

“그러니까 톰 히들… 뭐였어요. 성씨가 외우기 힘든 거라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실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매력 있는 악역을 연기했던 그 배우가 태어나려면 앞으로 24년은 더 지나야 한다.

“아무튼 기회는 언제든 와요. 우리나라 격언 중에는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도 있어요.”

준영의 말에 이어 버스비와 동료 선수들도 숀을 격려해 주었다.

“존의 말이 맞네, 숀. 너무 실망할 필요 없어. 뒤늦게 실력이 만개하거나 서른을 넘어서도 뛰는 선수들도 꽤 있으니까.”

“맞아. 스탠리 매튜스만 해도 아직 뛰고 있는걸.”

“사실 풋내기들이 주전으로 날뛰는 우리 팀이 비정상이지.”

“경험이 쌓이면 연기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준영과 동료들의 말에 기운을 얻었는지 숀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는 잔에 위스키를 따라 준영에게 건네주었다.

“한잔해. 좋은 이야기를 들은 기념으로 내가 내는 거야.”

준영은 그 잔을 받았다.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위스키같이 도수가 높은 술은 약하지만, 호의에서 건네는 술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으윽, 목구멍이 타는 것 같군.’

위장에서 확 달아오르는 기운에 머리가 순식간에 띵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

“나도 한 잔 건네주지.”

“환영의 뜻에서 나도 한 잔!”

선수들이 따라 주는 술잔이 연이어 들어왔다.

그중에는 바비 찰튼 경이 친히 따라 주신 것도 있었다.

‘아놔, 왜 갑자기…….’

왜 갑자기 신고식 같은 분위기로 가는 건지.

아니, 신고식이 틀림없다.

토미 테일러와 빌 포크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지그시 붙잡고 있었다.

짓궂은 작자들 같으니!

덕분에 도망칠 수도 없지 않은가!

“마셔라! 마셔!”

“사나이답게 들이켜라고!”

“쭉! 쭉! 쭉!”

이건 빼도 박도 못할 상황.

앞서 넘어간 위스키 탓에 머리도 멍해져 있던 준영은 별다른 대책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위스키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크엑! 쿨럭, 쿨럭!”

그러나 정면 승부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상태로 기우뚱기우뚱하다 그대로 이성의 끊을 놓쳐 버렸다.

“어우 씨… 더는 안 돼… 못 마… 딸꾹! …시겠어.”

항복을 선언한 준영을 보며 다들 혀를 찼다.

“이런, 벌써 취하다니.”

“던컨이랑 비슷하군. 나이만 먹고 덩치만 커졌지, 아직 어른이 못 되었어.”

“괜히 John Young이 아닌 게군.”

“Young이 아니라 Little 수준이야.”

선수들의 말에 버스비 감독이 흥미로운 기색으로 물었다.

“존 리틀… 그거 로빈 후드 이야기에서 나온 인물 아닌가?”

“맞아요. 로빈 후드의 단짝인 거한 리틀 존의 본명이죠.”

리틀 존이라.

저 어른이 못 된 꺽다리 신참의 별명으로 딱이지 않은가.

데니스 바이올렛은 그 신참 리틀 존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어이, 존. 더 마시지 못하겠으면 노래라도 한 곡 부르는 게 어때?

“오… 노으래? 조… 치요! 불후의 명곡을… 불러 주겠으!”

일어난 준영이 기우뚱하자, 바비 찰튼이 황급히 부축했다.

“이봐, 정말 괜찮아요?”

“하하하, 괜찮… 슴다. 존경스러운 바비 찰튼 경!”

바비에게 깍듯이 경례를 한 준영은 비틀비틀 클럽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밴드 보컬의 마이크와 기타를 빼앗았다.

“비켜, 인마! 그것도 노래냐?”

“뭐라고? 너 누구야?”

맨유 선수들은 반은 황당하게, 반은 흥미롭게 이 난동을 바라보았다.

과연 어떤 난장판으로 끝날 것인가?

하지만 그들은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노래 잘하네.”

“기타 연주도 제법인걸.”

감탄한 건 버스비의 아이들만이 아니다.

어리둥절해하던 손님들도 이내 처음 듣는 노래에 맞춰 환호하고, 낯을 찌푸리던 밴드도 홀린 듯이 쫓아서 연주를 했다.

“But he could play a guitar just like a-ringing a bell~ Go Go~ Go, Johnny, go, go~”

취중에 불러 젖힌 명곡이 클럽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창문으로 먼동이 비쳤다.

침대에 대(大)자로 누워 있던 준영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으으으,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던 그는 입고 있던 정장을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신고식 한번 거하게 치렀군.”

그래도 심하게 짓궂은 신고식이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누구는 강제로 세탁 건조기에 들어가 천식을 앓았으며, 누구는 존경하는 선배 선수의 사진 앞에서 DDR을 강요받았다니까.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내가 어떻게 집에 와 있는 거지?”

여긴 분명히 프레드로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

클럽에서 난입 콘서트를 벌이고 앙코르 소리를 들은 것에서 필름이 끊겼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온 걸까?

버스비 감독이나 선수들 중에 누가 데려다주었을까?

“용케도 일어났네요.”

세수를 마치고 방에서 나온 준영은 리즈와 마주쳤다.

“일찍 일어나는 건 버릇이거든요.”

“후훗, 카린도 그런 버릇이 들면 좋을 텐데.”

리즈는 손에 들고 있던 우유병을 건넸다.

“마셔요. 숙취 해소하는 덴 우유가 좋대요.”

“고마워요.”

우유를 들이켰던 준영은 내심 아쉬워했다.

이럴 땐 뜨끈하고 얼큰한 라면 한 그릇이 좋은데.

하지만 라면은 정말 아껴 먹어야 한다. 몇 안 남은 21세기 한국 음식이니까.

‘그러고 보니 인스턴트 라면이 언제 나왔더라? 어떻게, 만들 순 없을까?’

아니, 그보다 지금 알아야 할 건 따로 있다.

라면에 대한 미련을 덮어 둔 준영은 리즈에게 물음을 건넸다.

“혹시 지난밤에 누가 날 여기 데려다줬는지 알아요?”

“네, 아주 유명한 사람이에요. 나도 깜짝 놀랐어요.”

리즈의 말로는 준영의 라곤다 3리터를 대신 운전해서 왔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알버트가 자고 가라고 했단다.

‘유명 인사라…….’

꽤 들뜬 리즈의 표정을 보면 분명히 맨유 쪽 인물들 같았다.

“버스비 감독님인가요? 아님 데니스 바이올렛이나 토미 테일러?”

“아뇨. 다 틀렸어요.”

“그럼 대체 누군데요?”

“후후후, 지금 밖에 있으니까 직접 만나 보세요.”

궁금했던 준영은 창밖에서 공을 트래핑하고 있는 청년을 보았다.

180센티미터 초반의 균형 잡힌 체구.

양발로 섬세하고 깔끔하게 공을 다루는 재주에 준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시대에서 지금까지 봤던 선수들 중에 가장 뛰어난 테크닉을 갖고 있었다.

“신기한 공이네. 이렇게 가볍고 탄력이 좋다니…….”

청년은 아이같이 밝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준영이 21세기에서 가져온 축구공을 머리 위에서 통통 튕겼다.

그러다 준영이 다가오자 냉큼 그에게 패스를 건넸다.

느닷없이 날아온 강한 패스.

하지만 준영은 거의 바운드 없이 능숙하게 받아 냈다.

“역시! 소문대로 제법 하는군.”

“그쪽도 꽤 하는걸. 날 집에 데려다줬다며?”

“응, 지각을 했으니 그거라도 해야지.”

그러고 보니 어제 누가 약속이 있어서 늦게 온다고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준영은 놀람과 흥미가 뒤섞인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럼 네가 던컨이야?”

“응, 맞아. 내가 던컨 에드워즈야.”

던컨 에드워즈.

바비 찰튼이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 유일한 선수이자,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극찬을 받은 전설의 플레이어.

그가 준영의 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

후속작에 악당으로 캐스팅되어 주인공을 창밖으로 내던진 배우, 어벤져스에서 로키를 맡은 톰 히들스턴의 일화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배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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