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2화 (32/400)

Round 32. 형이 왜 여기서 나와

“근거는 있니? 확실한 근거 없이 사람을 의심하면 못써.”

“있어.”

리즈의 말에 자신 있게 대답한 앤지.

그녀는 지난번에 목격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나흘 전 저녁에 그 사람 방을 지나다 이상한 소릴 들었어. 마치 전신기를 두들기는 것 같은 딱딱대는 소음이었지.”

거기다 다음 날 존이 새벽 운동을 하러 나갈 때, 귀에 보청기 같은 걸 끼고 있는 걸 봤다고.

“보청기?”

“응. 그런데 전선은 연결되어 있진 않았어.”

“그럼 그냥 귀마개 아냐?”

“귀마개에서 소리가 날 리는 없잖아.”

스쳐 지나치는 순간, 잠깐이지만 확실히 들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사람 말소리 같은 게 들렸다고.

“앤지 언니 말을 들으니 카린도 이상한 걸 본 게 생각나. 노을이 예쁜 저녁에 존이 사진을 찍었어.”

“그게 뭐가 이상하니?”

“존이 손에 이상한 널빤지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카메라처럼 찰칵찰칵 소리가 났어.”

카린의 증언에 앤지는 확신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우리가 본 건 초소형 통신 장비와 촬영 장치일 거야. 그렇다면 존의 정체는…….”

얘들이 설마 눈치챈 걸까.

리즈가 긴장하고 있을 때, 카린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알았다! 존은 외계인인 거지?”

“뭐?”

“화성, 아니 금성에서 왔을 거야! 거긴 지구보다 과학이 발전해 있을 거랬어.”

동생의 주장에 앤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상과학소설을 너무 많이 봤구나. 외계인 같은 건 없어.”

“피, 외계인이 아니면 존의 정체가 뭔데?”

카린의 물음에 앤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소련의 스파이가 틀림없어.”

축구 선수는 단지 위장 신분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히 영국의 산업 기술이나 군사 정보를 훔치러 온 첩자일 것이다!

이런 앤지의 추측에 리즈는 물론 카린도 고개를 저었다.

“작은언니야말로 첩보 소설을 너무 봤어.”

“난 현실적인 추리를 한 거야.”

“외계인인 게 더 현실적이야!”

외계인이다! 스파이다!

서로 자기주장이 맞는다고 다투는 동생들을 모습에 리즈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일이 아니야, 언니.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 몰라? 사회 곳곳에 공산당 간첩들이 침투해 있었다는데.”

“매카시라는 상원의원의 폭로 사건?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그건 과장된 사례가 너무 많았다고 하던걸.”

부정하는 리즈를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앤지.

이내 그녀는 이해할 만하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명의 은인을 의심하기는 싫겠지.”

“그렇진 않아.”

“거기다 키도 크고 체격도 다부지고… 얼굴도 꽤 반듯하고.”

“아, 아니라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 사람을 편들 것 같니?”

슬며시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린 리즈.

그런 언니를 보며 가늘게 웃음을 지은 앤지는 존에 대해서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외계인인지, 스파이인지 두고 보면 알게 될 테니까.

***

‘누가 내 이야길 하나?’

간질거리는 귀를 가볍게 매만지던 준영은 버스비 감독이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다들 저기 있다고요?”

“그래, 우리 구단 단골 클럽이야.”

오늘 저녁에 준영은 버스비의 소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만나기로 했다.

현재 이적료 협상으로 양 팀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입단은 결정된 상태였기에.

‘팀에 빨리 적응하자면 미리 얼굴을 봐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준영의 제의를 버스비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디 전설들의 얼굴을 보러 가 볼까?’

준영은 버스비 감독을 따라 흥겨운 음악이 울리고 있는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들 모여 있군.”

준영은 버스비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활기 넘치는 젊은 청년들.

주변 사람들보다 밝고 떠들썩한 이들이 바로 버스비의 아이들, 현재 영국 축구를 주름잡는 스타플레이어들이다.

‘여기도 골초 왕국이군.’

시가와 파이프에서 뿌옇게 연기를 피워 올리는 선수들을 보며 준영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 버스비는 자신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감독님 오셨습니까?”

“음, 던컨이 보이지가 않는데?”

“약혼자랑 저녁 약속이 있대요. 끝나고 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감독님, 저 친구는 혹시……?”

“맞아. 요새 축구계에서 떠들썩한 존 Y. 리지.”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요사이 버스비와 조 암스트롱이 침을 튀기며 극찬을 했던 녀석이 나타났기 때문.

“앞으로 한배에 타게 될 테니 다들 인사 나누도록 해.”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존 Y. 리입니다.”

준영의 인사에 파이프를 물고 있던 날렵한 인상의 청년이 제일 먼저 악수를 건넸다.

“데니스 바이올렛이야. 유나이티드에 온 걸 환영한다.”

“맨유의 10번이죠?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맨유의 10번 계보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명사수 데니스 바이올렛.

그의 경기당 득점률이 0.61골.

이는 21세기에 웨인 루니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특급 공격수들도 깨지 못한 기록이다.

“이쪽은 내 단짝인 토미 테일러. 이 친구도 너랑 같은 이적생이지.”

미소의 암살자 토미 테일러.

우직하면서 순박한 인상의 이 특급 공격수는 자신보다 큰 준영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키가 6.4피트(194센티미터)라고 하더니 진짜 크군. 포지션이 수비수라는데 정말이야? 4경기에서 6골이나 때려 넣었다며?”

“네. 여러 포지션을 할 줄 아는데, 주로 수비수로 뛰었죠.”

“하하, 다행이군! 어이, 빌. 이 녀석은 네 경쟁자가 될 모양이야.”

토미의 말에 다부지게 생긴 청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빌 포크스.

그는 맨유에서만 18시즌 동안 688경기를 뛴 원 클럽맨이다.

‘네 번의 리그 우승과 FA컵 1회 우승, 선수 말년에도 유러피언 컵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고 했지?’

이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는 미래에 이름을 날린 선수들이 즐비했다.

버스비의 첫 번째 아이 재키 블란치플라워와 주장인 로저 바인, 스네이크힙 에디 콜먼, 레알 마드리드가 두려워한 사나이 데이비드 펙 등등.

‘전부 신부님의 이야기로 듣던 레전드 플레이어들이야!’

직접 대면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흥분이 되었다.

앞으로 이 전설의 선수들과 부대끼며 주전 경쟁을 할 테니까.

‘일단 빌 포크스나 로저 바인과 포지션 경쟁을 하게 되려나? 후후후!’

전설들을 제치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야망에 몸은 절로 근질거리고 기분이 들떠 올랐다.

하지만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정보가 준영의 눈빛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 중에 몇 달 후면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이들이 있어.’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모른다.

뮌헨에서의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그 말을 믿어 줄까?

“어이, 이봐요.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아, 잠깐 딴생각을……. 그쪽은 누구죠? 군인입니까?”

준영은 방금 말을 붙인 이마가 넓은 금발 청년에게 눈을 돌렸다.

군복을 걸치고 있었기에 그냥 선수들과 친분이 있는 군인인가 생각했지만…….

“난 유나이티드에서 하프백을 맡고 있는 로버트 찰튼이에요. 그냥 바비라고 불러요.”

‘헉!’

바비 찰튼 경!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물론, 영국 축구 최고의 선수로 등극하는 대선수!

준영은 2026년 맨유에 입단하기 직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처럼 차렷 자세를 취할 뻔했다.

“그, 그랬군요. 근데 왜 군복을……?”

“복무 중이라서요. 주말마다 경기나 훈련에 참가하고 있죠.”

지금 영국군은 주말 외박이 되는 걸까.

아무튼 바비 찰튼은 준영이 꽤 신기해 보이는 듯했다.

“키가 큰 동양인이라 들었지만, 설마 토머스보다 클 줄이야…….”

“나만큼 큰 사람이 있어요?”

바비는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거의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신장을 지닌 20대 중후반의 남자는 궐련을 물고는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이 사람, 왜 이리 낯익지?’

심지어 눈앞에 있는 바비 찰튼보다도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대체 누구이기에?

궁금증이 생긴 준영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존 Y. 리입니다.”

“반가워. 난 토마스 숀 코너리라고 해.”

“예?”

숀 코너리.

훗날 007 제임스 본드로 유명세를 떨치는 명배우가 아닌가!

‘본드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전혀 예상 밖의 만남에 준영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버스비 감독이 극찬한 동양인 선수.

그 때문에 다들 준영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궁금한 점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 점은 토마스 숀 코너리도 마찬가지.

생각했던 것보다 준영이 영어에 유창해서 질문을 건네거나 대화를 나누기 어렵지 않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나?”

“예, 홍콩 국적이긴 한데……. 진짜 고향은 한국이에요.”

“거기 지난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나라 맞지?”

숀의 물음에 바비 찰튼도 생각이 난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알아요. 헝가리에게 9 대 0으로 깨졌다던가.”

“매직 마자르를 상대로 그리 못한 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살짝 기분이 상했던 준영이 반박하고 나서자, 숀도 거들고 나섰다.

“맞아. 잉글랜드도 7 대 1로 졌잖아.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군.”

“으윽…….”

부다페스트 참패 이야기가 나오자 바비나 대다수 선수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잉글랜드 입장에선 참으로 비극이지만, 스코틀랜드 사람인 숀에게는 그저 고소하게 까대기 좋은 건수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눈치를 살필 줄 알았기에 숀도 그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

“올해 몇 살이야?”

“스물셋이요.”

숀은 물론이고 다른 선수들도 놀랐다.

확실히 덩치는 컸지만, 얼굴은 어려 보였기에 18~20세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으므로.

“몰랐어! 나보다 2살이나 많을 줄은…….”

‘나도 당신이 지금 나보다 어릴 줄은 몰랐습니다, 바비 찰튼 경.’

준영이 어이없어하는 바비를 바라보고 있을 때, 숀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스물셋이라……. 그러고 보니 내가 이 팀에 온 것도 23살 때였지.”

“어떻게 입단하게 된 거죠?”

초대 제임스 본드가 축구 선수였을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준영은 현재 그의 행적이 무척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좀 했어. 하지만 난 축구 선수보단 배우가 되고 싶었지.”

숀은 모델이나 연극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클럽에서 종종 뛰었다고 한다.

그러다 버스비 감독이 선수 스카우트를 하러 온 팀과 시합을 했다고.

그때 버스비는 뛰어난 신체 조건에 예리한 플레이를 하는 숀을 눈여겨보고 바로 입단 제의를 했다고 한다.

“처음엔 안 하려고 했어. 프로 축구 선수라고 해 봐야 서른 정도에 은퇴하잖아. 7~8년의 프로 생활이 장래에 도움이 되겠나 싶었지.”

“그런데도 입단을 했군요.”

“감독님이 계속 설득을 했거든. 더구나 그땐… 제시하는 계약금이나 주급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내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어.”

손에 든 위스키 잔을 완전히 비운 숀의 표정은 무거웠다.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을 걷고 있는 그의 기분은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다.

***

숀 코너리는 젊었을 때 보디빌딩, 복싱을 하면서 축구도 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거절했죠.

아무튼 축구를 좋아했는지, 이후에도 영화나 TV 촬영을 하면서 스태프들과 공을 차며 놀기도 하고, 축구 경기도 곧잘 보러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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