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1화 (31/400)

Round 31. 위대한 아버지

위대한 아버지.

버스비의 밑에서 뛴 선수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단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명문 팀의 반석에 올려놓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그리 일컫는 건 아니지.’

버스비는 유스 시스템을 발판으로 어린 선수들을 미래의 스타플레이어로 키워 냈다.

괜히 버스비의 ‘아이들’이라고 불렸던 게 아닌 것.

선수들에게 있어 버스비는 진정으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지도력뿐만 아니라 인망에 있어서도 아버지처럼 여길 만큼 두터웠다.

심지어 버스비는 구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며, 항상 신사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다른 팀 감독이나 코치들도 그를 존경할 정도.

그렇기에 그의 품성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더 망설일 필요가 없겠네요.”

준영의 대답에 버스비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우리 팀으로 올 건가? 좀 더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아도 되겠나?”

“예, 더 생각할 필요도 없는 말씀을 해 주셨으니까요.”

처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버스비와의 만남은 그 결정을 굳혀 주었다.

‘그래, 이걸로 됐어. 버스비의 아이들, 그 전설의 군단에서 당당히 이름을 남기자.’

그리고 역사를 바꾼다!

기회를 얻었으니, 그 기회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

“존이다! 꺽다리 존이 왔어!”

준영이 리즈 로드에 나타나자, 한 무리의 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준영은 수첩을 내미는 그들에게 사인을 해 주었다.

사인에는 한글 이름과 ‘Korean Footballer’라는 표기를 잊지 않았다.

신문 기사가 떴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중국인이나 일본인인 줄 아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

“존, 그거 보여 줘요. 리버풀전에서 골 넣었을 때 보였던 개인기요.”

“아, 레인보우 플릭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4라운드 세 번째 골이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아마추어 클럽에서 공 좀 찬다는 이들도 그 화려한 기술을 따라 해 본다고 난리도 아니었던 것.

10대 소년이 내민 공을 받아 든 준영은 그 자리에서 레인보우 플릭을 펼쳐 보였다.

환호성과 함께 감탄이 터져 나오고, 군중 사이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한 번만! 한 번만 더요!”

“다른 기술도 보여 줘요!”

팬들의 요청에 잠시 몇 가지 트래핑 기술들을 보여 줬던 준영은 공을 다시 임자에게 돌려주었다.

“아 참, 사인해 줘야지. 공에 직접 해 줄까?”

“예, 그렇게 해 주세요.”

“알았어. 네 이름이……?”

“패트릭, 패트릭 휴즈 스튜어트요.”

“알았어. 존 Y. 리가 패트릭 H. 스튜어트에게…….”

사인하던 준영은 문득 이 이름을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보니 소년의 인상도 조금은 낯이 익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유명한 사람이 되는 녀석인가?’

그렇다면 나중에 오늘의 인연이 언급될 날이 올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기자로 보이는 사내가 말을 건네 왔다.

“리 선수, 맨체스터의 클럽으로 이적할 거란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그건…….”

준영이 뭔가 대답하기도 전에 팬들이 아우성을 쳤다.

“가지 마, 존!”

“허더스필드에 계속 있어 줘요!”

겨우 4게임 만에 허더스필드 타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타.

그저 꾸벅 고개를 숙이고 훈련하러 가는 그의 등 뒤로 팬들의 애원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

“형님, 진짜 가는 거예요?”

“유나이티드로 간다며?”

라커룸에서 만난 허더스필드 선수들도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맨시티와 연습 경기를 할 때부터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보다 뚜렷한 말들이 나돌았기 때문.

“형님이 가면 난 누구에게 배우라고?”

팀의 막내 데니스 로가 제일 울상이 되었다.

준영에게 배운 개인기와 훈련법 덕분에 어린 나이에 불구하고 주전으로 발돋움했던 그였기에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없어도 넌 잘할 수 있어.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도…….”

“그리 멀리 가는 것도 아냐. 나 어딨는지 알잖아?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멀리 안 간다.

그 말에 데니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니면, 형이랑 같이 유나이티드 갈래? 버스비 감독님도 너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 상당히 기대되는 유망주라고 말이야.”

“그래요?”

“야 인마, 존영!”

준영의 제안에 데니가 솔깃한 반응을 보일 때, 섕클리의 호통이 라커룸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갈 거면 혼자 곱게 가! 순진한 애 꼬드기지 말고!”

“하하하, 데니가 하도 섭섭해해서 말이죠.”

“그래도 바람 불어넣지 마! 그게 데니에겐 더 나쁘다고!”

기둥이 하나 빠지는 상황은 섕클리도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둥에 대들보나 다른 중요한 자재가 딸려서 빠지는 일은 원치 않았다.

“맨유에서 선수들을 줄 수도 있다던데요?”

“그야 이적료를 깎고 싶을 테니 그렇지.”

허더스필드에서는 준영의 이적료로 4만 파운드를 요구했다.

참고로 현재 맨유의 주전 스트라이커 토미 테일러의 이적료가 2만 9,999파운드였다.

1957년 기준으로 최고 이적료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윌리엄 존 찰스라는 선수가 기록했다.

그는 6만 5,000파운드의 이적료를 소속 팀에 안겨 주고 이탈리아 유벤투스로 떠났다.

“난 네 실력이라면 4만 파운드도 싸다고 봐. 하지만 유나이티드 임원들의 입장은 다르지.”

그들도 준영의 실력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2부 리그에서 겨우 4경기, 그리고 이전에는 어디에서 뛰었는지 알 수 없는 선수를 거금에 영입하기엔 부담이 있었다.

“애초에 유나이티드는 선수를 사 오기보다 키워서 써먹는 걸 좋아하는 구단이니 말이야.”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탐나는 선수가 있으면 지르기 마련.

토미 테일러나 조니 베리가 맨유에서 큰맘 먹고 지른 선수들이었다.

“뭐, 이적료 줄다리기야 사업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존 네게 중요한 건 어디에 있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야.”

당장 환경이나 여건이 마땅찮아도 성실히 훈련하고 경기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다면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일전에 만났던 버트 트라우트만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영국 사람들에게 증오를 받는 나치 독일군 출신.

하지만 빼어난 축구 실력으로 자리를 잡았고, 아마추어 클럽을 거쳐 프로팀의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1956년에는 축구 기자들이 선정한 FW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열심히 해. 적이든, 동지로든 언젠가 다시 너와 만나고 싶으니까.”

“네, 최고의 선수가 되어 다시 만나겠습니다.”

빌 섕클리.

장차 리버풀 FC의 위대한 아버지가 될 명감독은 준영의 당당한 포부에 미소를 지었다.

***

오후 3시 30분.

맨체스터의 팔로우필드에 자리한 위딩턴 여학교에서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교문이 열리고 하늘색 줄무늬 블라우스에 감색 치마를 입은 학생들이 재잘대며 쏟아져 나왔다.

“안녕. 잘 가.”

“내일 봐, 카린.”

카린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후,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언니들에게 달려갔다.

“리즈 언니, 이것 봐! 오늘 내가 수업 시간에 그린 거야!”

“어머나, 꽃이 참 예쁘네.”

“선생님이 그러는데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대!”

칭찬만 하는 리즈와 달리, 둘째 앤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평가해 주었다.

“달리의 그림 같네.”

“달리가 누군데?”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야.”

그때 학교 앞 도로로 빨간 쿠페 한 대가 나타났다.

여학생들의 시선이 차와 차에서 내린 사람에게 쏠렸다.

큰 체격에 잘 어울리는 하얀 셔츠에 재킷, 청바지 차림.

선글라스에 살짝 세워 올린 머리는 상당히 튀었다.

“저 동양인은 누구지?”

“굉장한 부자인가 봐!”

“아, 어제 신문에 나온 사람이야! 유나이티드의 새로운 멤버라든가…….”

여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던 청년은 프레드로 가문의 세 자매에게 손을 흔들었다.

“와, 존이다!”

카린을 필두로 자매들은 마중 나온 준영에게 다가갔다.

“존,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남작님이 갑자기 출타할 일이 생겨서 체트리가 따라갔어요.”

저택의 운전기사인 체트리는 세 자매의 등하교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집사인 카델이 대타로 가기로 했는데,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고.

“저런, 카델 아저씨는 괜찮은가요?”

“다른 덴 문제없는데 발을 크게 접질린 것 같아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죠.”

내친김에 자매들을 데리러 오게 되었다고.

학교가 어딘지 찾느라 애를 좀 먹긴 했지만, 다행히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자, 타시죠, 아가씨들.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제임스 딘.”

제임스 딘?

리즈의 위트에 준영은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렇게 보일 만한 차림이긴 하네.’

의도해서 입은 건 아니고, 그냥 좀 편한 차림을 했을 뿐이건만.

사실 좀 논다는 뒷골목 양아치들도 정장 같은 차림을 한 걸 생각하면 튀는 차림이 맞았다.

“Take it easy driving.”

“예, 걱정 마세요. 과속은 안 합니다.”

세 자매가 탑승하자 준영은 저택을 향해 차를 몰고 갔다.

“아 참, 이번에 유나이티드로 이적한다죠? 축하해요.”

“결정 난 건 아니고, 아직 협상 중이에요.”

“결정 나면 파티를 열자! 파티!”

지루하지 않게 말을 걸어 주는 리즈와 연방 까불거리는 카린.

이 둘과 달리, 앤지는 아까부터 책만 읽고 있었다.

이에 준영이 먼저 말을 건네 보았다.

“뭘 그리 재밌게 보고 있어요?”

“첩보 소설.”

앤지의 요약에 리즈가 살을 더 붙여 말했다.

“이안 플레밍의 카지노 로열이에요.”

“카지노 로열? 혹시 007이 나오지 않아요?”

“맞아요. 스파이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죠. 숙녀가 볼 만한 내용은 아닌데…….”

언니의 따가운 눈총에도 앤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밌으니까 보는 거지.”

“하하하, 확실히 점잖지 못한 내용이 있긴 해도 재밌는 건 사실이죠.”

준영의 맞장구에 앤지가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존도 007 시리즈를 봤어요?”

“물론이죠. 지금까지 나온 거 다 봤어요. 신작 개봉하면 곧장 극장으로 달려가곤 했으니까.”

‘다 봤다고?’

앤지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선을 앞에 두고 운전을 하고 있었던 준영은 그녀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읽지 못했다.

***

“아무래도 수상해.”

저녁에 자매들끼리 모여 숙제를 하고 있을 때, 앤지가 불쑥 이렇게 이야기했다.

“작은언니, 뭐가 수상하다는 건데?”

“존 말이야.”

프로 축구 선수라고 하는데, 영국에 오기 전에 어디서 축구를 했는지 불분명하다.

한국 태생이고 명문가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 외에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까 007 이야기만 해도 그래.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을 극장에서 봤다고 하다니.”

“잘못 말한 거겠지.”

“글쎄, 과연 그럴까?”

리즈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넘기려 했지만, 앤지는 그럴 맘이 전혀 없어 보였다.

“수상한 구석이 너무 많아.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이렇게 단언하는 그녀의 눈빛은 추리 소설 속 탐정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패트릭 휴즈 스튜어트.

스타트랙 시리즈에서 피카드 선장역을 맡고, 엑스맨에서는 프로페서 엑스를 맡은 명배우이지요.

허더스필드 타운의 열성팬으로, 유스 팀 회장도 맡고 있을 정도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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