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9. 아직은 모른다
현재 허더스필드가 사용하고 있는 4-1-2-3은 상당히 공격적인 포메이션이다.
최후방에서 곧바로 롱 패스가 날아오자 2명의 하프백들은 바로 인사이드 포워드로 전진했다.
이에 맞춰 3톱 공격수들도 중앙과 양 측면으로 달려갔다.
공격적으로 전진했던 리버풀 수비진은 허둥지둥 마크에 나섰지만, 허더스필드의 슈팅을 막지는 못했다.
터어- 엉!
공격수 스탠 하워드가 날린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갔다.
환호를 터트리려던 관중들의 입에선 아쉬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크, 아깝다!”
“근데 오늘 스코틀랜드 꼬마가 보이질 않네?”
“데니스 로 말이야?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데니스 로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데니는 준영의 개인기를 따라 배우고, 21세기 훈련법으로 몸을 단련해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아직 덜 여문 소년의 몸으론 사흘 간격으로 계속되는 강행군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서 빌 섕클리 감독이 오늘 경기에서 제외한 것이다.
대신 출전한 이가 바로 방금 전 슈팅을 날렸던 스탠 하워드.
화려함은 없지만, 폭넓게 활동하며 좋은 기회를 잘 잡는 선수였다.
“당황할 거 없어. 운은 우리에게 따르고 있으니까!”
리버풀 감독 필립 테일러는 선수들이 흔들리지 않게 독려하며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수비가 헐겁긴 하지만, 일단 한 골을 먼저 따내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어차피 파고들 상대의 빈 공간은 많으니까.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준영은 측면으로 파고든 빌리 리들에게 전해지는 롱 패스를 헤딩으로 끊어 냈다.
이후 드로잉으로 이어진 리버풀의 패스도 가로채, 공격수들에게로 보냈다.
“어째서? 제대로 빈 공간을 파고들었는데 왜 뚫지 못하는 거야!”
‘그야 어설프니 그렇지.’
가슴을 치는 테일러 감독을 본 섕클리는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실제 4-1-2-3 포메이션은 미드필드 측면에 공간을 내준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허더스필드의 풀백과 윙어들은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공수에 가담, 공간을 메웠다.
전체적으로 공수를 조율하는 건 4백 바로 앞에 하프백으로 출전한 이준영.
21세기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 혹은 볼란치라 불리는 포지션을 맡은 그가 상대 공격수에게 1차 압박을 가하면, 주변의 수비수와 풀백들이 지원하며 공을 뺏었다.
‘결국 빈 공간이라 노리고 들어온 곳이 함정이 되고 있다 이 말이지.’
상대가 알아서 함정으로 빠져 주면 수비는 쉬워진다.
경기를 여유롭게,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리버풀은 어설픈 새 전술로 너무 서두르는군. 의욕은 높아도 실속이 없으니…….’
섕클리는 이것이 필립 테일러의 실책이라 보았다.
리버풀에서 312경기를 뛴 테일러는 뛰어난 수비수로,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40살의 이 젊은 감독은 노력에 비해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거기다 이쪽은 기존의 축구 상식과는 다른 괴물 같은 녀석이 있으니까.’
리버풀의 공격을 족족 지워 버린 괴물.
21세기에서 온 멀티 플레이어 이준영이 이번엔 리버풀 진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스탠 하워드가 우측면으로 공을 몰고 가면서 시선을 끌었다.
그사이 준영은 페널티 아크 부근까지 전진해 들어갔다.
그가 오자 리버풀 수비수 돈 캠벨이 마크를 붙었다.
‘제법 체격이 좋다만, 날 막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야.’
그건 이미 안필드에서 2라운드 경기 때도 확인했다.
그때 측면으로 깊게 침투한 스탠이 중앙에 있는 공격수 빅터 쪽으로 컷 백(Cut Back)을 보냈다.
빅터는 헤딩하는 척, 슬쩍 공을 흘렸다.
이 패스가 준영의 발에 걸렸다.
그러자 캠벨은 준영이 슛을 못하게 찰거머리처럼 바싹 달라붙었다.
‘쳇, 집요한 녀석…….’
캠벨에게 신경 쓰는 사이, 또 다른 수비수 로니 모란이 달려와 태클을 날렸다.
그 바람에 공은 아웃되었고, 코너킥으로 공격이 이어졌다.
그런데 2라운드 때와 달리 코너킥 상황이 만만찮았다.
리버풀에서 키 좀 된다 싶은 녀석들이 죄다 준영의 주변에 붙었던 것.
그것만으로 모자라다고 봤는지, 손을 써서 잡거나 심판 몰래 걷어차기도 했다.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게 다구리였냐.’
공이 날아오자, 준영은 일부러 외곽으로 빠졌다.
그런데도 수비수 2명은 공의 방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준영을 쫓아왔다.
“너희들, 그러다 나 말고 딴 녀석한테 골 먹을 텐데?”
“그런 걱정은 안 해 줘도 돼.”
캠벨의 말대로 준영에게 수비수들이 붙는 만큼, 하프백과 공격수들이 빈자리를 메웠다.
방금 코너킥을 헤딩으로 걷어 낸 것도 센터 포워드인 빌리 리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걷어 낸 공은 역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앙선을 넘어 전진한 켄 테일러가 잡아채서 좌측면에 있는 동료 레스 마시에게 보낸 것이다.
마크맨 한 명을 달고 부지런히 틈을 노리던 레스 마시는 페널티 박스 외곽에 서 있는 준영에게 패스를 보냈다.
“슛은 못한다!”
“할 생각도 없어.”
준영은 들어온 패스를 논스톱으로 방향만 꺾어서 골문 쪽으로 절묘하게 찔러 넣었다.
딱 맞춰 골문으로 쇄도하던 스탠 하워드가 슈팅을 날렸다.
리버풀 골키퍼가 황급히 두 팔을 뻗었지만, 공이 골 그물을 흔드는 걸 막지 못했다.
“들어갔다!”
“기가 막힌 어시스트와 슛이군!”
애타게 첫 골을 기다리던 홈팬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이에 반해 원정 온 콥스는 시무룩한 표정을 금하지 못했다.
내심 리버풀이 선제골을 터트려 멀대 동양인과 허더스필드 녀석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건만.
그래도 그들은 낙담하지 않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은 몰라! 시간은 아직 많다고!”
“그래, 역전승이 더 짜릿한 법이지.”
“힘내, 빌리!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라고!”
“푸 만추의 제자에게 지지 마!”
이런 팬들의 마음에 호응한 리버풀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다.
그들은 실점에 실망하지 않고, 동점 골을 만들려고 애썼다.
덕분에 빌리 리들이나 토니 롤리에게서 꽤 위협적인 중거리 슈팅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성급하군.’
준영이 보기에 리버풀 선수들의 중거리 슛은 허더스필드 페널티 박스로 파고드는 게 힘들어서 쏘는 것 같았다.
‘아마 맨시티와의 연습 경기가 아니었다면 우리 쪽이 리버풀의 깜짝 전술에 당황했을지 모르지.’
어쨌든 현재 설익은 리버풀의 전술로는 허더스필드 수비진을 뚫기 힘들어 보였다.
‘차라리 원래 전술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내심 그리 생각했던지 리버풀 선수들의 위치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필립 테일러 감독은 큰 소리로 선수들을 독려하고 나섰다.
“자리를 지켜! 두들기다 보면 골은 나오게 돼 있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테일러 감독은 그런 판단에 현재 전술을 유지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허더스필드의 수비는 나무가 아니라 거미줄과 같았다.
도끼날에 잘리기는커녕, 도리어 끈끈하게 엉겨 붙는 거미줄 말이다.
‘큭, 뿌리칠 수가 없어!’
토니 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패스도 해 보고, 돌파 시도도 해 봤지만, 허더스필드의 협력 수비를 쉬이 떨쳐 낼 수 없었다.
특히 존 Y. 리는 철벽 그 자체.
곰처럼 덩치가 큰 놈이 표범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호시탐탐 공을 빼앗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안 돼. 패스를… 앗!’
“좋아, 역습 찬스다!”
토니 롤리에게서 공을 가로챈 준영은 중앙으로 달려가는 빅터에게로 곧장 롱 패스를 보냈다.
허공에 근사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정확하게 빅터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그냥 두면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
뒤늦게 따라붙은 리버풀 수비수들이 빅터의 어깨를 잡아채 쓰러트렸다.
“반칙이다!”
21세기라면 100퍼센트 퇴장감.
하지만 심판은 그냥 두었다.
리버풀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빅터가 쓰러지기 직전 패스한 공이 스탠 하워드에게 연결된 것을 보았던 것.
스탠은 망설이지 않고 논스톱 슛을 날렸다.
살짝 떠서 날아간 슈팅은 골키퍼의 손에 닿지 않는 골대 왼쪽 상단에 꽂혀 들어갔다.
전반 25분, 관중석에선 다시 한 번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Yay, yay, yay!”
“하하핫! 두 골째야! 두 골째라고!”
“이게 정말 믿어져?”
전반에만 2 대 0.
신이 난 관중들은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차게 응원가를 불렀다.
그 흥겨운 분위기에 휩쓸린 허더스필드 선수들도 응원가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때 그들을 깨우는 호령이 들려왔다.
“경기에 집중해!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준영의 외침에 흥분했던 선수들도 냉큼 냉정을 되찾았다.
‘존의 말이 맞아.’
‘노래는 끝나고 실컷 부르면 되니까…….’
아직은 모른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독이 바싹 오른 리버풀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흥겨움에 놓을 뻔한 정신줄을 챙겨 잡은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
전반전을 2 대 0으로 리드한 허더스필드는 후반전에서도 우세를 이어 갔다.
준영을 중심에 두고 끈끈한 수비와 빠른 역습으로 리버풀을 몰아붙인 것.
하지만 리버풀도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 않았다.
“물러서지 마! 아직 역전할 수 있어!”
“저놈들도 언제까지 저렇게 뛰진 못할 거야!”
리버풀 입장에선 당장 허더스필드의 전술을 공략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홈에서 당한 망신을 갚아 주지 않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두드리다 보면 열린다.
테일러 감독의 이 우직한 고집은 후반전 30분 무렵부터 통하기 시작했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리버풀을 상대하던 허더스필드 선수들의 발이 느려진 것.
‘이런, 다들 체력이 떨어졌군. 이쯤이면 교체가 필요한데…….’
유감스럽게도 현재 풋볼 리그에는 교체 규정이 없다.
월드컵에서는 골키퍼에 한해서 교체 규정이 있지만, 그마저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맨체스터 시티의 골키퍼 버트 트라우트만은 1956년 FA컵 결승전에서 목뼈가 부러진 상태로 끝까지 뛰어야 했다고.
‘통증이 너무 심해서 남은 시간이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던가?’
준영도 맥도웰 감독과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경악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이없는 일화는 따로 있었다.
‘처음엔 나는 목뼈가 부러진 줄도 몰랐어. 계속 아파서 사흘 뒤에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어 봤더니 골절이라고 하더군.’
그렇게 아팠으면 재깍 병원에 갔어야지, 안 가고 사흘 동안 미적댔다니!
‘1950년대의 선수 관리나 의료 지원이 다 이런 수준은 아니겠지만…….’
고개를 내저은 준영은 당장 현재 진행 중인 경기에 집중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다친 녀석들도 없고, 리버풀 녀석들도 꽤 지쳤으니까.’
하지만 수비에서 한 번이라도 실수가 벌어지면 끝장.
준영의 경우 아직 체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발전된 21세기 축구를 습득했다 하더라도 공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혼자서는 동료들의 실수를 커버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론이 많이 지쳐 보이는군. 특히 신경 써 주지 않으면…….’
하지만 정작 사고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
베르트 트라우트만의 저 일화는 진짜 거짓말 같은데 실화였습니다. 부러진 뼈가 간신히 붙어 있고, 신경도 다치지 않아 더 큰 부상은 모면했다고 하는데, 정말 요즘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