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8. 너무 이른 재회
“혹시 그때 사고가 났을 때 저한테 했던 응급처치 말인데, 존이 살던 곳에선 그것도 상식인가요?”
“아, 그건 알아 두는 게 좋다고 해서 배웠죠. 필드에선 언제든 돌발 사고가 날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리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악몽을 꾼 적이 있었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로 침대 위에서 세월을 보내다 차갑고 컴컴한 땅속에 파묻히는 꿈.
꿈속에서 자신의 몸은 소리조차 지를 수 없는 감옥이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그랬지. 의식을 되찾는 게 늦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미래인인지, 아님 한국에서 온 왕족인지.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렇게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게 다 존 덕분이라는 점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냥 지나간 일을 좀…….”
준영의 물음에 리즈는 살짝 낯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저기, 폐가 안 된다면 앞으로 훈련을 부탁해도 될까요?”
“트레이너를 맡아 달라고요?”
“네, 체력이 있어야 공부도 잘할 수 있다면서요? 존은 그쪽으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도와주면 좋겠어요.”
“좋아요. 얼마든지.”
준영은 쾌히 승낙했다.
체력 훈련 지도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그런데 난 훈련에 엄격하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예요.”
“네. 잘 부탁할게요, 교관님.”
거수경례를 보내는 리즈의 모습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맨유에서 제의가 온 것도 그렇고, 낯설기만 하던 1957년의 생활도 이제 잘 풀려 가는 것 같았다.
***
“우와, 이건……!”
“1954년식 라곤다 3리터지.”
준영은 알버트가 보여 준 자동차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전적인 멋과 현대적인 감성이 잘 뒤섞여 있는 붉은색 쿠페.
당장 도로에서 몰아 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차였다.
“이거 벤틀리 씨가 설계했다면서요? 탑기어에서 본 적이 있어요.”
“탑기어가 뭔가?”
“자동차를 소개하는 미래의 TV 프로그램이죠.”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작의 애마이기도 한 이 명품 자동차는 당대 최고의 기능을 갖췄다.
라디오와 히터, 자동식 소프트탑까지.
“자네 미래 자동차보다 성능이 모자랄지 몰라도, 타고 다니기엔 충분할 게야.”
“예? 이걸 저한테 준다고요?”
“그래, 데이비드 브라운이 준 거야.”
현재 준영의 DB12는 허더스필드에 있는 애S턴 마틴의 연구 시설로 실려 간 상태다.
그래서 데이비드 브라운이 대신 쓰라고 이 명품 쿠페를 보냈다고.
“사실 축구 선수가 타고 다니기엔 너무 고급이지.”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도 나름 뼈대 있는 왕가의 자손입니다만?”
“하하하! 맞아. 그랬지.”
몰고 다니긴 아까울 정도로 멋진 클래식 카였지만, 준영은 마음껏 써먹기로 했다.
선수가 필드에서 뛰어야 하는 것처럼, 자동차도 도로에서 질주해야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니까.
‘어디, 시운전을 한번 해 볼까?’
앞으로 자주 타고 다닐 거면 익숙해질 필요가 있으리라.
이에 준영은 냉큼 3리터에 올라탔다.
“어떤가. 골동품에 탄 기분은?”
“신기하면서도 불안하네요.”
안전벨트도 없고 시트 목받이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 점은 나중에 따로 개조를 부탁해야 할 듯싶었다.
뭐니 뭐니 해도 선수는 몸이 중요하니까.
“자, 어디 시동을 걸어 볼까?”
준영은 조심스럽게 3리터를 몰아 보았다.
옛날 자동차인 만큼 구조가 단순했지만, 한편으로 낯선 점도 꽤 있었다.
‘으윽, 핸들이 무거워. 브레이크도…….’
거기다 승차감도 좀 나빴다.
하지만 제일 불편하고 까다로운 건 따로 있었다.
“변속기 다루는 게 서툴군.”
“오토만 써 봐서요.”
운전면허시험 때나 써 봤던 클러치와 수동 변속기.
그것들을 상대로 한동안 진땀을 흘리던 준영은 알버트의 꼼꼼한 지도를 받아 가며 클래식 카에 점차 익숙해졌다.
얼마 안 있어 도로 주행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젠 잘 모는군.”
“좋은 코치를 만난 덕분이죠.”
준영의 대꾸에 미소를 지은 알버트.
그는 마침 생각났다는 투로 물음을 건넸다.
“아 참, 빌에게 들었는데 팀을 옮기게 될 거라면서?”
“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어요.”
“하긴 실력이 있으니 부르는 곳도 한둘이 아니겠지.”
“구단에서도 꽤 저울질을 하고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개막 후 쾌조의 3연승.
그것을 이뤄 낸 주역인 준영에게 여러 팀이 주목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팀들은 맨체스터 시티와 유나이티드.
이미 시티의 맥도웰 감독과는 대면을 끝냈다.
다음에 만날 사람은 유나이티드의 지도자 맷 버스비다.
“절 키워 준 신부님께 이야기로만 듣던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요.”
“버스비는 미래에도 유명한 감독인가?”
“네. 유나이티드를 암흑에서 건져 올려 유럽 챔피언으로 만들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암흑에서 건져 올리다니?”
유나이티드에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기는 걸까?
한적한 곳에서 차를 세웠던 준영은 앞으로 몇 달 후에 벌어질 ‘대사건’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알버트의 낯빛이 하얗게 굳어졌다.
“그런 일이……!”
“영국 축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참극이죠.”
“어떻게 막을 순 없나?”
알버트는 1, 2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죽고 다치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또한 먼 나라를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그렇기에 불행하고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게 달갑지 않았다.
맨체스터뿐만 아니라, 영국 축구 팬들에게 사랑받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구하고 싶었다.
“저도 이 시대에 처음 왔을 때는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동안 제 앞가림을 하는 데 바빴으니까.”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버스비의 아이들.
어릴 때부터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인지 그들이 생판 남이라 여겨지진 않았다.
가능하면 구하고 싶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잘하면 역사를 바꿀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
1957년 9월 4일.
허더스필드는 불과 일주일 만에 리버풀과 다시 만났다.
4라운드 경기를 보기 위해 리즈 로드로 인파가 모였다.
3연승의 효과 덕분일까.
개막전 때보다 훨씬 많은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오늘도 이길 수 있을까?”
“물론이지! 안필드에서도 완승을 거뒀는걸!”
“오늘도 우리의 오리엔트 특급이 한 골 넣어 줄 거야.”
낙관적인 예상을 하던 관중들 틈에서 심상찮은 소문도 들려왔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존을 영입하기로 했다던데.”
“뭐라고? 그 녀석은 절대 팔면 안 돼!”
“쳇, 구단 임원 놈들이 그걸 알면 다행이게.”
이렇게 기대와 우려의 감정에 휩싸여 있던 관중들은 생소한 광경을 목격했다.
경기장 입구 근처에 자리 잡은 웨이트리스들이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 나눠 주고 있었던 것.
“아가씨, 이거 공짠가?”
“네, 맛보시고 많이 사 가세요. 오늘은 특별히 반값이랍니다.”
“보딩톤이라…….”
맛도 괜찮았지만, 사람들이 주목한 건 웨이트리스들이 캔 맥주를 따는 모습이었다.
캔에 붙은 고리를 젖혀 올리자, 쉽게 캔에 구멍이 생겼다.
일전에 준영이 건네줬던 특허를 적용한 알루미늄 깡통이었던 것.
“저거 봐. 되게 쉽게 따는데?”
“딸깍 열리는 소리도 경쾌해서 듣기가 좋군.”
호기심이 생긴 사람들은 하나둘 캔 맥주를 샀다.
어차피 경기를 보면서 목을 축일 게 필요했으므로.
손으로 따기 쉬운 가벼운 용기에 든 시원한 에일은 그 용도로 딱 좋았다.
“우와아, 벌써 관중석이 꽉 찼어!”
“어이, 밀지 마!”
자리가 복잡하자, 일부 관중들은 관중석을 넘어 경기장 안쪽까지 밀고 들어왔다.
다행히 필드까지 난입하는 무질서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관중이 많이 올 줄 알고 외곽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놓았나 보군.”
“단순한 바리케이드 같진 않은걸.”
카메라를 든 기자들은 바리케이드 바로 앞에 자리를 잡은 만원 관중을 찍었다.
그들이 바리케이드라고 여긴 A보드 광고판에는 보딩톤 맥주의 상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
“와아아아-!”
필드에 양 팀 선수들의 입장하자, 관중들의 환호성이 높아졌다.
“John Young Lee!”
“John Young Lee!”
앞서 3경기에서 보여 준 활약 때문일까.
준영을 연호하는 관중들이 상당히 많았다.
덕분에 준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흥, 인기가 많아 좋겠군.”
리버풀의 주장 빌리 리들이 빈정대며 엄포를 놓았다.
“어쩌다 보니 안필드에선 우리가 당했다만, 오늘은 너희가 당하게 될 거다.”
“글쎄, 아저씨. 설레발은 필패라는 말이 있거든.”
준영의 코웃음에 리들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 웃음이 곧 일그러지게 될 거다. 네놈들, 특히 너에게 한 방 먹이려고 여러모로 준비를 했으니까.”
“아, 그러셔.”
누군 놀고 있었는 줄 아는가.
이쪽은 그저께 맨체스터 시티와 연습 경기까지 했다.
“이런 명언이 있어, 아저씨.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처 맞기 전까지는.”
“큭……!”
낯빛이 붉어지는 리들을 내버려 두고 준영은 자기 위치로 내려갔다.
곧 심판이 휘슬을 불 타임이었으니까.
삐익-!
저녁 6시 15분, 홈팀 허더스필드의 선축으로 디비전2 4라운드 경기가 시작되었다.
빌리 리들의 엄포가 공갈은 아니었는지, 리버풀 선수들은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나왔다.
수비 라인까지 상당히 전진시켜 공격에 치중했는데, 전술 또한 2라운드 때와 달랐다.
“이봐, 존. 저 녀석들 전술은 분명…….”
“그래, 맞아. 헝가리식이군.”
MM 포메이션.
공격수의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순간적인 수적 우위를 달성, 상대를 압박하여 우세를 점하는 전술이다.
“시티 녀석들이 썼던 거잖아.”
“그쪽보단 어설퍼 보이는군.”
이미 맨체스터 시티와의 연습 경기를 통해 MM 포메이션을 겪어 본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대처해 나갔다.
오히려 당황한 건 리버풀 쪽이었다.
“저놈들, 이상한 전술을 쓰고 있어.”
“칭크의 위치도 지난 경기랑 달라! 하프백에 있어.”
오늘 경기에서 허더스필드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연습 경기 때 사용했던 4-1-2-3 포메이션으로 나왔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상대의 전술에 리버풀 선수들은 물론, 감독인 필립 테일러도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돌파구를 찾아냈다.
“측면이다! 놈들의 양쪽 측면에 공간이 많아! 그쪽을 공략해!”
테일러 감독의 지시에 알란 아코트를 비롯해 리버풀 공격수들은 허더스필드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빈 공간으로 공을 몰아가던 그들은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맨시티가 빠졌던 삼각형의 포위망에 걸려 버렸던 것.
“돌아다니는 건 자유지만, 공은 두고 가.”
“쳇, 얕보지 마!”
준영의 마크를 치달로 빠져나가려던 리버풀 공격수 토니 롤리.
하지만 준영이 먼저 어깨를 집어넣으며 그가 달려갈 길목을 막아 버렸고, 공은 켄 테일러가 낚아챘다.
“뛰어. 역공이다!”
***
현대에 LED 방식으로 사용되는 A보드 광고판은 60년대부터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가정에 텔레비전 보급도 많아지고, 스포츠 경기의 TV 중계도 늘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영국에서는 1960년부터 축구 경기 실시간 중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없던 건 아니지만, 기술적, 환경적인 한계로 국가 대항전이나 FA컵 결승전 같은 일부 경기에 국한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