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7화 (27/400)

Round 27. 달콤한 제안

펍을 나온 준영은 맥도웰 일행을 따라 조용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맨체스터 시티 감독을 맡고 있는 레스 맥도웰이네. 이쪽은 우리 팀 주전 골키퍼 버트 트라우트만이지.”

“네, 반갑습니다. 전 이준영입니다. 여기 분들에겐 존 Y. 리로 통하고 있죠.”

준영의 소개를 들은 버트는 흥미로운 기색으로 말을 건넸다.

“헝가리인들처럼 성씨를 앞에 쓰는군. 혹시나 싶어 묻는 건데, 헝가리에서 축구를 배웠나?”

“아뇨. 헝가리는 가 본 적도 없어요.”

준영의 대답에 두 사람은 내심 깜짝 놀랐다.

플레이 스타일이 헝가리 쪽과 비슷해서 혹시 그쪽에서 축구를 배우지 않았을까 생각했건만.

그런데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할 줄이야!

“그럼 축구는 어디에서 배웠나? 가르쳐 준 감독은 어떤 사람이고?”

“고향에서 배웠습니다. 혹시 맨시티에 입단하는 데 제 과거 이력이 필요한 겁니까?”

맥도웰의 물음에 준영은 살짝 거부 의사를 보였다.

이 둘은 자신의 과거가 궁금한 모양인데, 그걸 말해 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불편한 척한 것이고.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하네.”

“아뇨. 동양인이 축구 좀 하는 게 신기해서 이것저것 묻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민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충분히 이해하네.”

배타심과 인종 차별적인 사고에 따른 편견.

맥도웰은 준영이 어떤 성가신 일들을 겪었을지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었다.

‘내가 경솔했어. 그런 건 입단한 후에 차근차근 물어보면 되는 것을…….’

내심 자책한 맥도웰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도 겪었으니 알겠지만 이 나라, 특히 축구계는 외국인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지. 여기 버트도 우리 팀에서 데뷔할 때 꽤 시끄러웠어.”

감독의 말에 버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논란이 되었던 건 나치의 훈장을 받은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국인 독일은 지난 대전 때 영국에 많은 피해를 입혔고.

“밖에서 뭐라고 하든 우린 버트의 실력을 믿고 그의 편이 되어 주었지. 그 신뢰가 발판이 되었기에 우리는 우승컵을 들었고, 버트는 풋볼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성공할 수 있었어.”

준영은 맥도웰이 무슨 의도에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그리고 이미 예상하고 있던 달콤한 제안이 흘러나왔다.

“우리 팀으로 오게. 버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네의 편이 되어 주지.”

***

준영이 맥도웰 감독 일행과 대면하고 있을 때, 알버트는 저택을 찾아온 3명의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래를 엿본 기분이 어떻습니까, 월터?”

“먼 걸음이 헛되지 않군.”

알버트의 말에 대꾸한 노인의 이름은 월터 오웬 벤틀리.

현재는 은퇴했지만, 벤틀리 모터스를 창업한 유명인이다.

“진짜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창고에 있던 그 차를 보니 지금까지 보거나 만들었던 것들은 장난감처럼 느껴지더군요.”

월터의 곁에서 맞장구를 치는 50대 엔지니어.

그는 타텍 마레크라는 폴란드 출신의 망명자로 유능한 엔진 개발자였다.

“기가 막히게 멋진 차체에 혁신적인 구조, 엄청나게 많은 전기 전자 장치들까지…….”

데이비드 브라운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타텍의 고용주이자, 현재 애S턴 마틴과 라곤다 두 자동차 업체를 소유한 경영자였다.

연방 감탄을 아끼지 않던 데이비드는 한숨을 쉬듯이 말을 이었다.

“70년 후의 기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과연 우리가 뜯어본다고 해서 얼마나 알 수 있을지……?”

“알 만큼만 알아도 득이 되지 않겠나?”

그동안 알버트는 준영의 자동차 문제로 꽤 고민했다.

미래의 기술과 정보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한편으로, 혹시나 난감하고 위험한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우려도 하고 있었다.

한때 정치판에 발을 담근 적이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미래 기술의 총아를 방치하는 건 아쉽더군.”

이미 차주인 준영에게 허락을 받았고,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동차 쪽으로 예전부터 친분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남작님의 말이 옳습니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선 폭풍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죠.”

타텍의 맞장구에 월터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최대한 폭풍을 피하는 게 좋아.”

“그렇기에 여기 두 사람이나 월터 선생을 항해사로 택한 겁니다.”

“이보게, 남작. 사람을 함부로 믿지 않는 게 좋아.”

월터 O. 벤틀리는 과거 사업에 실패하자 이혼을 당했고, 아내에게 아끼던 자동차마저 뺏겼다.

이때 빈털터리가 된 그를 도와준 사람이 알버트였다.

그래서 월터는 은인인 알버트가 곤경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 차, 독일 놈들 엔진을 썼더군. 아무래도 21세기의 애S턴 마틴 기술자들은 전부 얼간이들인 모양이야.”

“하하하, 기업 간의 협력이 있었으니 그 정도로 멋진 자동차를 만든 게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지만…….”

월터의 말문이 뚝 끊겼다.

문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렸기 때문.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리즈가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아가씨셨군요. 이런 건 고용인들에게 시켜도 될 텐데…….”

“제가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리즈의 대답에 세 손님은 움찔했다.

자신이 가져오는 게 좋다니.

마치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리즈가 다과를 놓고 나간 후, 데이비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손녀분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만?”

“리즈라면 걱정할 것 없지.”

알버트는 손녀를 믿었다.

호기심이 강하지만, 현명하고 신중한 아이였으니까.

***

다음 날 새벽.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난 준영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으며 어제 맥도웰 일행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내 편이 되어 주겠다라…….”

솔깃한 말이었지만, 바로 승낙하진 않았다.

어차피 고삐는 자신이 쥐고 있으니까.

적당히 튕기면 몸값을 올려 받기를 바라는 허더스필드 구단 이사들도 기뻐하리라.

“미안하지만, 맨시티만 선택지는 아니란 말이지.”

사실 맨시티와 연습 경기를 하기 전, 섕클리에게 꽤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맷 버스비가 자신의 영입과 관련해서 물어봤다고.

기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쪽에서 연락을 했을 줄이야. 그것도 버스비 감독이 직접!

‘거기다 다음 주에 만나자는 제의까지 했으니…….’

잘하면 이 시대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생각했던 것보다 이른 시기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 리즈 양이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운동을 하러 나가던 준영은 도중에 리즈와 마주쳤다.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려는데, 리즈가 생각지 못한 요청을 해 왔다.

“저, 혹시 테니스 연습 좀 도와줄 수 있어요?”

“테니스요?”

“네, 얼마 후에 시합이 있어서요.”

올해 18살인 리즈는 고등부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테니스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운동을 권장하기도 하고, 리즈도 스포츠 쪽으로 관심이 많았으므로.

“아 참, 그런데 존 씨는 테니스를 해 본 적이…….”

“물론 해 봤죠. 그것도 많이.”

축구 선수가 테니스까지 한다?

의아해하던 리즈는 이내 납득하고 넘어갔다.

‘하긴 왕족이라고 했지.’

상류층 출신이면 테니스 정도는 교양으로 익혀 두었을 터.

하지만 그게 아니라 혹시 다른 이유라면?

‘미래…….’

리즈의 머릿속에서는 어제 할아버지와 손님이 나누었던 이야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

테니스장은 저택 정원 한편에 있었다.

네트를 두고 리즈와 마주 선 준영은 바쁘게 코트 위를 쫓아다니며 라켓을 휘둘렀다.

‘뜻하지 않게 혁신적인 광경을 보는군.’

리즈가 입고 있는 테니스 유니폼.

민소매 블라우스에 스커트는 무릎 위에서 팔랑거렸다.

아직 미니스커트는커녕, 여성들의 치마 길이가 종아리 부근이 한계임을 생각하면 꽤 과감한 차림이다.

‘프릴 반바지가 좀 에러지만, 모델이 워낙 좋으니까.’

단아하고 청순한 미모에 잘 어울리는 금발의 포니테일.

여기에 제법 볼륨 있는 몸매와 늘씬한 각선미는 캐주얼한 차림과 참 잘 어울렸다.

‘덕분에 좋은 눈요기를… 어이쿠!’

한눈파는 사이, 리즈가 구석을 노리고 공격을 펼쳤다.

잽싸게 몸을 날린 준영은 구석에 떨어진 공이 아웃되기 직전에 살려서 네트 너머로 보냈다.

하지만 이내 리즈가 반대편으로 공을 쳐 보냈다.

“못 받을걸요.”

“천만에!”

급하게 달려갔던 준영은 발로 공을 받아 냈다.

“반칙이에요!”

“하하, 나도 모르게 그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테니스공을 리프팅한 준영은 리즈 쪽으로 공을 돌려보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공을 주고받은 둘은 목을 축이며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테니스도 잘하시네요.”

“그야 테니스나 스쿼시는 훈련으로 좋아서 많이 했으니까요.”

특히 스쿼시는 짧은 시간에 효율이 높은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심폐력과 전신의 근력 향상 등등, 두루두루 도움이 되는 것이다.

“순발력을 높이는 데 최고죠. 그럼 작고 재빠른 공격수들도 훨씬 수월하게 마크할 수 있어요.”

“다른 종목의 운동도 축구를 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거군요. 다른 축구 선수들은 그렇게 한다고 못 들었는데…….”

“내가 온 곳에선 다들 그렇게 훈련해요.”

대강 둘러댄 준영은 슬쩍 말을 돌렸다.

“사실 그건 축구 말고 다른 종목들도 마찬가지죠. 학교 테니스 코치님이 달리기나 체조 같은 걸 시키지 않던가요?”

“네, 어쩔 땐 연습 시간 내내 라켓 한번 안 들 때도 있어요. 그게 싫어서 관둔 부원들도 많고요.”

“원래 좋은 훈련일수록 따분하고 지겨운 법이죠. 제가 볼 땐 그 코치님은 잘 지도해 주고 있는 것 같네요.”

달리기는 순발력과 지구력을 높여 주고 체조는 전신 근육을 단련시키고 유연성을 높여 준다.

열심히 하면 테니스 경기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기기 위해선 힘과 체력이 중요해요. 뭐, 어떤 일이든 그렇죠. 공부도 체력이 없으면 못 버티니까.”

준영의 말에 리즈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건강해야 공부도 잘할 수 있다고 하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던 것이다.

“존 씨는 스포츠에 대해 잘 아는 것 같네요.”

“그야 뭐… 이 정도는 상식이니까.”

리즈가 알기로 그걸 상식이라고 여길 정도로 꼼꼼하게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준영 또래의 젊은이들은 더더욱.

‘어쩌면 미래에서는 상식일지도.’

어느 날, 낯선 차를 타고 와서 자신을 구해 준 이방인.

그는 범상치 않은 용모와 행색에 유창하지만 어딘가 특이한 말투를 썼다.

지금처럼 뭔가 잘 아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불편해하거나 낯설어하기도 했다.

정말 존은 미래에서 왔을까?

***

월터 O.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와의 경쟁에서 지고 1931년 회사마저 롤스로이스의 자회사로 넘어갔습니다.

한동안은 롤스로이스의 기술이사로 있다가 라곤다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라곤다를 데이비드 브라운이 흡수해서 애S턴 마틴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데이비드 벤틀리라는 축구 선수도 있는데, 이름과 달리 벤틀리랑은 아무 상관없더군요. ^^; 베컴의 후계자로 주목받은 선수였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찍 은퇴를 해 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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