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6화 (26/400)

Round 26. 톱클래스의 품격

“데니, 좀 더 파고들어가!”

“상대 하프백을 놓치지 마!”

원 볼란치 위치에 선 준영은 동료들에게 공을 적절히 배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료들이 들어갈 위치나 마크해야 할 대상도 지적해 주었다.

‘저 녀석이 경기를 만들어 가고 있군.’

플레이메이커(Play Maker).

미래에 나올 단어가 맨시티 선수들의 머리에 불쑥 떠올랐다.

‘아무튼 녀석을 막으면 상대 공격도 막힌다!’

그럼 자연히 흐름도 바뀔 터.

이렇게 판단한 맨시티의 하프백과 수비수들이 준영을 마크했다.

물론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늑대처럼 준영을 쫓으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하지만…….

‘잠깐, 너무 녀석에게 시선이 쏠린 거 아닌가?’

데이브 유잉은 화들짝 놀랐다.

시선만 쏠린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녀석에게로 몰려 있던 터라 여기저기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준영과 허더스필드 공격수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뛰어, 데니!”

“이미 가고 있어요!”

데니스 로가 무인지경이 된 공간으로 달려갔다.

화들짝 놀란 맨시티 수비수들이 황급히 마크에 나섰지만, 그것은 함정.

준영에게 패스를 넘겨받은 이는 레스 마시였다.

‘쳇, 파울을 하더라도……!’

제일 가까이 있었던 데이브 유잉이 레스의 어깨를 잡아챘다.

다행히 위치는 페널티 박스 밖.

하지만 레스는 넘어지기 직전 슬쩍 공을 흘렸고, 이것은 패스 후 바로 쇄도하던 준영에게 연결되었다.

‘또 이놈인가!’

다행스럽게도 골키퍼 버트가 각을 좁히면서 나왔다.

동료 수비수들의 분전에 용기를 얻었는지, 그는 부상의 공포를 떨쳐 내고 과감히 선방을 시도했다.

‘잘 나왔어요, 버트! 그 정도로 거리를 좁혔으면…….’

슈팅은 막힌다!

데이브가 그리 확신한 순간, 준영이 발끝으로 공 밑을 가볍게 차올렸다.

공이 수직으로 튀어 오르자, 버트는 껑충 뛰어올라 손을 뻗었다.

손끝에 걸렸지만, 묵직한 가죽 공은 그 저항에 아랑곳하지 않고 뒤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잽싸게 버트를 지나친 준영은 떨어지는 공을 가볍게 차 넣었다.

“우와아- 골이다!”

“Great!”

허더스필드의 공격 과정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주고받는 패스도 좋았지만, 달려 나오는 골키퍼를 제치는 침착한 마무리도 정말 일품이었으므로.

“저 친구, 정말 대단하군.”

“내가 말했잖나. 헝가리 놈들보다 한 수 위라고.”

맥도웰의 감탄에 섕클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곁에서 준영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기에.

***

“멋진 골이었어, 존!”

“하하핫, 놈들의 콧대가 납작해졌다고!”

준영이 터트린 동점 골의 효과는 컸다.

후반전 경기 흐름이 완전히 허더스필드 쪽으로 기울어져 버린 것이다.

기세가 오른 허더스필드는 내친김에 역전 골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이에 반해 맨체스터 시티는 패스 미스를 저지르는 등, 실점 이전보다 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제길, 어쩌다가 이런…….’

‘어떻게든 구겨진 체면을 만회하지 않으면!’

마음속으론 만회를 다짐했지만, 플레이는 맨시티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계속 이대로 우왕좌왕했다면 정말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팀을 지탱하고 이끌어 주는 레전드, 톱클래스의 골키퍼가 있었다.

“당황하지 마! 아직 지고 있는 건 아니야!”

데니스 로의 슈팅을 잡아챈 버트 트라우트만은 일부러 시간을 지연하면서 자기 팀 선수들을 진정시켰다.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해. 옆의 동료들을 도와주면서…….”

‘저거 반칙인데.’

버트의 행동에 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골키퍼는 6초 이내에 공을 처리해야 한다. 또 고의로 시간을 지연하다간 옐로카드를 받게 된다.

하지만 1950년대에서는 어느 정도 시간 지연은 허용되었는지, 심판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맨시티 선수들은 숨을 돌리고, 침착함을 되찾을 기회를 얻었다.

“버트 말이 맞아.”

“가능한 공수 간격을 좁혀. 상대와의 머리싸움에서 지면 안 돼.”

맨시티의 공격 형태가 바뀌었다.

3톱이 2톱으로 변하고, 인사이드 포워드가 셋으로 늘어난 것.

준영은 그들의 변화한 전술을 눈치챘다.

‘MM 포메이션이군.’

WM 포메이션을 가변시킨 매직 마자르의 전술.

포진만 바뀐 게 아니라 맨시티 선수들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미드필드 지역에서의 활동이 많아지고 협력 플레이가 늘어난 것.

그로 인한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공간에서 수적인 열세가 줄어들면서 대등한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2부 리그 팀 상대로 정신없이 뛰게 될 줄은…….”

“역전당하기 싫으면 닥치고 뛰어!”

팽팽하게 이어지던 경기는 후반 30분대가 되면서 양상이 바뀌었다.

경기를 주도하던 주전급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이 나면서 활동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

이렇게 되자, 양 팀 진영 여기저기서 빈 공간이 나타났다.

당연하지만 공격수들은 그쪽으로 파고들었고, 수비수들은 황급히 쫓아다니며 수비했다.

“공간 내주지 마! 배후로 돌아 들어가는 녀석을 조심해!”

“파울하지 마! 길목만 막아!”

“끌지 말고 바로 패스해! 전방으로 보내라고!”

준영은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분주하게 움직이며 상대의 공격을 저지하거나 슈팅을 차단했다.

그 와중에 가장 많이 부대낀 상대는 바비 존스턴이었다.

‘쳇, 정말 끈덕진 놈이군!’

‘지겨우니까 이제 오지 마라, 좀!’

준영과 존스턴 둘 다 서로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한편으로 실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수비수가 우리 팀에 오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되겠어.’

‘확실히 데니가 호들갑 떨 만한 실력이야.’

어쨌거나 마지막에 이기는 건 나다!

둘 다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을 때, 부지런히 파고들 기회를 노리던 존스턴 쪽으로 패스가 들어왔다.

살짝 발을 대고 방향만 틀어 놓은 존스턴은 순간 스피드로 준영을 제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간파한 준영이 먼저 길목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공은 허더스필드 골키퍼 샌디가 낚아챘다.

삐익-!

시계를 바라보던 심판이 경기를 종료시켰다.

힘겨운 경기를 치른 양 팀 선수들 모두 필드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반응은 전혀 반대.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아쉬움을 머금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맨시티는 소나기를 쫄딱 맞은 표정이었다.

“2부 리그 팀과 비기다니…….”

이겨야 했다.

그래야 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당한 참패를 씻어 내고 반등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에 인상적인 활약으로 주전으로, 정규 선수로 발돋움하는 것은 덤.

그런데 자신감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망신을 당할 뻔했으니!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여러 가지를 배운 셈 치자고.”

맥도웰 감독은 시무룩해진 선수들을 다독였다.

단지 위로하느라 한 말은 아니다. 맥도웰 본인도 배운 게 있었으니까.

‘꽤 흥미로운 전술이었어. 매직 마자르의 전술보다 혁신적으로 보일 정도였으니…….’

오늘 후반전에 허더스필드가 보여 준 전술은 그 정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센터백을 2명 박는 4백 수비진, 측면 자원을 활용한 숫자 싸움, 사방에서 그물처럼 옭아매는 협력 수비 등등.

만약 허더스필드 선수들이 보다 전술에 익숙했다면? 그들의 체력이 전술의 효과를 끌어올릴 정도로 좋았다면?

분명히 무승부에서 끝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빌은 이 정도로 참신한 전술을 생각해 낼 만한 친구가 아닌데…….’

그러니 누군가 알려 준 사람이 있지 않을까?

맥도웰의 눈은 가장 유력한 후보에게로 돌려졌다.

“존 Y. 리…….”

낯선 전술 환경에서 능숙한 움직임을 보이고, 동료들을 진두지휘했다.

‘전술적인 능력까지 빼어난 선수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선수임이 틀림없어.’

반드시 영입해야 한다.

FA컵은 물론, 향후 리그까지 제패하기 위해서도!

맥도웰은 확고하게 마음을 굳혔다.

***

“Bravo!”

맨시티와의 연습 경기가 끝난 후.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근처의 펍으로 자리를 옮겨 뒤풀이를 즐겼다.

“이겼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긴 해도 나쁜 결과는 아니잖아.”

리그에서도 승전을 이어 가고 있다.

이 흐름을 잘 타고 가면 다음 시즌에는 1부 승격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위로 올라가는 방법은 그 길만 있는 건 아니다.

“아까 에버튼 스카우터가 와서 나한테 명함 주고 갔어.”

“에버튼 쪽에서 왔다고?”

“응, 테스트 한번 받으러 오라고 하던데?”

이런 제의를 받은 건 레이 윌슨뿐만이 아니었다.

데니스 로나 켄 테일러 등 오늘 좋은 활약을 보인 선수들에게 달콤한 제안이 쇄도했다.

“생각보다 이 경기를 보러 온 스카우터들이 많았나 보군.”

“하하하, 우리가 요새 잘나가고 있잖아.”

흥겨운 마음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맥주는 꿀처럼 달았다.

기분이 들뜬 상황에서 취기까지 오르자, 누가 시작이랄 것도 없이 노래를 불러 대기 시작했다.

저마다 한 곡씩 부르면 따라서 열창하고.

그러다 준영에게로 차례가 왔다.

“형님도 한 곡 불러 봐요!”

“그래, 오늘 경기의 주인공이 빠져서야 되나!”

모두의 부추김에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 요즘 유행가는 잘 모르는데…….”

“아무거나 불러!”

“그래, 신나고 흥겨운 걸로!”

선수들뿐만 아니라, 한잔하러 왔다가 덩달아 흥이 오른 동네 사람들도 한 곡 뽑아 보라며 닦달했다.

잠시 망설이던 준영은 벽에 걸려 있던 기타를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태어난 나라의 노랜데…….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봐줘.”

양해를 구하고서 곧장 기타로 간주를 시작했다.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김수철의 젊은 그대.

국가대표 경기에서 서포터들이 곧잘 부르는 응원가다.

처음 듣는 한국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흥겨운 가락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율동을 보냈다.

몇몇은 어설프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싸랑 쓰론 저먼 크테(Sarang throne german kte)!”

“독일이 뭘 어쨌다는 거지?”

“독일 놈들을 이겼다는 승전가인 모양이지!”

뜻도 모르고 다들 따라 부르던 노래가 끝맺을 즈음, 펍의 문이 열리며 섕클리와 맥도웰 감독, 그리고 맨시티 골키퍼 버트가 들어왔다.

이미 조용한 곳에서 섕클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맥도웰은 허더스필드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실례하네. 여기 존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부러운 눈길로 자리를 뜨는 준영을 바라볼 뿐.

“스카이블루에서 정말 형님을 영입하려나 보네요.”

“감독이 직접 찾아왔으니 그렇다고 봐야지.”

스카우터들이 찾아온 것과는 격이 다르다.

이건 그야말로 톱클래스급 선수에 대한 대우였으니까.

‘나도 형님처럼 누군가가 절실히 원하는 선수가 되어야지.’

맨체스터의 제왕 데니스 로.

아직은 여물지 못한 레전드는 보다 일찍 톱클래스로 나가기 위한 뜻을 세웠다.

***

본문에 언급된 레이 윌슨은 훗날 1966년 월드컵에 잉글랜드 대표로 선발되어 우승컵을 듭니다.

실제로 나중에 에버튼으로 이적하는데, 은퇴 후에는 다시 허더스필드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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