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5. 시대 초월
준영이 허더스필드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던 7월 말.
그는 팀의 전술을 보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여기도 MW 포메이션을 쓰는구나.’
명장 허버트 채프먼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이 시대 기준으로도 30년은 지났다.
그래서 훈련이 끝난 후, 섕클리와 대면한 준영은 참다못해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너무 구닥다리 전술이에요.”
네가 뭘 안다고 나서냐!
이런 호통을 들을 것까지 각오했지만, 섕클리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네 말이 맞아. 나도 요즘 유행하는 헝가리식의 MM 포메이션 같은 걸 써 보려 했지만, 내 성미에는 영 맞지 않더군.”
섕클리는 복잡하지 않고 피지컬을 이용하는 축구를 선호했다.
물론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만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본인의 전술적인 역량이 부족하고, 코치들 중에도 전술 능력이 기발한 인물이 없다 보니 이렇다 할 시도를 못하고 있었다.
“선수들의 기본적인 역량이 비슷하다면 전술로 결판이 나겠지. 좀 더 위로 가자면 반드시 그 부분을 보완해야 하고 말이야.”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묻겠는데, 혹시 좋은 전술을 알고 있나?”
호기심 어린 섕클리의 물음에 준영은 21세기 때 전 소속팀이었던 AS 모나코의 전술을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있던 팀에선 주로 4-4-2를 썼었어요.”
“4-4-2? 그런 전술도 있나?”
“그게 그러니까요…….”
센터백 2명과 좌우 풀백 2명의 4백 수비, 그리고 4명의 미드필더와 2명의 공격수.
4-4-2는 4백 전술 중 가장 기본적인 포메이션이다.
이 전술은 다양한 전환이 가능하고 압박과 공간 점유, 간결한 패스와 빠른 공격 전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건 1950년대 사람에겐 낯선 형태였다.
“공격수가 겨우 2명? 어떻게 공격을 하는 거야?”
“그야 측면을 이용하죠. 공격할 때 좌우 측면의 미드필더, 아니 하프백과 풀백들이 그만큼 전진해서 공격 지원을 해 주는 겁니다.”
“과연! 근데 그렇게 넓은 영역을 뛰자면 체력 소모가 심할 텐데?”
“그래서 기본적으로 체력을 중시하죠. 측면 포지션은 더더욱.”
준영의 말을 들은 섕클리는 생각에 잠겼다.
매직 마자르의 MM 포메이션도 기본적으론 MW의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
공격이나 수비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숫자를 늘려 우위를 점하기 쉽게 하려고 그렇게 변모한 것.
“결국은 숫자 싸움을 위한 포메이션이라는 거군. 어느 위치에서든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말이야.”
“네, 물론 플레이어의 기량이 좋으면 숫자의 우위도 통하지 않긴 하지만요.”
“그렇지. 아무리 수비가 다섯이라도 죄다 얼간이들이면 한 명에게도 뚫리니까.”
하지만 실제로 그만큼 뛰어난 플레이어는 많지 않다.
더구나 일대일 마크가 불가능한 톱클래스 선수를 막을 방법은 숫자의 우위를 두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4-4-2라. 한번 시도해 볼 필요는 있겠군.”
흥미를 느낀 섕클리는 준영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이 전술을 선수들에게 훈련시켰다.
사커 매니저라는 축구 게임에서 팀을 지휘해 봤던 야매(?) 감독 준영은 4-4-2 전술과 관련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항을 모두 알려 주었다.
공수에서 어떤 식으로 변형이 가능한지, 또 선수들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등등.
하지만 이런 노력에 불구하고, 4-4-2를 정착시키는 덴 실패했다.
빅터 같은 고참 공격수들이 새로운 포메이션에 몹시 낯설어했던 탓이다.
“아무리 그래도 공격수 2명은 적은 것 같아. 3명으로 하면 안 될까?”
“그럼 4-4-2가 아닌데요.”
“아니면 바꾸면 되는 거지. 별로 필요도 없는 하프백을 하나 줄이면 되잖아.”
하프백은 현대의 미드필더.
공수 조율에 가장 필요한 포지션인데 그걸 필요 없다고 줄이자고 하다니!
어이없어하는 준영과 달리, 섕클리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빅터가 제안한 대로 공격 숫자를 늘려 포메이션을 수정했다.
“공격은 기존의 W 형태로 두자. 전방 공격수 셋, 그 아래에 인사이드 포워드 겸, 하프백을 맡을 2명을 두는 거지.”
“그럼 수비는요?”
“존이 말한 대로 4백으로 하고, 바로 위쪽에 하프백 한 명을 두는 거지.”
그렇게 섕클리가 수정한 이 포메이션을 본 준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이게 나와?’
4-1-2-3.
21세기 FC 바르셀로나가 사용했던 포메이션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단 말이지.’
뜻밖에 시대에 앞선 포메이션이 튀어나오게 된 상황을 떠올리던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선수들은 몰라도 섕클리는 이 플랜B, 4-1-2-3 포메이션을 좋아했다.
많은 활동량으로 점유율을 높이고, 매우 공격적인 축구를 할 수 있었기 때문.
‘물론 단점도 있어. 하지만 골을 넣기 위해서는 보다 공격적인 시도가 필요하지.’
전술을 복제했다고 현재 허더스필드가 21세기 FC 바르셀로나가 될 순 없다.
선수들의 능력이나 플레이 방식은 반세기 이상 차이가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어.’
변화는 양 팀 모두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반전에 양 팀 다 일부 선수들을 교체했다.
정식 경기가 아닌 연습 경기인 만큼 여러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테스트를 해 보려고 했던 것.
물론 중심을 잡아 줘야 할 중요 주전들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준영도 남았고, 맨시티 쪽에서도 버트가 그대로 골문을 지켰다.
“포메이션을 바꿨군.”
“자네처럼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고.”
맥도웰은 섕클리의 새로운 전술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공격은 일부 선수가 바뀐 정도였지만, 수비는 달랐다.
보통 최후방에 3명의 수비수가 있는 것과 달리 4명이 있었다.
아니, 공격 시에는 좌우 측면의 풀백들이 꽤 깊숙하게 전진했기에 센터백 2명이 최종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꽤나 공격적인 진형이군.”
“당연히 골을 넣어야 하니까.”
“하긴…….”
꽤 그럴듯해 보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풀백이 전진한 만큼, 최후방 측면에는 빈 공간이 나타난 것.
‘마치 이쪽으로 역습해 달라는 것 같잖아.’
맨시티 선수들도 낯선 포메이션을 보고 처음엔 당황했다.
하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바비 존스턴을 시작으로, 어디를 파고들면 되는지 금방 눈치를 챘다.
실제 후반전 맨시티의 첫 공격은 존스턴이 이런 측면으로 파고들고, 그에게 롱 패스가 전달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준영은 존스턴이 공을 잡기 전에 헤딩으로 롱 패스를 끊어 냈다.
센터백 자리를 켄 테일러와 론 심슨에게 맡긴 그는 후반전에는 하프백으로 뛰고 있었다.
21세기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 볼란치라고 부르는 매우 중요한 포지션이었다.
‘공수 밸런스를 맞추는 자리니까 말이야.’
준영은 허더스필드에서 이 임무를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다른 선수들보다 미래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깊고, 또 과거에 뛰어 본 경험도 있었으므로.
“또 측면이다!”
“막아! 훈련 때처럼 포위해!”
첫 공격이 무산되었지만, 맨시티는 이후에도 계속 측면으로 찔러 들어왔다.
그때마다 준영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상대 패스를 차단하거나, 풀백이 수비 위치로 돌아올 때까지 지연시켰다.
그리고 아직 익숙하지 못한 수비수들을 지휘해 가며 맨시티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저건… 오오!’
가만히 지켜보던 맥도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빈틈이 많아 보이는 포메이션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대응을 잘하고 있지 않은가.
‘수비 라인 바로 앞의 하프백이 1차 저지를 하고, 중앙 수비수와 풀백과 협력하여 삼각형의 포위망을 만들어 내는군.’
이런 삼각형의 포위망은 수비 지역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당연히 공이 가는 곳마다 허더스필드가 3 대 1의 수적 우위를 보였다.
‘하나 그 정도로 쉽게 막힐 만큼 우리 선수들은 만만하지 않아. 특히 존스턴은!’
맥도웰의 생각대로, 존스턴은 맥아담스 등 가까이 있는 동료들과 부지런히 패스를 주고받으며 허더스필드의 수비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뿌리치면 바로 새로운 포위망이 나타나곤 했다.
‘제길, 이래서는 좋지 않아!’
존스턴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 수비망을 뚫거나 피하는 와중에 공격 속도는 팍 떨어져 버렸으니까.
공격 속도가 떨어지면 그만큼 상대 수비수들의 대응은 여유로워진다.
여기에 맨시티 쪽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바로 수비를 거듭하면서, 허더스필드 선수들이 익숙하지 못한 전술에 요령이 쌓여 갔다는 점.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처음에 잦았던 준영의 지시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다들 적응해 가는군. 특히 레이는 물 만난 고기 같아.’
레이 윌슨은 예전부터 체력이 우수하고 그만큼 활동량이 많아 적극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
레이의 왕성한 활동량에 그가 자리 잡은 쪽으론 맨시티가 쉬이 공격을 들어가지 못했다.
“젠장, 각성제라도 먹고 왔나.”
투덜대던 존스턴은 가까운 동료에게 패스를 건네주려 했다.
하지만 그 패스는 켄 테일러에게 끊겼고, 공은 허더스필드 쪽으로 넘어갔다.
“좋아, 가즈아!”
공을 넘겨받은 준영이 전진함과 동시에 허더스필드의 풀백들도 앞으로 내달렸다.
그뿐만 아니라, 하프백과 최전방 3톱도 훈련했던 대로 상대 진영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윙 포워드들은 좌우로, 공격형 미드필드 역할을 맡은 하프백들은 센터 포워드를 지원하기 위해 중앙으로 찔러 들어갔다.
여기에 준영과 풀백들이 가세하고, 최후방 센터백들도 중앙선 가까이 전진하며 지원에 나섰다.
전반과 사뭇 다른 전격 공세.
당황한 맨시티 선수들의 낯빛이 유니폼처럼 파랗게 변했다.
“이렇게 밀고 올라오다니……!”
“당황하지 말고 사람부터 확실히 잡아!”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려운 법.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고, 활동량도 늘었으며 패스도 빠르게 주고받았다.
이렇다 보니 공격수 한두 명을 마크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데이브 유잉같이 경험 많은 고참 선수들은 재빨리 대응에 나서고, 버트가 선방을 해내면서 일단 급한 불을 껐다.
하지만 이후에도 위험한 상황이 이어졌다.
수비진에서 공을 뺏겨 바로 허더스필드에게 역습을 허용하기도 했다.
“젠장, 정신 안 차릴 거야?”
질책하는 고참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데니스 로를 비롯해 허더스필드 공격수들부터 적극적으로 인터셉트를 시도하고, 패스를 방해했기 때문.
이렇다 보니 맨시티 공격수들은 좋은 패스를 받기 힘들었다.
아니, 미드필드에서 공을 빼앗겨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
“침착하게 공을 돌려! 상대가 모든 지역을 장악하진 못하니까!”
보다 못한 맥도웰이 필드의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일단 활동량에서 뒤처지니, 공이 있는 곳에선 맨시티 선수들보다 허더스필드 쪽이 더 많았다.
아까 허더스필드의 수비에서 보았던 3 대 1의 우위가 어느 곳에서든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마치 그물에 걸린 것 같잖아.’
이 그물망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열심히 탈출구를 찾는 건 필드에 있는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허더스필드를 지휘하고 있는 건…….’
‘동양인이다! 저 녀석을 중심으로 패스가 돌고, 상대 선수들이 움직이고 있어!’
‘상대 공격과 수비의 시발점도 저 녀석이야!’
준영이 맡은 원(One) 볼란치.
맨시티 고참 선수들이 본 대로 그가 현재 허더스필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는 현대 축구에서 매우 중요한 포지션입니다.
이건 당장 우리나라 대표팀 경기를 봐도 알 수 있는데, 중원에서 조율해 주는 선수가 없으면 결과가 썩 좋지 않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