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0화 (20/400)

Round 20. 멀티 플레이어

맥도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팀 스카우터들이 다녀갔단 이야기는 들었지?”

“그래.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좀 잘나간다 싶으니 대들보를 뽑으러 오셨더구만.”

현재 맨체스터 시티는 준영을 원하고 있었다.

1956년 FA컵 우승을 거두었던 시티는 지난 56-57시즌에 18위라는 참혹한 성적을 거두었다.

무려 20경기나 패배했는데, 자칫하면 디비전2로 강등당할 뻔했다.

그래도 올 시즌 첫 경기인 첼시 원정전은 승리를 거두며 좋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그 경기도 2실점을 했지.”

“내가 볼 땐 지금 시티의 문제는 수비수가 아니라고 보는데?”

“맞아. 하지만 전반적으로 변화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

섕클리가 알기로 맥도웰은 새로운 시도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과거 선수 영입 문제로 심한 논란을 일으켰고, 매직 마자르의 MM 전술도 도입해서 써먹곤 했다.

“하지만 그 전술이 완벽하지 못해. 우리 팀엔 좋은 선수가 많지만, 새로운 전술에 핵심이 될 만한 인물은 없는 상태야.”

“그래서 존이 눈에 들어왔다는 건가?”

“그래. 그 친구는 적극적인 활동력과 다재다능한 플레이 능력을 가졌다고 들었어. 내가 맞추지 못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될 수 있을 것 같더군.”

맥도웰의 말에 섕클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퍼즐을 맞추려다 메인 로드(* 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홈경기장)가 또 한 번 뒤집어지면 어쩌려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 존이란 선수는 자네 팀에서 잘하고 있잖아. 거기다 일본인도 아니고 말이야.”

과거 논란이 된 선수를 생각하면 존 Y. 리는 약과.

섕클리도 부정할 수 없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존의 실력이면 1부 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거라고 생각해. 기왕에 가야 한다면 그 친구가 잘 뛸 수 있는 팀에 가야 한다고 보고 있고.”

“그래서 찾아온 걸세. 그가 정말 1부 리드에서 통할 실력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

하지만 훈련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이에 맥도웰은 섕클리에게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이번 주 토요일 경기가 끝나고 연습 경기를 한번 해 보는 게 어떻겠나?”

“연습 경기를?”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 보네만?”

섕클리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작년에 시티가 부진했다고 하지만, 유명 플레이어들이 자리 잡은 좋은 팀이다.

그러니 경기력을 점검하고, 선수들이 뭔가 한 수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게 틀림없다.

“나쁘지 않군. 잘못하면 대들보 말고도 뽑혀 나가는 게 생기지 않을까 불안하지만 말이야.”

“이런, 내가 동향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친근하게 섕클리의 어깨를 도닥인 맥도웰은 다음 주를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섕클리는 다시 필드에 있는 선수들, 준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맨체스터 시티라……. 괜찮은 팀이지. 레스라면 믿을 수도 있고.”

맥도웰은 선교사의 아들로 해외 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 외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넓었다.

또 선수들을 존중하고 자부심을 챙겨 줄 정도로 성품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레스, 이 쟁탈전이 쉽지는 않을 거야. 유나이티드도 뛰어들었으니까.”

이미 전날에 맷 버스비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섕클리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

8월 31일.

허더스필드는 디비전2 3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돈캐스터 로버스 FC와 만났다.

돈캐스터는 작년에 디비전2에서 14위를 한 중하위권 팀.

별로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여긴 이 팀에 놀랍게도 준영이 아는 스타플레이어가 뛰고 있었다.

‘해리 그렉이 이 팀에 있었다니!’

해리 그렉.

올해 25살인 이 북아일랜드 출신의 골키퍼는 뮌헨 비행기 참사 당시에 동료와 승객들을 구조한 용감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나중에 맨유에서 247경기를 뛸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지. 버스비 감독이 영입할 정도면 지금도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야.’

실제 맨유로 올 때 해리 그렉은 당시 골키퍼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23,500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했다.

당장 섕클리 감독이나 코치들도 장래성이 있는 뛰어난 골키퍼라며 높이 평가해 주고 있었다.

“소문대로 겁나게 크구만.”

대기실에서 준영과 눈이 마주친 해리 그렉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먹고 그리 큰 거야?”

“좋은 건 골라 먹고 나쁜 건 안 했죠.”

“나쁜 거라면……?”

“술하고 담배.”

알코올과 니코틴은 성장 호르몬 분비에 지장을 준다. 당연히 키도 자라지 못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의 대다수 선수들은 아무렇지 않게 탐닉하고 있다.

그나마 허더스필드는 최근 흡연자가 줄어든 편이었다.

준영이 틈만 나면 잔소리를 했기 때문.

처음엔 시큰둥하던 이들도 담배를 피우면 정력이 약해진다고 하니, 태세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거참, 성직자 같은 소리를 하는군.”

“신부님 밑에서 컸으니까요.”

잠시 후, 양 팀 선수들은 필드로 나갔다.

경기장에 모인 15,000여 명의 관중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쏠렸다.

요즘 상당히 화제가 된 플레이어였으므로.

“저기 있는 꺽다리가 그 동양인 수비수란 말이지?”

“그래,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고.”

“정말 수비수 맞아? 지금 최전방에 있잖아.”

“어? 정말이네! 공격수로 나왔잖아!”

관중들이 본 대로 준영은 데니스 로와 나란히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했다.

허더스필드 팬들에겐 크게 납득하지 못할 변화는 아니었다.

수비수임에도 뛰어난 득점력과 테크닉을 가진 그가 공격도 잘할 거라 보았으니까.

다만 돈캐스터 측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키가 큰 준영을 공략할 작전을 나름대로 짜고 나왔는데, 최전방으로 나와 버리다니!

“이러면 작전이고 전술이고 모두 허사잖아!”

“저 자식, 등 번호라도 바꾸고 나올 것이지!”

불만을 오래 토로할 틈도 없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

경기는 초반부터 허더스필드에 우세한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데니스 로가 전반 1분도 안 되어 첫 슈팅을 날렸고, 이후로 허더스필드는 연달아 위협적인 돌파와 슈팅으로 돈캐스트를 흔들어 댔다.

이런 공격을 주도해 가는 건 바로 준영이었다.

“가라, 꺽다리!”

“돈캐스터 골대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허더스필드의 원정 팬들은 준영이 지난 경기 때 보여 줬던 멋진 개인기를 다시 보여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오늘 준영의 움직임은 단조로웠다.

‘잔디가 정상이라야 뭘 하든지 하지.’

돈캐스터에는 오전까지 많은 비가 내렸고, 그 바람에 필드는 거의 진창처럼 변해 있었다.

개인기를 마음껏 부릴 환경은 못 되는 것이다.

이에 준영은 무리한 드리블보다 포스트 플레이에 중점을 두었다.

후방에서 높은 패스가 오면 헤딩으로 따내 빈 공간으로 보내거나 돌파하는 동료들의 앞에 떨어트려 준 것.

이런 공격은 상당히 효과가 좋았다.

돈캐스터 쪽에는 준영을 제대로 견제할 만큼 뛰어난 피지컬을 가진 수비수가 없었기 때문.

‘그래도 2명을 마크로 붙이거나 하진 않는군.’

단지 일대일이 아닌 걸 비겁하다고 여겨서는 아니다.

수비가 한쪽으로 쏠리면 다른 쪽이 그만큼 무방비해지기 때문.

아무리 21세기보다 전술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해도 밸런스에 대한 이해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전담 수비수도 나름 열심히 막고 있고.’

이름이 패티 게빈이라고 했던가.

피지컬로 안 된다 싶으니 그는 온갖 꼼수를 다 동원했다.

유니폼을 잡는 건 예사.

심심찮게 다리를 걸거나, 팔을 잡아챘다.

그렇게 더럽고 위험한 파울은 아니지만, 모기처럼 성가시게 달려들다 보니 준영도 마음대로 활개 치기 힘들었다.

‘제법 노련한 구석이 있구만.’

물론 그 정도로 완벽하게 막을 순 없었다.

삐익!

돈캐스터 페널티 박스 바로 앞에서 허더스필드가 프리킥을 따냈다.

패티가 헤딩 볼을 따내려는 준영의 유니폼을 잡아당겼던 것.

꽤 거칠게 잡아챘던지 중심을 잃은 준영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우우우-”

골대 뒤에 자리를 잡은 허더스필드 팬들이 파울을 한 패티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패티는 심판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렇게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어요.”

“아닌데 사람이 넘어지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영은 내심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할리우드 액션에 대한 대처가 미비하구만!’

아까는 일부러 중심을 잡지 않았다.

거기다 그럴듯한 액션까지 더하니 심판은 그대로 프리킥을 선언했다.

‘그래도 넘어진 건 페널티 박스 안이었다고. 프리킥이 아니라 페널티킥을 받을 거였단 말이야.’

아무래도 심판이 돈캐스터에 살짝 홈 어드밴티지를 주는 모양.

그래도 이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아예 파울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프리킥 공격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

“누가 찰까?”

“당연히 존이 차겠지.”

1차전 때 프리킥을 기억하는 홈팬들의 예상대로 준영이 키커로 나왔다.

그는 잔뜩 경계하며 벽을 늘어선 돈캐스터 선수들을 잠시 바라보다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뻥-!

슛이 터지는 동시에 돈캐스터 선수들이 재빠르게 뛰어올랐다.

하지만 지면을 살짝 떠서 날아간 공은 그들의 발밑을 지나 골대로 날아갔다.

‘제길, 깔아 찰 줄이야!’

깜짝 놀랐던 골키퍼 해리 그렉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날린 펀칭에 막힌 슛이 좌측 골대 하단을 맞고 튕겨 나왔다.

“휴, 막았……!”

안도하던 해리는 총알같이 쇄도하는 데니스 로를 보고 낯빛을 굳혔다.

재차 몸을 날렸지만, 데니가 공을 골대로 밀어 넣는 게 더 빨랐다.

“와아아아아!”

‘안 들어가는 줄 알았네.’

관중들이 환호하는 사이, 준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씁쓸한 표정을 짓는 해리 그렉에게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데니의 쇄도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전의 프리킥을 막은 건 정말 나이스 플레이였으니까.

하지만 엄지 척을 모르는지, 아니면 실점한 게 맘에 들지 않는지 해리 그렉의 표정은 구겨진 채 펴지지 않았다.

***

선취골을 얻어 낸 이후에도 경기는 허더스필드가 주도해 나갔다.

준영은 최전방의 전봇대 역할을 제대로 하며 공격진으로 패스를 연결해 주었다.

거기다 상대 수비가 공을 잡으면 적극적인 전방 압박을 가했다.

“쳇, 공격수로 나온 놈이 왜 여기서 수비를 하려고 해?”

“후후후, 오늘은 수트라이커가 내 역할이라서.”

관중들의 눈에는 준영의 전방 압박은 그리 효과가 없어 보였다.

가로막거나 달려든다고 실제로 차단되는 패스는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전문가들이 보기엔 달랐다.

“저 녀석, 첫 패스부터 나오기 힘들게 만드는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터 조 암스트롱.

버스비를 대신해 오늘 경기를 보러 온 그가 준영의 전방 압박 플레이를 보고 혀를 내 둘렀다.

그러자 젊은 스카우터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큰 효과가 있어요?”

“있지. 공격진으로 가는 패스는 최대한 빠른 게 좋다고.”

그래야 수비가 대응하기 전에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즉, 준영이 전방 압박으로 상대 공격을 지체시키면 그만큼 허더스필드의 수비수들은 대처할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수비하는 입장에선 매우 귀중하단 말이지.”

공격수로 뛰면서도 수비에도 큰 도움을 주는 선수.

체격이나 발재간은 접어 두더라도, 저런 적극성을 가진 선수를 어찌 영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해리 그렉은 맨유에서의 경력도 있지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북아일랜드 대표팀을 8강에 올려놓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상당히 겸손한 성품으로, 뮌헨 비행기 참사 때 여러 사람을 구하며 칭송을 받았지만, 마땅히 할 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수 생활을 하면서 번 돈도 쿨하게 자선 단체에 기부했을 정도로 대인배이셨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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