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9화 (19/400)

Round 19. 최초의 시도

하드먼은 1949년에 있었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같은 지역 연고팀이 외국인 선수를 영입했을 때 얼마나 시끄러운 논란이 일었는지.

안 그래도 인종적으로 다른 선수를 영입했다가 그와 같은 논란을 겪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런 걱정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이제 두 경기 치렀을 뿐이니 더 두고 보는 건 어떤가?”

“그러다가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기회가 있다 해도 섕클리가 쉽게 놓아주려 할지 의문이군.”

“그건…….”

이미 데니스 로 영입에 실패했던 적이 있었기에 버스비도 확신을 하지 못했다.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섕클리는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고, 의욕도 강했다.

‘그는 야망이 있어. 절대 2부 리그 감독으로 남을 사람은 아니지.’

자신의 제국을 만들기 위한 인재들을 남에게 쉽게 양보하려 들지 않을 터.

하드먼 회장의 지적대로 존 Y. 리의 영입을 성공하려면 섕클리라는 관문부터 넘어야 할 것이다.

만만찮은 관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이는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었다.

“허더스필드 경영진엔 내가 이야기를 해 보지. 자네는 섕클리를 한번 설득해 봐.”

“알겠습니다.”

그렇게 버스비가 존 Y. 리의 영입에 대해 잠정적으로 합의하고 나왔을 때였다.

구단 사무실로 수석 스카우터 조 암스트롱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야단났네, 맷!”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요?”

조가 이렇게 흥분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던 버스비는 이어지는 조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시티 녀석들이 허더스필드 임원들과 접선했다고 하네!”

“예? 그럼 설마…….”

“당연하지! 지금 상황에서 그놈들이 노리는 목표물이 뭐겠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 딱 이럴까.

시티, 맨체스터 시티 FC.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 이번에도 제일 먼저 덤벼들었다.

***

준영이 이억관을 만난 다음 날, 프레드로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서 오게, 찰리. 낯빛이 아주 좋구만.”

“하하하, 남작님께서 아주 좋은 사업 물품을 알려 주셨으니까요.”

저택을 방문한 사람은 찰리라는 양조업자였다.

그는 알버트의 옆에 있는 준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친구는……!”

“그래, 존 Y. 리야. 자네도 알고 있나 보구먼.”

“물론이죠. 요즘 축구 팬들 사이에 화제의 대상이니까요!”

예상 이상으로 화젯거리가 되었지.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늘 신문에도 어제 경기 오프사이드에 대한 논란이 실려 있더군요.”

“오프사이드가 분명하다고 하던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서 말입니다.”

2부 리그 경기라지만, 화제의 대상인 동양인이 일으킨 논란이다 보니 꽤 여러 신문사에서 기사를 올렸다.

언론사들 입장에선 준영이 정말 좋은 소재였기 때문.

오리엔트 특급, 허더스필드의 골리앗, 푸 만추(* 영국 소설에 나오는 동양인 악당)의 제자 등등.

저마다 별명을 붙이며 준영에 대한 온갖 자극적인 기사를 남발했다.

개중에는 한국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둥, 일본에 멸망한 왕가의 후손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그나마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헝가리와 한국의 혼혈이라거나, 아시아로 망명한 러시아 제국 귀족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기사들도 있었다.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월등한 체격을 가졌을 리 없다는 옹졸한 사고를 가진 자들의 망상이었다.

“심지어 내 숨겨 둔 자식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기사도 있더군.”

“아이고, 그건 좀 심했군요.”

준영도 그 기사를 보고 난감해했다.

하지만 알버트는 딱히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미래인이라 좀 특이한 사고방식이나 언행을 보이긴 하지만, 준영은 바른 심성과 강한 의지를 가진 젊은이였으니까.

오히려 그 기사를 보고 나서 정말 양자로 삼아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꾸며 대기 바쁘더라고요.”

준영의 말에 알버트가 반박을 하고 나섰다.

“일본에 멸망한 왕가의 후손인 건 사실이잖나?”

“그건 좀…….”

족보에서 복잡하고 자세한 계보를 생략해 버리니 굉장한 과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과장의 효과는 탁월했다.

찰리 사장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금방 달라져 버렸으니까.

“역시, 보통 청년이 아니었던 거군요!”

“거기다 한 가지 더 알려 주자면, 지난번에 내가 자네에게 알려 준 특허는 존의 것이라네.”

“아, 그 알루미늄 깡통의 특허가!”

감탄하는 표정을 지은 찰리는 곧바로 가방을 뒤졌다.

사실 오늘 프레드로 저택을 방문한 이유는 알버트가 알려 준 특허를 이용한 견본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보여 드릴 참이었죠.”

“오, 잘 만들었군. 아주 쉽게 열려.”

알버트는 캔에 적용된 원터치식 따개를 열어 보고는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바닥을 왜 오목하게 만드는지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해야 압력을 잘 견딜 수 있더군요.”

“그렇겠지. 알루미늄은 약한 소재니까.”

준영도 견본을 살펴보았다.

약간 투박하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21세기 맥주 캔과 거의 같았다.

“어, 보딩톤?”

캔의 로고를 본 준영은 깜짝 놀랐다.

맥주 통에 붙은 파리, 아니 꿀벌 2마리와 이를 둘러싼 리본.

분명히 낯익은 브랜드의 맥주였다.

“찰리 씨는 보딩톤의 사장님이셨습니까?”

“그래. 우리 회사를 아나?”

“제가 아는 신부님이 좋아하시던 거라서요.”

밝은 갈색에 크림처럼 하얀 거품.

탄산이 적어 목 넘김도 부드럽다. 살짝 달콤하지만 그냥 시원하게 넘어가는 그런 맥주다.

‘분명히 라거가 아니라 에일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준영은 반가웠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젊은 시절의 터너 신부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지?

“자네가 아는 신부님은 맨체스터 출신인 모양이군. 아무튼 자네의 특허 덕에 우리 회사 맥주가 날개를 달 수 있게 되었어.”

“이제 견본이 나왔을 뿐이잖습니까.”

“물론 그렇지만, 이 업계에 몸담은 경험이 그리 확신해 주고 있네!”

보딩톤은 맨체스터 지역에서나 팔리고 있는 지역 상품이다.

찰리 사장은 판로를 더 확대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경쟁 업체들이 많다 보니 성과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알버트의 소개로 알루미늄 캔의 특허를 알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호기심이 들어 해 본 거였지. 하지만 견본이 나오니 직원들이 모두 호평하더군.”

기존의 양철 캔보다 가볍고 뚜껑을 따기도 쉽다.

무엇보다 냉장고에 넣으면 금방 시원해졌다.

보딩톤의 시원한 맛을 더욱 잘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장점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게 된 거군요.”

“바로 그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특허, 우리 회사 제품에만 쓸 수 있게 해 주면 안 되겠나?”

찰리 사장의 제의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게 어림도 없다는 거절의 의사로 보였던 모양.

찰리가 바로 조건을 변경했다.

“독점이 싫으면 우선권만 줘도 괜찮아. 로열티는 섭섭지 않게 지불하겠네.”

“좋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작님 지인이시니.”

“하하하, 고맙네.”

원만한 협상이 이루어지고,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 서류가 작성되었다.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을 때, 준영이 뭔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제의를 했다.

“아 참, 깡통 바뀐 김에 광고 제대로 하시는 건 어때요?”

“광고? 신문에다가?”

“그것도 있지만, 이런 방법도 있죠.”

21세기에는 흔하지만, 현재는 없는 광고 방식.

준영이 그것을 알려 주자, 알버트와 찰리는 기발하다는 듯 무릎을 쳤다.

“괜찮은 광고 사업이 되겠군.”

“예, 잘하면 웨스트요크셔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시장을 넓힐 수 있겠어요!”

그들이 반색하는 사이, 준영의 말이 이어졌다.

“서둘러야 할 겁니다. 다음 홈경기는 9월 첫째 수요일이니까요.”

시간이 생명이다!

성공을 위해 세 사람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대체 뭐 하는 거지?”

훈련을 하다 잠시 쉬고 있던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목수들이 리즈 로드로 잔뜩 몰려왔기에 경기장 보수 공사를 하나 싶었다.

그런데 각목과 판자로 삼각 구조물을 만들어 필드 외곽에 빙 둘러 세우는 게 아닌가.

“관중 난입을 막는 장애물 같은 게 아닐까? 지난번 홈경기도 난입이 있었잖아.”

“장애물치고 낮아. 거기다 페인트로 그림과 글씨를 그리는 걸 봐선 상점 간판 같기도…….”

데니스 로는 곁에 있던 준영을 바라보았다.

다들 생소하게 여기는 데 반해, 그는 그렇지 않았으므로.

“형님은 저거 뭔지 아는 거야?”

“A보드 광고판.”

경기 협찬 업체들이 광고할 때 사용하는 도구.

21세기에는 LED를 설치해서 광고가 바뀌거나 영상을 넣어 시선을 끌곤 했다.

하지만 1950년대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는지 경기장에서는 광고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벽이나 기둥에 벽보나 전단지 같은 게 붙어 있는 게 고작.

이에 준영은 A보드 광고판을 이용한 광고 방식을 알버트와 찰리에게 이야기를 해 줬다.

수완이 좋은 두 사람은 곧장 허더스필드 구단과 접선하여 경기장에 광고판 설치 허락을 받아 냈다.

물론 구단에 대가를 약속하고.

“저걸로 나오는 수익 중 일부는 우리 주머니로도 들어와. 주급을 함부로 올리진 못하니 아마 훈련 인센티브나 지원금 같은 걸로 지급되겠지.”

“우와, 정말?”

데니는 물론이고 주변의 다른 선수들의 입이 벌어졌다.

특히 주전이 아닌 선수들이 더 좋아했다. 출전 보너스를 받기 힘든 그들의 입장에서 추가 수입은 반갑기 짝이 없었으니까.

“근데 어떻게 그리 자세하게 아는 거야?”

“제가 제안한 사업이니까요.”

주장 윌리엄의 물음에 준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따로 해야 할 일은 없는 거야?”

“예, 그냥 열심히 하면 돼요. 팀이 잘나가는 만큼 광고도 탄력을 받고 수익이 늘어나니까.”

“그렇구나!”

다들 의욕이 솟구쳐 올랐다.

다만 수비수 켄 테일러는 다른 뜻을 품고 불타올랐다.

“은퇴하고 저런 일을 해도 괜찮겠는걸. 광고판을 그리거나 도안을 맡아 보거나…….”

“아 참, 넌 미술 학교를 다니는 중이었지?”

“응, 일러스트 쪽으로 공부하고 있어.”

“언제 그림 좀 보여 줘. 얼마나 잘 그리는지 궁금하니까.”

실력이 괜찮으면 이번에 알버트와 찰리가 세운 광고 회사에 추천해도 괜찮으리라.

“자! 그만 떠들고 훈련하자. 3라운드 경기가 코앞이라고!”

준영의 다그침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

점차 선수들의 마음을 잡아 가며 이끄는 그의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넓은 이마와 온화한 인상을 가진 신사였다.

“여기는 어쩐 일인가, 프리메이슨 양반.”

준영을 바라보던 신사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다르게 거친 인상의 사내.

바로 이곳 허더스필드 타운의 감독 빌 섕클리였다.

“오랜만이네, 빌.”

“그래. 반갑군, 레스. 근데 이렇게 염탐질을 당당하게 하러 올 줄은 몰랐군.”

“리그도 다른데 무슨…….”

“헹, 남의 팀 선수를 빼 가려고 보러 오는 것도 염탐질이지!”

섕클리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채 웃음 짓는 신사.

그는 바로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 레스 맥도웰이었다.

***

레스 맥도웰은 1956년 맨체스터 시티에게 FA컵 우승을 안겨 준 감독입니다.

빌 섕클리나 맷 버스비에 비해 별로 유명하진 않지만, 당시에 전술적으로 상당한 혁신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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