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8화 (18/400)

Round 18. 맨체스터의 한국인

“실례합니다. 여기까지 하죠.”

기자들에게, 그리고 섕클리 감독에게 따로 양해를 구한 준영은 태극기를 든 관중에게 향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금방 다가갈 순 없었다.

도중에 허더스필드 원정 팬들이 몰려들었기 때문.

“리, 사인 좀 해 줘요!”

“야, 새치기하지 마!”

어른들은 몰라도 어린이들은 무시할 수 없었다.

고사리 손의 아이들이 내미는 수첩에 일일이 사인을 하며 조금씩 전진해 간 준영은 마침내 태극기를 든 관중과 만날 수 있었다.

어린 자식을 데리고 있는 40대 초반의 동양인 사내였다.

“한국 사람입니까?”

“그렇소. 이억관이라 하외다.”

억양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히 한국어.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활짝 웃음을 지었다.

낯선 땅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는 건 정말 반가운 일이었으니까.

“오랜만에 한국말을 듣네요.”

“나도 마찬가지요. 거의 10년 만이군.”

“헉, 그렇게 오래…….”

준영은 깜짝 놀랐다.

타임 슬립 후 이 시대에서 한 달가량 지낸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오랜 시간을 보냈으므로.

‘자세히 보니 태극기도 꽤 오래 되었군.’

해진 곳은 없었지만,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감개무량이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던 준영에게 억관이 말을 건넸다.

“조선 사람이 여기 영국에서 축구 선수를 한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소.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지.”

‘Korean Footballer’라는 단어만 보고 당최 믿어지지 않아 관련 기사가 있는 신문들은 죄다 찾아봤다고.

그리고 태극기가 그려진 요크셔 이브닝 포스트의 기사를 보고 진짜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태극기까지 들고 응원을 오신 거군요.”

“응원도 하고, 전영리 군을 한번 만나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전영리가 아니라 이준영입니다.”

“하하, 그랬군. 아무튼 바쁘지 않으면 우리 집에 모시고 싶은데 어떻소? 대한의 기상을 알린 대장부에게 저녁 한 상 대접해 주고 싶은데.”

“어이쿠, 가야죠! 바빠도 가야죠!”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식을 먹을 수 있는 건가!

흥분한 준영은 냉큼 섕클리 감독에게 달려가 허락을 요청했다.

“그래, 알았어.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데 말릴 수 없지.”

흔쾌히 허락을 받아 낸 준영은 이억관 부자를 따라 맨체스터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

이억관의 집이 있는 곳은 맨체스터 차이나타운 동쪽 외곽.

그는 아내와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집은 그 식당 뒤에 붙어 있었다.

“별로 차린 건 없지만 입에 맞았으면 좋겠군.”

“하하,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죠.”

볶음밥에 만두, 차슈, 깍두기와 된장찌개 등등.

중식과 한식이 두루두루 섞인 저녁상은 이억관의 가족과도 관련이 있었다.

“부인은 중국분이신가요?”

억관이 따라 주는 술을 받은 준영은 그의 아들이 모친과 이야기하는 걸 보고 물었다.

“화교지. 홍콩에서 살다 영국으로 와서 첫해에 필립 저놈이 태어났고.”

‘그래서 애는 한국말을 잘 못하는 건가.’

같은 한국인을 보려고 찾아온 부친과 달리, 이필립은 축구 그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축구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법적으론 조선 사람이 아니오. 다들 날 중국인으로 알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이웃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한국이란 나라를 알지 못했다.

거기다 차이나타운 사람들도 화교와 결혼하고 중국어에도 능통한 억관을 사실상 중국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공사관에 연락하니까 영국 영주권을 가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나라가 힘이 없으니…….”

우울한 표정을 지은 억관이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날이 오면… 해방이 되면 꿈이 이뤄질 거라 생각했지. 억압받지 않고, 남의 전쟁에 끌려 나오지도 않고.”

“…….”

“모두가 웃으며 잘 사는 세상이 올 거라 생각했소. 그런 세상을 꿈꾸며 이역만리에서 쓰러진 동지들이 지금의 조선 땅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

나라는 남북으로 쪼개졌다.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우던 이들도 이데올로기로 갈라져 서로를 비난하고 총구를 겨눴다.

억관은 그런 비참한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 발로 고향을 떠났고, 멀리 영국까지 오게 되었다.

“모든 걸 잊고 싶었소. 하지만 끝내 버릴 수 없었지. 장롱 속에 묻어 둔 태극기처럼…….”

가만히 억관의 말을 듣고 있던 준영이 그를 위로하고 나섰다.

“좋은 세상이 올 겁니다. 한국도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거고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예전에 억관은 한국 전쟁에 종군한 영국 기자가 쓴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분통이 터져 잘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한국이 발전하는 건 쓰레기통에서 꽃이 피는 것과 같다는 조롱이었다.

더욱 분한 건 그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란 사실이다.

“반드시 옵니다.”

“반쪽으로 쪼개져 잿더미가 된 나라가 말인가?”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도 새싹은 돋아나니까요.”

준영의 두 눈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미래에서 왔기에,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떤 역경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고 발전해 가는지 알고 있다.

그 눈빛을 본 억관은 놀란 표정을 짓다 이내 우울한 기색을 지워 냈다.

“젊은 친구가 의지가 대단하군. 하긴 그러니 콧대 높은 영국인들과 나란히 공을 찰 수 있는 거겠지.”

“과찬이십니다. 겨우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는 것뿐인데요.”

과연 겨우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한국인, 아니 동양인을 통틀어도 축구 종가에서 선수로 뛰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 이 군,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드시오.”

“예,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고 앞으로도 열심히 뛰어 주시오.”

잿더미 속에서도 새싹은 자라난다.

바로 눈앞에도 그 싹이 있다.

준영을 바라보는 이억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

밤이 깊어 가고 있었지만, 올드 트래퍼드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구단 사무소를 지키고 있던 헤롤드 하드먼 회장은 맷 버스비 감독과 대면하고 있었다.

“오늘 머피에게 대행을 맡겼다고 들었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그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입니다.”

지미 머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 코치일 뿐만 아니라 리저브 팀 감독, 전임 스카우터도 맡고 있었다.

거기다 웨일즈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겸임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래서 버스비는 팀의 전술도 그에게 거의 전담시켰고, 오늘 에버튼과의 경기도 맡겼다.

“3대 0으로 완승을 했는데, 뭔가 문제 될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그냥 자네가 그 시간에 어디서 농땡이를 부렸는지 궁금할 뿐이지.”

회장의 말에 버스비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필드에 갔었습니다. 리버풀과 허더스필드의 경기를 봤죠.”

“허더스필드라면 지난번에 조가 이야기했던 중국인이 뛰고 있는 팀이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입니다.”

“Korea?”

“몇 년 전에 전쟁이 났다는 나라 있잖아요. 지난 스위스 월드컵 때도 출전한 나라더군요.”

버스비는 자신이 직접 보았던 존 Y. 리의 활약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다.

철벽같은 수비력, 매직 마자르에 못지않은 현란한 개인기, 강인한 체력과 집중력 등등.

하지만 버스비가 감탄한 건 따로 있었다.

“정말 지능이 뛰어난 선수였어요. 상대 패스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위치 이동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오프사이드를 만들어 내더군요.”

“발재간이 좋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다? 마치 우리 팀의 던컨과 비슷한 모양이군그래.”

“던컨도 그 정도로 약아빠진 플레이는 하지 못해요.”

버스비는 물론, 국내외 지도자와 선수들이 천재로 인정하는 유나이티드의 스타플레이어 던컨 에드워즈.

갑툭튀한 한국인 선수의 실력이 그 던컨 이상이라니!

“너무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아뇨. 뭔가 다른 선수들과 격이 달랐어요. 뭐랄까… 아마 30년 전에 허버트 채프먼이 지금의 던컨을 봤다면 저랑 같은 충격을 느꼈을 테죠.”

“간단히 말해서 마치 미래에서 온 것 같은 녀석이란 건가?”

피식 웃음을 지은 하드먼 회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양인답지 않은 체격과 실력에 놀라서 과장되어 보인 거겠지.”

“아뇨. 회장님도 보셨어야 했습니다.”

선제골을 넣었을 때 보였던 현란한 개인기, 그리고 상대 공격을 허사로 만들어 버리는 의도적인 오프사이드.

그건 단지 실력과 지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다.

“실전에서 그런 플레이를 성공하자면 충분히 연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테크닉과 전술에 대한 연구를…….”

“알았네, 알았어. 자네가 그 정도로 말하니 그 녀석의 실력은 인정하지. 결론은 녀석을 영입하고 싶다는 거 아닌가?”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늦은 밤에 구단 사무소로 찾아온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하드먼과 선수 영입을 상의하기 위해서.

3월 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다지만, 다른 팀에서 먼저 낚아채 가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하지만 동양인 선수는 전례가 없는데…….”

“아뇨. 이미 프랭크 수라는 동양계 선수가 리그에서 뛴 적이 있습니다.”

프랭크 수, 본명은 홍잉수.

중국인 아버지를 둔 이 선수는 과거 스탠리 매튜스와 함께 스토크 시티에서 여섯 시즌을 뛰었다. 그것도 1부 리그에서.

“그건 우리 팀의 선례는 아니지 않나.”

“그럼 이번에 선례로 삼으면 되겠지요.”

만약 존 Y. 리가 프랭크 수와 비슷한 실력이었다면 버스비도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 기량의 선수는 유나이티드에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존 Y. 리는 달랐다.

미래에서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거기다 나이도 아직 젊다.

그런 선수를 놓치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드먼 회장은 여전히 탐탁잖은 기색이었다.

“실력이야 어떻든 우리 팀의 격에 맞지 않는 선수라면 팬들이 동의하지 않을 게야.”

“격에 맞지 않다니요?”

“그 존이라는 친구, 경기가 끝나고 신사답지 않은 짓을 했다는 소문이 있더구만.”

“관중들 앞에서 웃통을 벗어 유니폼을 집어 던진 일 말이군요.”

버스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그 해프닝으로 존 Y. 리를 야만인이라는 둥, 천박하기 짝이 없다는 둥 까는 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보수 매체의 편견 어린 질타일 뿐, 진보 성향의 신문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 이 신문을 보세요. 1라운드 때 일인데, 경기 중에 상대 선수가 부상을 당하니 일부러 공을 밖으로 걷어 내고 의료반을 불렀어요.”

“흠…….”

“그가 신사답지 않았다면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신문을 본 하드먼의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 Y. 리의 영입에 완전히 찬성하는 건 아니었다.

***

본문에 언급된 프랭크 수는 중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선수였습니다. 스토크 시티에서 하프백으로 꽤 좋은 활약을 보여 줬다고 하네요.

2차 대전 중에는 잉글랜드 대표로 뽑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즈와의 경기에도 출전했는데, 현재까지도 아시아계 영국인이 잉글랜드 대표팀에 선발된 건 이 선수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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