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7. 절묘한 함정
후반전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리버풀이 주도권을 잡았다.
수비와 하프백까지 상당히 전진해서 공격 기회를 만들어 낸 것.
하지만 빨리 동점 골을 넣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일까.
오히려 전반보다 더 공격의 세밀함이 떨어져 있었다.
침착하게 마크를 하는 준영과 허더스필드 수비수들을 급하게 따돌리고 날린 슈팅들은 어이없이 골대를 빗나가 버렸다.
“이런 머저리 X끼들!”
“눈깔이 삔 거야? 발목이 뒤틀린 거야?”
“똑바로 하라고! 똑바로!”
이런 상황에서 열불 내는 콥스의 응원은 리버풀 선수들의 멘탈을 더욱 흔들어 댔다.
주장이자 최고참인 빌리 리들조차도 동요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빨리 골을 넣지 않으면…….’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보며 조바심을 느끼던 리들.
잇따른 공격 실패와 체력 고갈로 리버풀의 사기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노려 허더스필드는 슬금슬금 라인을 올리는 중이다.
‘이거 잘못하다간 우리가 밀리는… 응?’
연방 눈을 굴리던 그는 허더스필드 수비 뒤에 크게 빈 공간이 생긴 것을 보았다.
놈들이 성급하게 라인을 올리면서 생긴 공간이었다.
‘이건 찬스다!’
눈치챈 건 리들만이 아니었다.
반대편에서 공을 갖고 있던 알란 아코트가 냉큼 빈 공간으로 패스를 넣었고, 리들은 그대로 달려 들어갔다.
“좋았어!”
제대로 수비의 허를 찔렀다!
순식간에 공을 몰고 허더스필드 골대로 달려간 리들은 슛을 날렸다.
골키퍼 샌디가 몸을 날릴 틈도 없이 공은 골 그물을 흔들었다.
울분이 넘쳐 나던 콥스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들어갔다! 동점 골이야!”
“역시 빌리가 한 방 해 주는구나!”
“어, 그런데…….”
쾌재를 부르던 콥스의 눈에 깃발을 든 선심의 모습이 보였다.
심판 역시 방금 골을 득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프사이드였나?”
“와, 깜짝 놀랐네.”
왜 수비수와 골키퍼가 그냥 멍청하게 서 있나 했더니만.
어이없이 골을 먹었다고 얼이 빠져 있던 허더스필드 원정 팬들은 안도와 함께 실소를 터트렸다.
물론 리버풀 측의 반응은 정반대.
콥스가 거센 야유를 쏟아 대는 가운데, 선수들은 물론 감독까지 심판에게 몰려가 항의를 해 댔다.
“이게 오프사이드라고요?”
“패스가 들어오는 순간에 리들이 수비보다 앞서 있었어.”
“그럴 리가! 저 꺽다리 원숭이는 남아 있었다고!”
“패스가 들어오기 직전까진 그랬지.”
즉, 준영이 간발의 차이로 전진해서 오프사이드 라인을 만들어 버렸다는 것.
하지만 리버풀 측은 이를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그럴 리 없어! 당신이 잘못 본 거야! 심판이면 눈깔을 똑바로 뜨고 다니라고!”
“뭐라고? 퇴장당하고 싶나?”
심판이 오히려 서슬 퍼렇게 나오자, 리버풀 측은 분통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준영은 불난 집의 풍경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역시 대쪽 같은 사람이군.’
방금 전의 오프사이드 트랩.
섕클리 감독도 양날의 칼이라고 보고 사용을 자제하라고 했던 수비 전술이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심판의 성향 때문.
준영은 전반부터 심판의 판정 성향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가 철저히 중립적이고 깐깐한 판정을 내리는 걸 확인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홈 어드밴티지를 적용해 줬거나 널널하게 판정했다면 함정 전술은 시도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두고 보쇼. 이번 판정은 반드시 이의 신청을 할 거요!”
“그러든가.”
살기등등한 콥스를 등에 업은 리버풀 감독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심판은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삐익-
허더스필드의 골킥으로 경기는 재개되었다.
“우우- 우키키 우키키-”
콥스의 원성 어린 야유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양 팀은 치열하게 공방을 펼쳤다.
공중에서 몸이 부딪치고, 지면 위로 태클이 오갔다.
거칠게 몸으로 밀고, 발로 걸면서 공을 뺏고 빼앗기기를 수차례.
리버풀이 다시 한 번 좋은 찬스를 잡았다.
알란이 수비 뒷공간을 노리고 뛰어 들어가는 것에 맞춰 침투 패스가 들어온 것.
하지만 그 패스보다 준영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까는 게 한 박자 더 빨랐다.
이번에는 다들 눈을 부릅뜬 상태였기에 준영의 절묘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하, 저런 식이었군!”
“교활한 원숭이 자식!”
“흥, 당한 놈이 바보지!”
“누가 당했다는 거야? 이번 건 몰라도 아까 그건 오심이었어!”
“맞아. 틀림없이 골이었다고!”
콥스와 원정 팬들의 경계 지대에서는 말다툼이 시끄럽게 벌어졌다.
한쪽에선 드잡이가 심하게 벌어지다 보니, 경찰이나 경기장 관리 용역들이 황급히 달려가기도 했다.
‘개판이네, 완전.’
“우- 우- 우-”
야유는 아까보다 더욱 심해졌다.
거기엔 준영을 향한 야유 말고도 자기 팀 선수들에 대한 비난과 욕설도 뒤섞여 있었다.
안 그래도 두 번째 기회를 날려 버린 리버풀 선수들의 얼굴은 단풍처럼 울긋불긋해졌다.
기회다 싶어 치고 들어간 알란의 얼굴이 가장 붉었다.
“젠장, 약은 수를 쓰다니!”
“언제까지 속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수모는 기필코 갚아 주리라!
이를 악물고 뛴 리버풀 선수들은 얼마 후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동료가 패스한 공을 잡은 공격수 토니 롤리는 패스하는 척하다가 살짝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준영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피해 침투하는 알란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좋아, 이번엔 확실히 온사이드다!”
한 번 속고, 두 번째도 당했지만, 세 번이나 삽질을 하랴!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뿐.
알란이 공을 잡기 직전, 페널티 에어리어 밖으로 달려 나온 골키퍼 샌디가 멀리 공을 걷어 내 버렸다.
“크악! 또 실패야!”
“아니, 골키퍼가 왜 기어 나와!”
“원숭이랑 공 차더니 진짜 별짓을 다 하는구만!”
세 번째 낭패에 콥스는 펄펄 뛰었다.
또다시 찬스를 놓친 리버풀 선수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잘했어, 샌디.”
“하핫, 심장이 쫄깃했다고.”
준영은 후반전 시작하기 전에 샌디에게 일러두었다.
만약 오프사이드 트랩이 뚫릴 것 같으면 과감하게 나와서 길게 걷어 내라고.
어차피 일대일 상황에선 실점할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 공을 처리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딱히 스위퍼 훈련은 받지 않았지만, 샌디는 정확하게 판단했고 덕분에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조마조마하니까 이런 짓은 적당히 해. 아니면 골을 하나 더 박아 주든가.”
“기회가 있다면.”
준영은 슬쩍 원정석을 바라보았다.
외롭게 나부끼고 있는 태극기.
반가운 한편으로 뿌듯함이 느껴졌다.
“누군지 몰라도 도핑은 제대로 해 주는걸.”
슬슬 피로가 쌓일 시간대인데도 오히려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송골송골 땀이 맺힌 머리를 쓸어 올린 준영은 다시 힘차게 뛰어갔다.
***
스코어보드의 시계가 멈췄다.
하지만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후반전에 벌어진 소란 탓에 심판이 추가 시간을 적용한 것이다.
‘한 3∼4분 정도 주려나?’
준영이 대강 짐작한 시간은 그 정도였다.
하지만 진짜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21세기와 달리, 대기심이 정확히 알려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야말로 주심 마음대로인 것.
‘중요한 건 휘슬이 울릴 때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점수는 1 대 0.
준영의 원더골 이후 양 팀 다 골을 넣지 못했다.
허더스필드는 후반전에 몇 차례 좋은 역습 기회를 잡긴 했지만,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다.
리버풀 선수들은 몸이 지쳐 가는 상황에서 계속 낭패를 보면서, 마음까지 무거워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골을 노렸다.
90분 내내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낸 준영도 그 의지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독한 녀석들이군. 하긴 극성맞은 홈 관중들 앞에서 지고 싶지는…….’
준영의 마크를 받고 있던 빌리 리들이 슬쩍 공을 흘리고 갔다.
그러곤 배후에서 총알같이 달려든 알란 아코트가 벼락 슛을 날렸다.
까앙-!
회심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 나오자 콥스의 탄식이 길게 터져 나왔다.
황급히 뛰어오른 준영은 튕겨 나온 공을 헤딩으로 멀리 걷어 냈다.
‘헐, 다 된 밥이 무가 될 뻔했군.’
아찔했지만 위기는 곧 기회로 바뀌었다.
준영이 걷어 낸 공을 잡은 윌리엄 맥캐리가 리버풀 진영으로 달려가는 공격수 레스 마시의 발밑으로 제대로 넘겨주었던 것!
“저, 저거!”
“위험해! 얼른 가서 막아!”
콥스의 성화에 리버풀 선수들이 허둥지둥 수비에 나섰지만, 마음과 달리 지친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결국 경기 막판에 추가 골을 내주면서 리버풀은 완전히 무너졌다.
삐익, 삑-
경기가 종료되자 준영과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펄쩍펄쩍 뛰며 만세를 불렀다.
“이겼다! 2연승이야!”
“작년 12월의 완패를 갚아 줬구만!”
이들과 달리 리버풀 선수들은 고개를 떨궜고, 마지막까지 응원에 열을 올리던 콥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건 말도 안 돼! 리들의 골은 인정해 줬어야 했다고!”
“심판이 경기를 망쳤어!”
필드로 야유와 쓰레기가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폭동이 날 분위기.
하지만 이미 안필드에는 경찰 병력이 증원되어 있었다.
오프사이드 논란을 보고 소요 사태를 예감한 리그 관계자들이 부랴부랴 손을 쓴 것이다.
허더스필드 선수단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취재 나온 기자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왔다.
그들이 노린 표적은 바로 준영이었다.
***
“Mr.리, 인터뷰를 부탁합니다.”
“요크셔 포스트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 주시죠!”
준영이 구단 버스에 올라타기 직전, 기자들이 몰려들어 질문을 퍼부었다.
‘데뷔전 때보다 더 많이 왔군.’
보리밭의 참새들처럼 지저귀는 기자들을 진정시킨 준영은 차례로 질문을 받았다.
“리버풀 데일리 포스트의 제임스 토마스입니다. 오늘 매우 침착하던데, 콥스의 야유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까?”
“별로요.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안필드에는 사람 말고 동물들도 출입시키나 싶었죠.”
그 말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일부 기자들은 낯을 붉혔다.
경기 내내 이어졌던 콥스의 야유는 정말 도가 지나친 수준이었으니까.
“혹시 영국에 와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인종적인 문제로…….”
“아뇨. 그렇게 신경 쓸 만한 문제는 겪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웃분들이나 동료들이나 다들 친절해서요.”
“앞으로 겪게 될 수 있다면요?”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처럼 화장실 쓰는 거 갖고 차별하는 치사한 짓은 안 할 거라 믿습니다.”
뭔가 뼈가 있는 답변.
인종 분리를 빙자한 미국의 인종 차별 정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영국인들에게도 자성을 요청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는데, 상위 리그 팀들에서 오퍼를 받는다면 어쩌실 겁니까?”
“글쎄요. 정식으로 받아 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답하긴 힘들군요.”
이렇게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태극기를 든 관중이 나타났다.
마치 준영에게 봐 달라는 듯 그는 손에 든 태극기를 열심히 흔들어 댔다.
***
실제 1957년 8월 28일 리버풀과 허더스필드의 경기는 1-1로 비겼습니다.
저 경기에서 리버풀의 골을 넣은 선수는 알란 아코트인데, 이 선수는 원래 럭비 선수 출신이었고 기량이 상당히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에서 윙어로 유명했던 톰 피니의 대체자로 꼽혔다네요.
하지만 그 기량을 꽃피우기 전에 부상으로 실력이나 경력이 무너져 버린 불운한 선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