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6. 외롭지만 당당하게
“얼굴만 붉히지 말고 바지도 빨간 걸로 갈아입지 그래? 누가 보면 너희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인 줄 알겠다.”
이 시기 맨유는 빨간색 상의와 하얀 하의를 입었다.
그런데 이 유니폼 색깔은 리버풀도 같았다.
리버풀 하면 올 레드(All Red)로 알고 있는 준영에겐 낯선 차림이었던 것.
“혹시 ‘버스비의 짝퉁들’이라고 불리고 싶었던 거야?”
“푸흡!”
웃음을 참지 못한 허더스필드 선수들과 달리, 리버풀 선수들은 제대로 열 받았다.
가장 빡친 사람은 주장인 빌리 리들이었다.
“이 자식이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빨간 유니폼은 우리가 원조란 말이야!”
“예예, 알겠습니다. 리중딱 분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리버풀은 중위권이 딱이야.
그 줄임말인 리중딱을 빌리 리들이 알 리 없다.
하지만 동양인 녀석이 비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걸 봐서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닌 것 같았다.
“시건방진 애송이 자식, 필드에서 시체로 만들어 주마!”
“어이구, 어르신, 흥분하시면 혈관 터져요.”
잠시 후, 대기실에서 랩 배틀(?)을 벌이던 준영과 리들이 선수들과 함께 필드로 나왔다.
“우- 우-”
“우키키우끼끼끼~”
극성맞기로 유명한 리버풀의 서포터즈, 콥스(The Kops)가 준영에게 야유를 쏟아 냈다.
헤이젤 참사로 영국 축구에 제대로 먹칠하는 분들의 조상님답게 아주 열광적이었다.
“내가 말했지? 넌 오늘 시체가 될 거다.”
“눼, 눼. 여부가 있겠습니까.”
리들의 으름장이나 경기장 분위기에도 준영은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 여유만만한 표정은 빌리 리들이나 리버풀 선수들의 낯을 구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유니폼 색깔만큼이나 벌겋게 투지가 달아오른 리버풀.
그들은 경기 초반부터 파란색 줄무늬 저지를 입은 허더스필드 선수들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콥스는 왕성한 움직임과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는 자기 팀 선수들에게 박수와 함성을 아끼지 않았다.
“알란이 공을 잡았다!”
“돌파해, 알란! 노란 원숭이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버려!”
관중들의 우레 같은 버프(?)에 흥이 오른 리버풀의 공격수 알란 아코트는 마크를 붙은 수비수를 제쳐 내고 골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드리블이 살짝 긴 틈을 타서 준영이 잽싸게 밖으로 공을 걷어 냈다.
“잘했어, 존!”
“코너킥도 부탁해!”
코너킥 상황에서 리버풀에서는 장신 선수 둘이 준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수비수인 돈 캠벨, 그리고 주장인 빌리 리들.
앞서 준영과도 언쟁을 벌였던 리들은 35살의 노장이지만, 체격은 리버풀 선수 중에 가장 좋았다.
키는 185센티미터 정도? 거기다 강인한 인상만큼이나 몸도 상당히 다부졌다.
무엇보다 경기 전부터 약이 바싹 올라서인지 투지도 넘쳤다.
‘쉽지 않겠구만.’
“왜 그래, 애송이? 이제 와서 겁나나?”
준영은 리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공과 배후에서 기회를 엿보는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코너킥이 날아들었다.
아예 제대로 싸움을 붙일 속셈인지, 준영과 리들이 있는 곳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어디 막아 봐라, 애송이!”
“퇴물 주제에!”
두 사람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떨어지는 공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두 사람은 사이좋게(?) 공중에서 충돌했다.
빠- 악!
돌 부딪치는 소음과 함께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착지한 후 리들은 비틀거렸고, 준영도 몸이 휘청였다.
‘젠장, 완전 돌대가리 아저씨잖아!’
준영은 어질어질한 시선으로 공을 찾았다.
아까 머리 위에 튀었던 공은 약간 뒤쪽에 물러나 있던 리버풀 공격수에게 떨어졌다.
“갈겨라, 토니!”
“선제골은 네 거야!”
토니 롤리.
웨일즈 출신의 이 리버풀 공격수는 앞서 브리스톨 시티와의 경기에서도 두 골을 넣으며 승리를 결정지었다.
관중들은 이번에도 그가 골을 넣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준영이 번개같이 몸을 던지기 전까지는.
“이런, 제길!”
“휴, 큰일 날 뻔했네…….”
분통을 터트리는 콥스와 달리, 허더스필드 원정 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준영의 등에 맞고 굴절된 공을 잡아챈 골키퍼 샌디 케논은 재빨리 역습에 나선 데니스 로를 향해 공을 차 보냈다.
하지만 성급한 나머지 힘이 실렸던 걸까.
샌디의 롱 패스는 데니를 넘어 터치라인 밖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게 아니지, 바보야!”
“저런 패스는 꺽다리 친구가 잘하는데…….”
원정 팬들이 아쉬움을 삭이는 사이, 어지럼증에서 벗어난 준영은 다시 수비에 열중했다.
“켄, 너무 밖으로 나가지 마! 론은 앞쪽에서 견제 좀 확실히 해 주고!”
주변 동료들의 위치를 잡아 주면서 눈을 부지런히 돌려 공과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러다 빌리 리들에게 패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인터셉트에 나섰다.
‘끊었다!’
‘이런……!’
들어오는 공과 함께 움직이던 리들은 인터셉트를 당하자 바로 준영의 유니폼을 잡아챘다.
전력 분석관에게서 동양인 녀석의 롱 패스가 굉장히 정확하니 주의해야 한단 말을 들었기 때문.
물론 그건 반칙이었다.
바로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원숭이 편을 들다니!”
“야 인마, 여긴 안필드라고!”
콥스의 원성에 불구하고, 심판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감사받을 일을 한 적은 없어.”
손을 내젓는 심판의 모습에 웃음을 지은 준영은 바로 킥을 처리하며 경기를 계속했다.
***
경기 초반 리버풀의 맹공을 잘 막아 낸 허더스필드는 전방에 있는 데니스 로, 레스 마시 두 공격수를 이용해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골대를 넘어가거나 상대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면서 아쉬움을 삭였다.
그래도 허더스필드의 공격 빈도가 높아지자, 섕클리와 코치들의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리버풀은 체력이 떨어지는 모양이네요. 기동력뿐만 아니라 몸싸움도 떨어지는 것 같아요.”
“저쪽은 브리스톨 원정의 피로가 남아 있을 테니까.”
영국 남서부에 있는 브리스톨은 리버풀에서 250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자동차나 열차를 타도 4∼5시간은 넘게 걸리는데, 당연히 여독이 있기 마련.
“더구나 1라운드 출전 선수 대부분이 오늘 그대로 나왔지.”
사실 주전에 변화가 없는 건 허더스필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허더스필드와 리버풀의 거리는 멀지 않다.
거기다 준영이 피로 해소에 좋은 음식과 훈련을 알려 주면서 체력을 많이 회복해 놓은 상태였다.
“신기하다니까요. 그 녀석, 우리도 잘 모르는 걸 어떻게 그리 잘 아는지!”
“글쎄, 존이 축구를 했던 곳에서는 상식인 건지도…….”
섕클리의 말이 뚝 끊겼다.
켄 테일러가 끊어 낸 공을 레이 윌슨이 받아 측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
순식간에 공세로 나선 허더스필드 선수들은 리버풀 진영을 향해 전진해 갔다.
준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리버풀 진영으로 달려간 그는 최전방 공격수들 바로 뒤쪽까지 올라왔다.
“까불고 있군!”
“던컨 에드워즈(* 195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이스)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냐!”
준영에게 패스가 전달되자, 리버풀의 레프트백 로니 머랜이 덤벼들었다.
공보다 발목을 노린 위협적인 태클.
하지만 그 도끼날 같은 태클을 준영은 귀신같이 흘려 버렸다!
“우와아아앗!”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방향을 완전히 전환해 버린 절묘한 개인기!
너 나 할 것 없이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20년 일찍 세상에 나온 마르세유 턴에 이어 강력한 중거리 슛이 리버풀의 골대를 흔들었다.
“맙소사, 저게 뭐야!”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저 황인종 놈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콥스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얼빠진 표정을 짓거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준영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뿐사뿐 뛰어갔다.
왜 아무 말이 없냐고 묻는 듯한 산책 세리머니.
알 수 없는 엄청난 굴욕감에 콥스는 욕이나 야유도 뱉어 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우와, 형님! 방금 그거! 뭐예요, 그거! 무슨 마법이야, 그거?”
“진정해. 다음에 가르쳐 줄게.”
흥분해서 쫓아온 데니스 로와 동료들을 떼어 놓은 준영은 원정석을 바라보았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콥스와 달리 허더스필드 팬들은 기가 막힌 선제골에 미쳐 날뛰고 있었다.
“꺽다리 만세!”
“저 녀석, 진짜 마법사 아냐?”
열광하는 허더스필드 원정 팬들 사이에서 뭔가 하얀 게 삐죽 튀어나왔다.
‘아니, 저건……!’
모두를 경악시킨 마법사 준영.
이번에는 그가 놀랐다.
태극기.
너무나 낯익고 반가운 그 하얀 깃발은 거센 바람 속에서 외롭지만 당당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
전반 38분. 허더스필드는 준영의 기가 막힌 선제골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만회 골을 넣으려는 리버풀의 공격을 잘 마무리한 그들은 기분 좋게 전반전을 끝내고 라커룸으로 돌아왔다.
“잘했다! 이제 급한 건 리버풀 녀석들이니 흥분하지 말고 체력을 아끼면서…….”
선수들에게 후반전 지시 사항을 늘어놓던 섕클리 감독.
그의 눈에 멍하게 시선을 돌리고 있는 준영의 모습이 보였다.
“존! 이봐, 존영!”
“예!”
진짜 자신의 이름에 가까운 호칭에 준영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나? 벌써 지친 건가?”
“아뇨. 그냥 갑자기 생각할 일이 조금…….”
“시합 중엔 축구만 생각해!”
감독의 호통에 준영은 움찔했다.
섕클리는 축구를 인생의 일부로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
그런 그의 앞에서 헐렁한 모습을 보였으니 질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시합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래, 알면 됐어.”
태극기는 나중에 생각하자.
누가 들고 왔는지 몰라도, 시합이 끝난 다음에 만나도 늦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한 준영은 이어지는 섕클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했지만 우린 급할 게 없다. 그러니 좀 더 단단히 잠그면서 리버풀의 뒷공간을 노린다.”
킥 앤 러쉬(Kick and Rush).
섕클리는 단순하지만, 피지컬을 이용하는 축구를 선호했다.
선수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효과도 좋았으니까.
준영도 이런 ‘뻥축’을 무시하진 않았다.
선수들의 피지컬 능력이 뛰어나고, 마무리가 확실한 스트라이커가 있다면 이보다 좋은 전술은 없으니까.
21세기에서도 소위 티키타카라며 패스를 깨작대던 팀들이 뻥축에 나자빠진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존, 전반에서처럼 리버풀 녀석들을 약 올릴 수 있겠나?”
“얼마든지 가능하죠.”
사실 경기 시작 전의 말싸움은 섕클리가 지시한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포문을 열지 다들 망설이던 차에, 인종 차별 드립을 들은 준영이 옳거니 나섰던 것.
그리고 제대로 걸려든 리버풀 선수들은 냉정하게 공격을 만들지 못했다.
“하기에 따라 바보로 만들 수 있어요. 다만…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할지도?”
“혹시 ‘그걸’ 쓰려는 건가?”
“해 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탐색은 마쳤다.
잠시 고민하던 섕클리도 자신만만한 준영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해 봐.”
***
리버풀 서포터 콥스는 과격하기로 유명합니다.
이들이 저지른 헤이젤 참사 때문에 리버풀은 물론이고 잉글랜드 클럽들까지 유럽 축구계에서 퇴출되었을 정도. 이 바람에 당시 영국 축구 리그 순위가 유럽에서 2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죠.
저렇다 보니 영국 경찰도 80년대에는 콥스를 반쯤은 폭력 조직으로 취급할 정도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