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3. 첫 번째 승리
‘그나저나 데니는 괜찮나?’
준영은 데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미래에 레전드가 될 녀석이 자칫 이 부상으로 잘못되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던 것.
다행히 데니는 크게 부상을 입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괜찮냐?”
“응, 형님이 빌려 준 것 덕분에 살았어.”
데니는 삭스 속에 든 정강이 보호대를 두들겼다.
정강이 보호대는 이미 1874년에 발명되었지만, 둔하고 볼품이 없다며 착용하지 않는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준영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21세기의 가볍고 튼튼한 소재로 된 것이라 착용감이 한결 좋았다.
아무튼 덕분에 데니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프리킥 상황이군.”
“골대까지 거리가 한 30야드(27.4미터)쯤 되나?”
다들 준영을 바라보았다.
훈련이나 연습을 할 때 그가 프리킥 골을 곧잘 넣었던 게 생각났던 것.
“존, 네가 차라.”
“이번 경기 프리킥은 주장이 전담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 거리에서는 네가 더 나아.”
현재 허더스필드의 주장을 맡고 있는 윌리엄 맥캐리가 프리킥을 양보했다.
준영은 벤치 쪽에 있는 섕클리 감독을 바라보았다.
섕클리도 차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아, 그럼…….’
공이 놓인 곳에서 살짝 물러난 준영은 양발을 굴러 가며 거리와 바람의 세기를 가늠했다.
그러곤 벽을 선 찰턴 선수들과 그 뒤의 골키퍼 위치를 힐끗 살펴봤다가 그대로 달려들며 슛을 날렸다.
뻐- 엉.
폭음과 같은 소음과 함께 선명한 궤적을 그으며 날아간 공은 골대 좌측 그물을 세차게 흔들었다.
슛이 어찌나 빨랐는지, 벽을 선 선수들이나 골키퍼가 미처 움직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Bravo!”
“이야! 진짜 끝내주는 녀석이네!”
통쾌하기 짝이 없는 세 번째 골에 관중들이 펄쩍펄쩍 뛰었다.
어찌나 함성이 우레 같은지, 경기장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저 친구, 이름이 뭐라고?”
“존 Y. 리라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해?”
존 Y. 리.
경기장에 모인 17,000여 명 관중들의 뇌리에 그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취재를 나온 기자들도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며 준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점수가 3 대 0이 되자, 찰턴의 사기는 눈에 띌 정도로 급감했다.
분통을 터트리던 찰턴의 원정 팬들도 준영의 세 번째 골을 보고 그만 할 말을 잊어버렸는지 시무룩하게 지켜만 볼 뿐.
‘정규 시간이 15분 정도 남았나?’
스코어보드에 걸린 시계를 힐끔 바라봤던 준영은 찰턴 선수들의 움직임을 꼼꼼하게 살폈다.
3 대 0 정도면 따라가기 힘들긴 하지만, 흐름을 잘 타면 몇 분 사이에 동점, 심지어 역전까지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찰턴에겐 흐름을 바꿀 만한 힘이 보이지 않았다.
‘선수 교체를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교체 그런 거 없다.
교체할 만한 선수가 없는 게 아니라, 이 시대에는 정규 경기에는 교체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다.
‘축구는 남자의 스포츠잖아. 11명이 시작했으면, 그 11명이 마무리를 지어야지.’
이런 와일드한 상남자식 사고방식이 1950년대 축구판의 상식.
처음 그걸 알게 된 준영은 진짜 기가 막혔다.
하지만 이 시대에서 축구를 하자면 그에 맞춰 가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체력이나 많으면 모르겠지만, 골초들이 만연한 시대에 무리지.’
니코틴에 찌든 건 허더스필드 선수들뿐만 아니라, 찰턴 쪽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기운이 남아 있는 선수가 있긴 했지만, 주변의 동료가 뒷받침해 주지 못하니 좋은 플레이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수비수면 득점보다 클린시트가 더 값진 결과다.
이에 준영은 악착같이 찰턴의 공격을 막았다.
“젠장, 체면치레하게 한 골만 봐줘!”
“응, 안 돼.”
준영은 돌파해 오는 조니 서머즈를 밀쳐 내곤 공을 가로챘다.
한 골이라도 따낼 마음에 조니는 바로 공을 되찾아 오려 했다.
‘이 자식, 위험하잖아!’
높게 치켜든 조니의 발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준영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주장 윌리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존, 조심해!”
준영의 시야 사각에서 빌리 키어넌이 무섭게 달려왔다.
독기가 오른 그의 발끝은 공이 아닌 준영의 발목을 노리고 있었다.
‘죽어 봐라!’
경기 내내 허탕만 쳤다.
그것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애송이 동양인에게 완전히 막혔다.
실망과 수치심에 살짝 정신줄을 놓은 키어넌은 백태클을 날렸다.
낫질같이 섬뜩한 살인 태클은 준영의 발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런 미친……!’
“쳇!”
주장의 외침이 아니었다면 반사적으로 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준영은 일어서서 재차 달려드는 키어넌을 제쳐 냈다.
플립플랩.
발 바깥쪽으로 공을 모는 척하다 안쪽으로 슬쩍 낚아채서 제쳐 버리는 절묘한 개인기였다.
“우아아앗!”
관중석에서 감탄과 우려의 탄성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준영의 개인기도 멋졌지만, 황급히 몸을 틀어 쫓아가려던 키어넌이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왜 저러지? 다쳤나?”
“무릎을 쥐고 있어.”
“흥,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엄살은…….”
키어넌이 비명을 토하며 뒹구는 모습을 본 준영은 일부러 공을 터치라인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황급히 들것을 들여오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왜 그래? 심하게 다친 건가?”
“인대가 작살났을 겁니다.”
방향을 급하게 틀다 제풀에 다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준영이 알기로 그런 부상은 상대에게 가격당했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아마 시즌 아웃일지도.”
“그 정도라고?”
윌리엄이나 동료 선수들은 준영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울부짖는 키어넌을 보자니 거짓말 같지 않았다.
진짜 충격을 받은 건 찰턴 쪽이었다.
리그 첫 경기에 주전 공격수가 심각한 부상으로 이탈했으니까.
거기다 다음 경기보다 당장은 이 경기의 남은 시간을 걱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도 선수 교체가 안 되다니…….’
부상 선수가 나와도 남은 10명이 상대 팀 11명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게 이 시대 축구의 룰.
냉혹한 이 시대의 축구에 준영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
삐익-
심판의 종료 휘슬이 울리자, 홈팬들이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터트렸다.
3 대 0 완승으로 끝낸 올 시즌 첫 경기.
많은 이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승리를 일궈 낸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가장 많은 갈채를 받은 사람은 이 경기 M.O.M급 활약을 한 준영이었다.
“잘했다, 신참!”
“다음 주 리버풀전도 부탁해!”
준영은 경기 시작 전과 사뭇 다른 반응을 보여 주는 홈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관중석으로 뛰어 들어가 악수를 나눴다.
“존, 여기! 나 여기 있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니 카린이 보였다.
카린뿐만 아니라 알버트와 리즈, 앤지도 있었다.
다들 함께 구경 와서 응원해 준 모양.
반가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던 준영은 입고 있던 저지를 벗어 던져 주었다.
“꺄아악-!”
준영이 웃통을 까자 리즈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관중석 여기저기서 여성들이 비명을 토했다.
21세기에선 흔한 관중 서비스가 여기선 드물었던 걸까.
하지만 결코 싫어하는 반응들은 아니었다.
“무슨 망측한 짓을…….”
“존의 고향에선 저러는 모양이지.”
너털웃음을 짓는 알버트와 달리, 벌겋게 낯을 붉힌 리즈는 준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던져 준 유니폼 상의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
1957년 8월 26일 월요일.
점심 무렵, 리즈 로드에 숯불구이 냄새가 진동했다.
향긋한 숯불과 기름 냄새에 동네 개와 고양이들은 물론, 지나가던 사람들도 멈춰 서서 군침을 삼킬 정도.
바로 코앞에서 표적을 씹고 뜯고 맛보고 있는 허더스필드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의 반응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맛있는데?”
“미치도록 근사하군!”
“존의 말대로 고기는 진리야!”
다들 그릴에 놓인 고기를 연방 집어 먹기 바빴다.
오늘 회식은 출전 보너스를 받은 준영이 한턱내면서 이루어졌다.
고기와 양념, 부식은 직접 준비했고, 화로로 쓰는 드럼통이나 그릴은 철물점을 하는 팀 동료의 부친에게 지원받았다.
“형님, 요리도 할 줄 알아?”
샐러드를 빙자한 겉절이를 만들던 준영은 데니의 말에 씩 웃음을 지었다.
“외국에서 혼자 생활하다 보면 고향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거든.”
21세기 때는 모나코의 한식당을 종종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준영은 그곳 음식이 썩 맘에 들진 않았다. 현지인들 입맛에 맞춰 어레인지되었기 때문.
그래서 현지의 한인 마트에서 간장이나 고추장 등을 사서 직접 만들어 먹곤 했다.
처음에는 괴식을 만드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하다 보니 솜씨가 늘었다.
‘물론 이것도 제대로 된 한식은 아니지만.’
21세기에서 가져온 간장과 고추장 등은 정말 아껴 먹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 겉절이에 쓰는 건 맨체스터의 차이나타운에서 입수한 굴 소스였다.
여기에 저택의 인도인 요리사에게 얻은 고춧가루나 후추, 생강 등이 있어 그럭저럭 맛을 낼 수 있었다.
다행히 다들 너무 낯설어하지 않았다.
중국이나 인도 요리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고, 준영이 너무 자극적으로 맞추지 않았으니까.
“많이들 먹어요. 그래야 수요일 리버풀 원정도 잘 뛰지.”
“Yes, Sir!”
얻어먹을 때는 물주가 최고.
다들 충성스러운 근위병인 양 준영에게 경례를 보냈다.
“고기와 구우니 마늘도 하나도 안 매운걸.”
“냄새가 심해서 그렇지 건강엔 좋아요.”
마늘은 젖산을 감소시켜 주기 때문에 피로 회복에 좋다.
여기에 준영은 또 다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스태미나를 높이는 데도 효과가 있죠. 그래서 난 식초에 절인 마늘을 체력 보조 식품으로 만들어 먹고 있어요.”
그 말에 솔깃한 섕클리 감독이 물었다.
“혹시 남자 정력에도 좋은가?”
“물론이죠. 혈액 순환을 원활히 하고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니까.”
그 말에 다들 샤워장에서 봤던 준영의 그것을 떠올렸다.
큰 체격만큼이나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던 녀석의 분신.
다들 홀대받고 있던 마늘을 포크로 찔러 대기 시작했다.
“비켜. 이 마늘은 다 내 거야!”
“캑! 이건 안 익었잖아!”
아까부터 편식 안 하고 잘 먹던 데니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맛은 있는데 먹고 나면 입에 냄새가 남을 것 같아. 다이애나가 질색할 텐데…….”
“너 여친 있었냐?”
“응, 형님. 고향에 있을 때부터 사귀었어.”
피식 웃은 준영은 간단한 해결책을 알려 주었다.
“저기 있는 우유와 레몬주스를 마시면 돼. 둘 다 냄새 제거에 탁월하지.”
그뿐만 아니라 피로 회복에도 좋으니 일석이조다.
“아 참, 궁금한 게 있어, 존.”
레몬주스로 입안을 헹군 섕클리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혹시 다른 팀 스카우터나 감독에게 연락 오지 않았나?”
“오기를 바라셨어요?”
“당연히 그런 건 아니지만……. 좀 걱정되는 게 사실이니 말이야.”
섕클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부터 이런 걱정이 들 정도로 준영이 뛰어난 활약을 보일 줄은 몰랐다.
***
1966년 월드컵은 거친 경기가 많아 펠레 등 적잖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경기 중에 이탈했습니다.
그래서 1970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5명의 후보 선수 중 2명을 교체할 수 있게 규정이 바뀌었죠. 1994년에 와서 3명까지 늘어났고, 2010년대 말에 와서 연장전에서 한 명 더 교체하는 걸로 또 바뀌었지요.
최근에는 5명까지 교체할 수 있게 한다고 하는데, 옛날보다 선수들이 많이 뛰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더 늘려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