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2화 (12/400)

Round 12. 그런 거 없다

삐익-

심판의 휘슬과 함께 시합이 시작되었다.

찰턴은 초반부터 강한 공세를 펼쳤다.

주포인 조니 서머즈를 비롯해 고참 공격수인 스튜어트 리어리, 빌리 키어넌이 세 방향에서 차례로 허더스필드를 두들겨 댔다.

그렇게 영점을 잡고, 허더스필드의 빈틈을 노리고 있을 때.

수비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던 준영이 과감하게 달려 나오며 키어넌의 발밑에서 공을 가로챘다.

“오오오-”

너무나 간단한 인터셉트.

감탄하는 관중들과 달리 빌리 키어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30대의 노련한 공격수였던 만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애송이의 일격이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큭! 이 자식이!”

그는 곧바로 공을 되찾아 오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도리어 준영의 페인팅에 속아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일거나 말거나, 준영은 최전방에 있는 데니 쪽을 바라보았다.

‘준비해, 데니!’

‘그걸 하려는 건가?’

섕클리 감독과 코치들도 절묘하다고 감탄했던 공격 전술.

준영의 눈빛을 읽은 데니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상대 수비들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를 쫓던 찰턴 수비수들이 한순간 일자로 늘어섰다.

‘빙고!’

때맞춰 준영이 길게 쓰루 패스를 찔러 주자, 데니는 수비 뒤의 빈 공간으로 과감하게 질주해 들어갔다.

“오프사이드?”

“아냐. 선심이 깃발을 들지 않았어!”

삽시간에 무인지경.

찰턴 골키퍼가 황급히 각을 좁히고 나왔지만, 데니는 침착하게 제쳐 버리고 빈 골대에 가볍게 공을 밀어 넣었다.

“Goooo- oal!”

역습이 시작될 때 눈을 둥그렇게 뜨고 지켜보던 관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이야, 정말 멋진 역습이었어!”

“저런 정확한 패스에 깔끔한 슈팅이라니!”

관중들의 시선이 방금 어시스트를 찔러 준 준영에게 쏠렸다.

“저 녀석, 이름이 뭐였지?”

“존, 존 Y. 리!”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마땅찮아했던 이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응이야 어떻든 준영은 촐싹대는 데니와 세리머니를 펼쳤다.

“형님, 가르쳐 준 게 제대로 통했어!”

“흥분하지 마. 아직 경기 끝난 거 아냐.”

이제 겨우 10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준영은 냉정을 유지하며 다음 상황에 대비했다.

***

선제골이 터진 허더스필드와 달리, 찰턴의 분위기는 곤두박질쳤다.

경기를 주도하고 있다가 한순간 카운터를 먹은 게 정말 얼얼했던 것.

“제길, 너무 방심했어.”

“원숭이에게 공을 그리 쉽게 뺏기다니…….”

찰턴 원정 팬의 원망 어린 눈길이 빌리 키어넌에게 쏟아졌다.

아직도 상기된 얼굴이 가라앉지 않은 빌리는 공을 가진 동료 하프백을 향해 외쳤다.

“패스해! 저 꺽다리 애송이를 납작하게 눌러 버릴 테니까!”

만회해 보라는 듯, 바로 패스가 전달되었다.

측면에서 수비수 한 명을 제쳐 내고 들어간 순간, 준영이 그의 앞을 떡하니 막아섰다.

“더 이상은 못 가.”

‘빌어먹을!’

키어넌은 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자세를 낮춘 준영은 자신이 돌파하거나 슛을 할 루트를 완전히 막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만리장성을 보는 기분이군.’

그는 예전에 홍콩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그래서 중국이나 동양인 선수들의 수준을 잘 알았다.

이 애송이도 덩치만 컸지 실력은 별로겠지.

그리 얕봤는데 이게 웬걸.

돌파는커녕, 자칫 빈틈을 보였다간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녀석에게 바로 공을 빼앗길 것 같았다.

“빌리! 뚫지 못할 거면 패스해요!”

가까이 있던 동료 조니의 외침에 빌리가 주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준영은 어깨로 밀치며 공을 빼앗았다.

“이, 이런!”

‘쉽군.’

당황하는 키어넌의 모습에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시대 선수들은 매우 거칠긴 해도 피지컬이 좋은 편은 못 되었다.

그나마 하체 다리 근육만 단련하다 보니 이런 식의 어깨싸움에선 쉽게 밀려 버리기 일쑤였다.

“저 꺽다리가 또 뺏었어!”

“다시 역습인가?”

이미 한 번 제대로 데었던 찰턴 수비수들이 황급히 데니 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준영은 데니와 반대편에 있던 공격수 레스 마시 쪽으로 롱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앞서 데니와 달리 레스는 달리는 게 조금 늦었다.

그래서 패스를 놓쳤고, 공은 그대로 터치라인을 넘어가 버렸다.

“아깝다!”

“그러게. 이번에도 좋은 기회였는데…….”

아쉬움의 탄성이 리즈 로드에 피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또 한 번 일격을 맞을 뻔한 찰턴 선수들은 굳은 표정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또다시 공을 잡은 키어넌은 문전으로 돌파해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반대편 쪽에서 달려 들어오는 조니와 스튜어트를 노려 크로스를 올렸다.

‘너무 뻔히 보이는 패스야.’

잽싸게 이동하며 뛰어오른 준영은 헤딩으로 공을 걷어 냈다.

그러자 외곽에 있던 찰턴의 하프백이 리바운드 볼을 잡아 재차 크로스를 날렸다.

“나이스 크로스!”

중앙에 있던 스튜어트가 빠르고 날카롭게 들어오는 크로스 패스를 노리며 뛰어올랐다.

하지만 황급히 달려들어 공중 경합을 펼친 준영에게 방해를 받아 공은 골키퍼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어이, 괜찮아?”

준영은 자신에게 밀려 쓰러진 스튜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선 스튜어트는 준영의 몸을 주먹으로 툭 쳤다.

“뭐야?”

“몸이 참 단단하다 싶어서. 혹시 럭비 하다 왔나?”

“아니, 럭비는 전혀 몰라.”

지금 체격 좋은 놈들은 다 럭비만 하고 있는 걸까.

고개를 내저은 준영은 자기 팀의 공격 상황을 살폈다.

골키퍼 샌디 케논이 건네준 공으로 공격을 전개해 나가던 허더스필드는 미드필드 지역에서 찰턴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뺏고 뺏기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레스 마시가 데니스 로에게 패스를 건네주었다.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과감하게 날린 데니의 슈팅은 찰턴 골키퍼의 펀칭에 막혀 골대 위로 날아가 버렸다.

‘코너킥 공격 찬스로군.’

준영은 서둘러 상대 문전으로 뛰어갔다.

장신인 그가 공격에 가담하자 찰턴 선수들의 표정에 긴장이 맴돌았다.

그와 다르게 찰턴 원정 팬들은 시끄럽게 야유를 퍼부었다.

“우- 우-”

“원숭아, 골대 위로 기어오르면 안 된다?”

“손 쓰면 반칙이라고!”

소란스러운 가운데 코너킥이 올라왔다.

선수들은 황급히 자신이 마크할 상대를 쫓고 낙하지점을 선점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살짝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준영은 떨어지는 공을 노리며 껑충 뛰어올랐다.

“잡아!”

“헤딩 못하게 해!”

공이 떨어지는 곳에 세 사람이 있었다.

찰턴의 골키퍼 윌리 더프, 수비수 데릭 유폰, 그리고 이준영.

이 중에서 승자는 준영이었다!

퍼억-!

“으악!”

준영의 헤딩슛이 터진 순간, 골대 안으로 공과 함께 골키퍼 윌리와 수비수 데릭이 나동그라졌다.

그 무지막지한 광경에 야유가 뚝 멈췄다.

“추가 골이다!”

“최곤데, 꺽다리!”

“키가 그냥 장식이 아니었어!”

신이 난 허더스필드 홈팬들은 손수건과 모자를 집어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작년 1부 리그 팀을 상대로 전반에만 2골 리드.

홈팬들은 그 2골을 모두 만들어 낸 주인공을 향해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잘했어, 형님!”

“역시 저질러 버리는구만!”

데니를 비롯한 동료들의 축하를 받은 준영은 섕클리 감독에게 다가갔다.

터치라인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섕클리는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준영은 그의 앞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응? 뭔가? 선서라도 하려는 거야?”

“하이파이브 몰라요? 잘했을 때 서로 손을 들어 손뼉을 치는 건데.”

“그런 풍습도 있었나?”

섕클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을 마주치고 돌아가는 준영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데뷔전에서 데뷔 골 넣었다고 들뜨지 마! 네 포지션이 뭔지 알지?”

“물론이죠!”

한 골도 못 넣게 하겠다!

준영은 보란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를 바라보는 섕클리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준영의 1골 1어시스트로 흐름은 허더스필드로 완전히 기울었다.

찰턴 선수들은 추격 골을 넣으려 애를 썼지만, 그런 조급함 때문에 오히려 공격의 예리함은 더 떨어졌다.

이런 양상은 후반전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개X끼들, 뭐 하고 자빠진 거야!”

“원숭이 한 마리 제치지 못해 빌빌거리고 앉아 있냐!”

“나가 뒤져, 등신들아!”

처음엔 갑툭튀한 동양인 선수에게 야유를 퍼붓던 찰턴 팬들은 이제 부진한 자기 팀 선수들에게 욕설을 쏟아 냈다.

먹다 만 크래커나 사과, 시가 꽁초 등을 집어 던지면서.

몇몇은 필드로 난입하다 경비원들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이런, 누가 훌리건 조상님들 아니랄까 봐…….”

준영은 소란을 보고 혀를 찼다.

그런데 이 훌리건 조상님들의 행동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찰턴 선수들의 움직임이 사뭇 달라졌다.

더 이상 허둥대진 않았지만, 플레이가 상당히 거칠어진 것이다.

손을 써서 유니폼을 잡아당기는 건 예사에 후려칠 것처럼 팔을 휘둘러 댔다.

거기다 위험하게 헤딩하는 데 발을 높이 들거나, 높은 태클을 날리기도 했다.

‘참 나, 심판은 뭐 하는 거야?’

이 시대 축구가 거칠다는 건 알고 있다.

21세기에선 휘슬을 불 상황도 여기서는 대충 넘어가기 일쑤.

앞서 준영의 데뷔 골도 21세기에선 골키퍼 차징으로 판정받을 수 있었지만 그대로 골로 인정되었다.

‘그래도 눈살 찌푸릴 상황은 막아야지. 축구는 신사의 스포츠라며?’

준영이 연방 투덜대고 있을 때였다.

찰턴의 페널티 에어리어 쪽으로 돌파하던 데니스 로가 상대 선수 프레드 루카스의 높은 태클에 차여 쓰러졌다.

“데니!”

정강이를 잡고 뒹구는 데니의 모습에 준영은 황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데니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던 프레드를 그대로 밀쳐 버렸다.

“큭, 이 누렁이 새X가!”

“뭐 인마? 뚝배기 터져 볼래?”

당장이라도 프레드를 쥐어 팰 듯이 으르렁대는 준영을 동료 선수들이 만류하고 나섰다.

이제까지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심판도 나섰다.

“그만하고 물러서! 이번엔 넘기지만 다음엔 퇴장시킬 테니 명심하라고!”

심판의 엄포에 짜증이 났던 준영은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사람을 걷어차고 그냥 넘어갑니까? 최소한 옐로카드는 주란 말입니다!”

“옐로카드? 그게 뭔데?”

“뭐라고요? 아니,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겁니까?”

이 인간, 진짜 심판이 맞긴 한 건가?

준영이 어이없게 바라보건 말건, 심판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난 그런 건 처음 들어 본다고.”

“나 이거 참! 옐로카드란 말이죠. 그러니까, 심한 파울을 했을 때 일단 경고 차원에서…….”

준영이 가슴을 치며 열심히 설명한 말에 심판은 코웃음을 쳤다.

“아시아에는 그런 룰이 있나 보군. 하지만 여긴 영국이야.”

‘뭐? 옐로카드가 없어?’

생각해 보니 그동안 연습 경기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습 경기라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공식 경기에서도 없을 줄이야!

‘하, 굉장하구만, 1957년.’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룰이 이 정도로 다를 줄은 몰랐으니까.

***

하이파이브는 60년대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옐로카드 제도의 경우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로 나왔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주장 라틴이 마땅한 이유도 없이 퇴장당하는 등 대회가 끝난 뒤에도 판정 논란이 시끄러워서 고안되었다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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