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1화 (11/400)

Round 11. 시즌 개막

준영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즈음, 프레드로 저택에는 일단의 손님들이 방문해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알버트는 준영이 왔다는 전갈을 듣자 바로 응접실로 불렀다.

“인사하게. 내 지인들이야. 법률이나 행정과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잃어버린’ 자네 신분 발급도 도와주고 있어.”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그 문제가 처리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참이건만!

준영은 반색을 하며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제임스 네스요. 이쪽은 랜디 스코트. 같이 런던에서 법률가로 일하고 있지.”

“존 Y. 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두 사람과 차례로 악수를 나눈 준영은 마지막 여자 변호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이는 30대 초 정도, 우아하면서 꽤 강단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마거릿 힐다 대처예요. 남작님께 들은 대로 키가 정말 크군요.”

‘엥?’

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거릿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리 놀라시죠?”

“그냥… 제가 아는 사람의 이름과 비슷해서요.”

마거릿 대처라니.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철의 여인 혹은 마녀라 불렸던 영국 최초의 여자 총리란 말인가?

‘진짠가? 아냐. 이름만 같을 수도 있어.’

분명한 건 이들이 자신의 신분 발급에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죠? 여기 재발급된 증명서들이 있습니다.”

“아!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영은 대처에게서 넘겨받은 두툼한 서류 봉투를 살펴보았다.

2003년생이 아닌 1934년생으로 수정된 신분증명서를 보자니, 이젠 정말 이 시대 사람이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국적도 바뀌었군.’

태극기가 아닌 유니언잭이 박힌 옛 홍콩 깃발이 그려져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이미 몇 주 전에 런던의 한국 공사관에 전화해 봤는데 이런 말을 들었다.

‘분실이요? 이상하군요. 저희가 파악하기로 현재 영국 교민은 50명이 채 안 되는데, 이준영 씨는 우리 기록에는 없습니다만?’

‘…그러니까 어릴 때, 왜정 시절에 오셨다는 거군요. 그럼 영주권이 나왔을 테니 영국 이민국에 알아보세요. 굳이 한국 국적을 회복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귀차니즘이 진득하게 묻은 공무원의 말에 준영은 찔끔함보다 서글픔을 느꼈다.

‘그래, 지금 한국 정말 못살지.’

독립과 동시에 전쟁으로 폭망한 나라.

보릿고개가 존재하고, 미국에서 남아도는 설탕과 밀가루를 원조로 얻어 쓰는 개발도상국.

이것이 1957년 대한민국이다.

공사관 직원의 말대로 한국 같은 후진국 국적보다 영국이나 유럽 국가의 영주권이 더 나았다.

‘거기다 현재 영국 축구 리그에 외국인은 드무니까…….’

주전 상당수가 외국인이던 21세기 프리미어리그와 달리, 현재 영국 리그는 폐쇄적이었다.

외국인 선수라고 해 봤자 대부분이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남아공 등 영연방 국가 출신이었다.

‘영어 할 줄 아는 과거 대영제국 출신의 선수들끼리만 공을 차겠다는 건가?’

아무튼 준영은 알버트와의 논의 끝에 ‘한국계 홍콩 시민’이 되기로 했다.

물론 일련의 신분 세탁은 알버트의 보증과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합법적인 통과 절차는 눈앞에 있는 대처 일행이 맡았다.

“Mr.리,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십쇼.”

날카로운 대처의 눈길에 준영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뭔가 의심을 하는 건 아닌지 싶었던 것.

“제가 약간 알아봤는데, 현재 한국의 대통령도 리(Lee)라는 성씨를 쓰더군요. 혹시 아는 사이인가요?”

“아, 그거요.”

뭔가 했더니 그걸 물어본 건가.

준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냥 같은 가문 사람입니다.”

“그래요? 그럼 Mr.리도 귀족이겠군요.”

“예?”

“리 대통령은 미국에서 활동할 때 프린스(Prince)라고 칭했다고 들어서요.”

보통 프린스라고 하면 왕자 혹은 대공, 그리고 상급 귀족을 뜻한다.

그렇다 보니 대처는 현재 한국의 통치자 ‘프린스 리’와 같은 가문 출신인 준영도 고귀한 혈통을 가졌다고 본 것.

‘무슨 터무니없는……. 하긴 영국은 21세기에도 귀족이란 신분 계급이 남아 있던 나라니까.’

당장 알버트만 해도 일대귀족이긴 해도 남작이다.

아무튼 준영은 그와 관련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일본에 망하기 전까지 한국을 다스린 게 이씨 왕조였죠. 이 대통령은 왕실과는 분파는 다르지만, 왕가의 혈통에 뿌리를 둔 집안 출신입니다.”

“그럼 Mr.리는요?”

“이 대통령과는 다른 분파죠. 15세기에 한국에 세종이라는 위대한 왕이 있었는데, 그분의 다섯 번째 왕자가…….”

준영이 술술 가문의 내력을 이야기하자, 대처를 비롯해 법률가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흥미로워하는 건 알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준영이 미래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가문의 내력은 처음 듣는 것이었으니까.

***

대처 일행이 돌아간 후.

알버트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일국의 대통령과 같은 가문일 줄은 몰랐군. 더구나 왕가의 혈통이라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그런 것 같진 않던걸.”

알버트가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준영은 뭔가 감출 게 있거나, 거짓말을 할 때는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대처에게 집안 이야기를 할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뭐, 유명인과 같은 집안이니, 옛 왕가의 핏줄이니 해도 현재는 그냥 일반인일 뿐이죠.”

“21세기라면 그럴지 몰라도 지금은 아직 가문과 혈통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야. 아마 자네가 여느 동양인들과 달라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할걸.”

비백인이라 해도 출신이 좋으면 다르게 본다.

그만한 힘과 재력, 그리고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만만하게 보지 못한다는 거군요.”

“그렇지. 거기다 알아 두면 쓸 만하다 여기는 거고.”

“쓸 만한 가치라…….”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 가문의 내력을 잘 알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축구 선수로 성공하자 나타난 분들 덕분이다.

여기저기서 집안 어른이라는 둥, 같은 파계(派系) 친척이라는 둥.

예전엔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친한 척했던 것.

‘흥, 보육원에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준영이 뻔뻔한 친척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알버트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근데 아까 마거릿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던데……. 혹시 미래에 대단한 인물이 되는 건가?”

“동일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20년 후쯤에 그 이름의 여자 총리가 집권할 겁니다.”

“그럼 동일 인물이 맞겠군. 마거릿은 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니 말이야.”

“어떻게 그리 잘 아시죠?”

준영의 물음에 알버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내 대학 후배니까. 거기다 옥스퍼드에 재학할 땐 내가 몸담았던 보수당의 청년위원회 지부장을 지냈지.”

명문대 출신에 빌 섕클리나 톨킨 같은 유명인과 알고 지낼 정도로 인싸, 거기다 돈독한 정치 인맥까지!

‘이 어르신은 정말 이 지역의 먼치킨이시군.’

준영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

알버트와 대처의 도움으로 준영은 시즌 직전에 허더스필드 타운과 계약을 완료할 수 있었다.

“축하해요, 형님. 이제 진짜 우리 팀원이 된 거네.”

“그러게.”

어딘가 허탈해 보이는 준영의 표정에 데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준영이 허탈해하는 까닭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입단 계약 완료 시점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 두 번째는 선수 급료였다.

‘꼭 시즌 개막 전에 할 필요는 없었잖아!’

알고 보니 이 시기 선수 이적과 임대 규정은 정말 널널했다.

시즌 중이라도 합의만 되면 언제든 이적이 가능했던 것.

다만 우승 경쟁이 치열해지는 3월 말부터는 금지였다.

임대의 경우 과거엔 엄청나게 난잡했다고 한다.

스탠리 매튜스 같은 유명 선수가 ‘초청’을 빙자해서 한두 경기 뛰어 주기도 했고, 오전엔 A팀에서 뛰다가 오후엔 B팀에서 뛰는 일도 있었다고.

협회에선 이런 임대를 비신사적인 행위로 판단해서 금지시켰다.

하지만 팀이나 선수 간에 계약서를 교묘하게 꾸며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었다.

즉, 말만 ‘이적’이라고 하고 선수를 영입해 단기간 써먹고 원래 팀에 도로 ‘이적’시키는 것이다.

‘뭐, 빨리 계약한 만큼 빨리 경기에 나갈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야. 하지만 급료는 정말이지…….’

허더스필드에서 준영에게 제시한 주급은 17파운드.

이 시대 물가로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일반 직장인의 평균 주급보다 2∼3배 정도 많았으니까.

더구나 현재 허더스필드에서 주급 17파운드를 받는 선수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이게 현재 주급 최대 상한선이라고 했던가.’

섕클리 감독에게 듣기로 이건 영국 노동부와 축구협회에서 정했다고 한다.

스포츠는 노동이라기보다 여가에 가깝고, 그런 활동으로 너무 많은 급료를 받으면 서민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이유에서라고.

사실 허더스필드에서는 17파운드보다 낮은 주급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준영이 개인 사정으로 계약을 미루자, 섕클리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존은 현재 우리 팀 선수들 중에 최고 실력을 갖고 있소. 돈 몇 푼 아끼자고 하이재킹 당하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요?’

감독에게 반쯤 협박당한 구단에서는 결국 최대 상한선의 주급을 주기로 했다.

거기다 적잖은 계약금과 경기 출전이나 활약 등에 따라 50∼80파운드의 추가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약속해 주었다.

‘그래도 허전하다고!’

21세기에서 준영의 주급은 17파운드에서 만 단위가 더 붙었다.

그렇다 보니 허탈한 기분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쩝, 일단은 개막전이나 신경 쓰자.’

1957-1958시즌 허더스필드 타운의 1라운드 상대는 찰턴 애슬레틱 FC.

작년 시즌까지 1부 리그에 있다가 강등당한 팀이라고 들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니 결코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거기다 내 실력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는 첫 공식전이잖아. 절대 망쳐서는 안 돼.’

고작 17파운드짜리 선수가 아님을 증명해 주리라!

허탈함이 맴돌던 준영의 눈빛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

1957년 8월 24일.

시즌 첫 홈경기가 열리는 리즈 로드에 17,000여 명의 관중들이 모였다.

관중들의 화제는 올 시즌 허더스필드에 입단한 새내기였다.

“듣자 하니 동양인이라던데?”

“쳇, 칭크 따위가 필드에 뛴다고?”

“그래도 꽤 잘한다고 하던걸?”

“동양인이 뛸 순 있는 건가?”

“내가 알기로 몇 해 전에 스토크 시티에서 뛴 중국인이 있었어.”

호기심과 불만.

동양인 선수가 마땅찮았던 관중들과 이를 조롱하는 찰턴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야유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우ㅋ- 우ㅋ- 우ㅋ-”

원숭이 울음소리와 같은 이 야유는 심판과 선수들이 필드에 나타나오면서 뚝 멈췄다.

둥그레진 관중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쏠렸다.

출전 선수들을 압도하는 당당한 체격.

예상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에 관중석은 또 다른 의미로 시끌벅적해졌다.

‘놀랐냐? 기대하라고. 더 놀라게 해 줄 테니.’

관중들을 바라본 준영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

현재 우리가 아는 여름 이적 시장, 겨울 이적 시장 개념은 2000년대 전후로 정착되었습니다. 쿵푸킥으로 유명한 에릭 칸토나가 리즈에서 맨유로 이적한 것도 1992년 11월 말이었죠.

주급 상한선은 해마다 조정되다가 1960년 초에 들어서 선수들의 반발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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